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07)화 (107/130)

#107

정태준이 거칠고 빠르게 호흡할 때마다 종이봉투가 버그럭거렸다. 조용한 와중 들리는 그 소리는 제법 명확하게 들렸다. 제법 겁먹은 연기도 실감 나게 한다고, 지승혁은 내심 감탄했다.

정태준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지승혁은 지호택의 목소리에 시선을 움직였다.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예상하고 있었나 보구나.”

지호택이 지승혁의 속내를 가늠해 보듯 빤히 쳐다보았다.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을 걸 회장님도 알고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지승혁의 대꾸에 지호택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조바심 내는 구석이 일절 없는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단지 그 안에 들어 있는 노여움만은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배짱이 대단하구나. 그래. 네가 아끼는 그 오메가다. 페로몬은 열성치고 썩 괜찮긴 하지만 그렇게 목을 맬 정도는 아니야. 다시 한번 물어보마.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고?”

지승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고집이 세어서요.”

이번에야말로 지호택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드러났다. 그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허어, 하고 숨을 내쉬었다. 다시 지승혁을 바라보는 지호택의 입매에는 숨길 수 없는 잔혹함이 걸려 있었다.

“그래. 네 오메가 얼굴을 보며 직접 말해 보거라. 네 그 같잖은 고집 때문에 페로몬 쇼크에 걸릴 거라고. 사람 구실을 못 하는 병신이 될 거라고 말이다.”

지승혁은 구태여 몇 번이고 경고를 하는 지호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호택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알고 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가차 없기로 유명했다. 그의 그런 평소 스타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 순간 그는 이례적일 정도로 지승혁에게 많은 기회를 내주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거듭해서 권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승혁이 가진 극우성 알파라는 형질을 아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 기저에 깔린 건 지승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단지 그가 가진 형질에 대한 집착이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프로텍트 아래 있는 지승혁을 말 그대로 복종하게 만들 것이다.

그걸로 끝내지 않을 거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본보기로 지승혁의 오메가라고 알고 있는 정태준에게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다. 조금 전 페로몬 쇼크 운운한 게 공수표가 아닐 거다. 지호택은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페로몬 쇼크가 형질을 가진 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호택이나 지승혁 둘 다 모두 너무 잘 알았다.

다행히 정태준은 우성 오메가고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지호택의 페로몬에 저항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잠깐 동안의 시간이면 지승혁이 일을 마무리하기에 충분했다.

대답 없이 서 있는 지승혁을 보던 지호택이 이영선에게 눈짓했다.

이영선이 정태준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종이봉투를 벗겼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지승혁은 정태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드러난 얼굴을 보며 숨을 삼켰다. 기함한 그의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관자놀이 쪽에 펄떡거리며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

지승혁은 호흡하는 법을 잊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목덜미를 움켜잡고 위협을 한다 해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을 거다.

이 일에 연관시키지 않으려 그렇게 애를 썼는데.

“……정…….”

조정현이, 그러니까 원래라면 정태준이 왔었어야 할 자리에 조정현이 서 있었다.

이 자리에 제일 있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던 사람이었다.

눈에 보이는 걸 믿지 못해 차마 눈도 깜빡일 수가 없었다.

불안정하게 호흡하는 조정현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안색은 파리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그러던 조정현의 눈동자가 지승혁을 발견하고 유영하던 걸 멈추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는 걸 지승혁은 놓치지 않았다.

완벽하게 짜 맞춰 놓았다고 생각했던 판이 어그러졌다. 지승혁은 낭패감을 느꼈다.

등 뒤가 서늘해지고 목덜미의 털이 쭈뼛거리며 곤두섰다.

어째서 지금 이곳에 조정현이 있는 걸까.

분명히 차에서 내리기 전 핸드폰 위치 추적을 해 봤을 때 조정현은 집에 있는 걸로 나왔는데. 틀림없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지승혁은 입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원인과 결과를 반대로 놓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으니 위치가 그렇게 잡히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깨달을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이다.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지승혁은 뼈아프게 인정해야 했다.

이영선이 배신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바로 옆에 정태준이 있으니 만약 그에게 이상한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쉬이 조정현을 보내지 않았을 거다.

이영선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저 아주 약간 턱을 당겼을 뿐이다.

지금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정돈되지 못한 생각들이 꼬리에 불붙은 짐승처럼 어지럽게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지승혁은 무표정을 고수하며 어금니를 질근 물었다가 놓았다.

진정해야 했다. 당황해서야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된다. 냉정해야 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더라도 해야 했다.

지승혁은 멈추었던 숨을 내쉬며 조정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옷이 조금 구겨지긴 했으나 얼굴 등에 맞은 흔적은 없었고 달리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조정현의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한 걸 제외하면 말이다.

들끓던 머리가 조금씩 진정되었다.

“왜 말을 못 하는 게야. 막상 얼굴을 보니 생각과는 달라서 그러느냐.”

호통을 담은 지호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승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지호택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는 조정현을 보던 시선을 천천히 지호택 쪽으로 돌렸다. 지금 얼마나 시간이 흘렀더라. 5분? 10분?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짧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편 지승혁이 말문을 뗐다.

“조금만 참아요.”

입 안이 버석거렸다.

지승혁은 자신을 쳐다보는 큰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조정현은 그런 지승혁을 응시하다가 군데군데 하얗게 뜬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믿음을 보여 주는 조정현이란 존재가 애틋했다.

“끝이냐. 그걸로 되겠어? 이 오메가와 제대로 얘기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텐데. 흠, 그래. 이왕 이렇게 됐는데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네가 직접 하는 편이 좋겠지.”

“…….”

지승혁은 눈동자만을 움직여 지호택을 쳐다보았다. 그의 지시가 뭔지 바로 알아들은 탓이다.

빌어먹을 새끼.

지승혁의 턱이 꿈틀거렸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테고. 어서 하거라.”

재촉하는 목소리엔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회장님.”

“왜. 못 하겠어? 다 예상하고 있던 거였다면 이것 역시 예상한 바가 아니더냐.”

지호택의 눈동자가 잔혹하게 번들거렸다.

지승혁이 바로 반응하지 않자 못 참겠다는 듯 지호택이 직접 조정현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아플 게 분명한데도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를 참았다. 다른 사람이 제 연인을 함부로 대하는 걸 보고 있자니 눈 안쪽에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하거라!”

강한 외침에 지승혁은 조정현의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지호택의 명령은 간단하고 잔인했다.

지승혁 자신의 손으로 제 오메가를 망가뜨리라는 것.

그가 자신의 명령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지호택은 알고 있었다.

프로텍트는 그만큼 강력했다.

지승혁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정현에게 다가갔다. 둥그런 눈동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들어 올리는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건 조정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찮을 거예요, 형.”

조정현의 조용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리어 자신을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에 지승혁은 무심코 웃음을 흘릴 뻔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을 텐데도 둥그런 눈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페로몬 쇼크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량의 페로몬을 주입받을 때 일어난다.

이전에 페로몬 교류를 했던, 즉 섹스를 했던 사람의 페로몬이라도 무조건 다 괜찮은 건 아니었다. 적대적인 페로몬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작정하고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페로몬을 낸다면 일반적인 알파나 오메가였어도 버티기 어려울 거다. 베타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정도다. 하물며 지승혁은 극우성 알파인 데다 조정현은 이전에 페로몬 쇼크 직전까지 갔던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전처럼 아무런 후유증 없이 페로몬이 안정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승혁은 조정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조정현에게서는 일말의 원망이나 불안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지승혁의 손이 조정현의 눈을 덮었다. 손바닥에 닿은 조정현의 체온이 조금 높은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만 눈 감고 있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 조정현은, 지승혁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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