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그것도 있으면 다른 건 뭔데요?”
조정현의 질문에 정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지승혁이 조정현이 걱정되어 정태준을 부른 사실은 맞았다. 단지 혼자 있는 게 걱정이 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이리 단속을 할 정도면, 지금 그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조정현은 감히 짐작하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조정현 자신은 집에서 보호받는다고 하지만, 지승혁은 괜찮은 걸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안색이 나쁘던 지승혁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애가 타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지승혁에게 전화해서 직접 물어봐야 할까. 그렇지만 그는 여태까지 저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어본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정현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현이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조금만 기다려 주면 돼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지승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다리면 되는 걸까? 이곳에서 얌전히. 착한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조정현이 막 정태준에게 물어보려 했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정태준이 양해를 구하듯 눈짓하며 전화를 받았다.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가 만약에. 만약이라는 단서가 붙을 정도의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걸 자신이 모른다면.
내쉬는 호흡이 떨려 왔다.
뿌리가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대화처럼 “어.”만 두어 번 반복하며 대화하던 정태준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일순 싹 사라졌다. 그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굴까.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짐작도 가지 않아 머릿속에 물음표만 수십 개 띄우고 있을 때 정태준이 “어. 알겠어.” 하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조정현은 물어보려고 했던 질문을 하지 못했다.
정태준이 전화를 끊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현관문 벨이 울렸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달리 없다. 혹시 지승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라면 굳이 벨은 누르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조정현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한밤중의 방문자는 다름 아닌 이영선이었다.
* *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서 뵙겠습니다.”
지승혁이 통화를 종료했다.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바로 반응해 올 줄은 몰랐다.
짐작했던 대로 지연호는 효시였다.
지호택이 움직이는 시기를 알려 주는.
벽에 걸린 시계는 자정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까지 지승혁은 사무실에서 업무 중이었다. 지승혁은 바로 사무실에서 나와 이동하며 서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 내가 지시한 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주차장에 도착한 지승혁은 차에 올라타 문자로 받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도로에 차는 많았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도로는 한산해졌고 급기야 스산함을 느낄 정도까지 풍경이 바뀌었다.
지승혁의 차가 멈춘 곳은 재개발을 앞둔 부지였다. 담장이 무너지거나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가 되어 있고 유리창은 깨져서 인기척이라고는 일체 없는 곳에 고급 세단 서너 대가 서 있어 이질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후 글로브 박스에서 손전등을 꺼내 든 지승혁은 건물 외벽을 비추며 빠르게 훑어보았다.
“선선빌라 101동 2층…….”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창문이 깨진 건 다른 곳과 엇비슷했으나 나무판자가 안쪽에서 덧대어져 있는 것만이 달랐다. 눈여겨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테지만 가로등도 들어오지 않는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 통행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잘도 이런 장소를 골랐다 싶었다.
지승혁은 벽에 칠해진 ‘철거’라는 글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 밑창으로 자그락거리며 유리가 밟혔다. 이미 사람이 먼저 와 있는 듯 먼지가 쌓인 곳에 어지러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지승혁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얗게 먼지가 일었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는 길목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지승혁임을 확인하고 묵례를 한 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손을 펴 한쪽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그나마 드럼통 안에 나무로 불을 때 내부를 어렴풋이 밝히고 있었다. 어차피 제대로 붙어 있는 문이 없었기 때문에 질식할 염려는 없었다. 원시적인 형태의 조명에 사람들의 인영이 어둑하니 길게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지승혁은 빠르게 내부를 훑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의 뒤에 있던 지호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극우성인 지승혁을 제압하기에는 자신 외의 다른 이들은 역량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프로텍트에 종속되었다고는 하나 지승혁은 극우성 알파였다. 평범한 베타들이 그런 지승혁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승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얼굴을 다시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 그동안 생각은 좀 바뀌었고?”
지호택이 고개를 들며 질문했다. 지승혁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그게 아니란 걸 아시니 이곳으로 부르신 거 아닙니까.”
지승혁의 대답에 지호택의 인상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성큼성큼 지승혁 쪽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귓가에서 철썩,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이어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호택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뺨을 후려갈긴 듯했다. 어찌나 세게 때린 건지 순간 몸이 휘청이기까지 했다. 입술이 터진 건지 짭짤한 피 맛이 났다. 늙어서 힘도 좋다고 조소하며 지승혁은 지호택을 응시한 채로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지호택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몇 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잇새로 나직하게 “그거 데리고 와.” 하는 지시를 내리자 안쪽에서 두 명 이상의 인기척이 났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조금 틀어 쳐다본 지승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이영선과 그가 데리고 나온 또 다른 사람이었다.
이영선은 그보다 체구가 조금 작은 사람을 붙들고 있었다.
두 손을 뒤로 해서 묶은 듯 팔이 불편해 보였지만 다리 쪽은 별다른 구속을 하지 않았다. 머리에는 굳이 종이봉투까지 씌워 두었다. 그러나 그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지승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계획대로라면, 이영선이 데리고 있는 사람은, 정태준이었다.
정태준을 함께 지내게 한 건 혼자 집에서 지내는 조정현이 안쓰러운 것도 있었지만 그의 상황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피기 위한 것도 있었다. 또한 지호택이 수작을 부렸을 때 조정현 대신 인질로 잡힐 대역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정태준 역시도 기꺼이 수락했다.
조정현과 정태준 둘 다 오메가고 체격도 엇비슷했다. 특히나 정태준은 페로몬 조절을 잘하니 지호택을 상대로 열성 오메가로 착각할 수 있게끔 위장이 가능했다. 조정현을 직접 만나 보지 않은 지호택으로선 그의 페로몬 느낌이 어떤지 알 길이 없을 거고, 그저 페로몬 강도만을 판단의 재료로 쓸 테니 말이다.
지승혁이 보는 앞에서 조정현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게 지호택이 쓸 만한 방법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지호택의 성격상 지승혁에게 자신의 능력 과시를 하고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이영선에게 특별히 지시를 내릴 공산이 컸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실은 심어 놓은 첩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큰 혼란을 겪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승혁은 그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지승혁은 이영선의 정체를 알고도 근처에 두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역으로 그를 포섭했다. 지호택이 약점으로 쥐고 있던 걸 해결해 주겠다고 했으니 이영선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지호택이 그의 프로텍트에 이영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승혁은 상당히 놀랐다.
지호택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영선의 약점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뭐든지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는 걸 좋아하는 지호택이라면, 모든 상황이 자신이 정한 틀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 못 하는 통제광인 지호택이라면, 그 역시도 프로텍트에 종속시키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지승혁은 어떤 가설을 한 가지 세웠다.
프로텍트에 들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지호택의 몸에 부담을 주거나, 혹은 프로텍트에 들일 수 있는 인원의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지승혁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만약 이영선이 지호택의 프로텍트에 종속된 상태라면 상황이 좀 더 까다롭게 돌아갔을 게 자명했으니 말이다.
수가 적은 알파 중에서도 한 줌인 극우성. 그리고 그중에서도 또 아주 일부만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프로텍트기에 워낙 알려진 사실이 없는 능력이다.
프로텍트에 들일 수 있는 사람 수가 제한된다는 것 역시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100% 확신할 수 있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런 불확실한 가설 하나에 모든 걸 맡길 정도로 상황이 낙관적이진 않았다. 뭐든 과할 정도로 대비를 하는 편이 좋았다.
특히나 조정현이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다시는 조정현에게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통까지 확실하게 틀어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