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그럼 내가 쓸 방은 내가 마음대로 정하면 되는 거야? 이전에 쓰던 방 쓰면 되나?”
“어, 아뇨. 거기 말고 이쪽 방요.”
조정현은 주의를 환기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린 정태준에게 서둘러 방을 안내해 주었다. 이전에 그가 사용했던 방과 다른 방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조정현 본인도 몰랐다. 단지 전에 정태준이 예전에 자신이 썼던 방에 머물렀다고 말했을 때 지승혁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아, 그게요. 여기가 그 방보다 좀 커요. 바깥 소리도 잘 안 들리구요.”
괜스레 주절주절 이유를 덧붙였다. 정태준이 뭔가 의미를 담은 눈길로 슥 조정현을 쳐다보더니 픽 웃었다. 괜히 땀이 나고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래. 이 방 쓰면 된단 말이지? 난 뭐, 다 좋으니까 상관없긴 한데.”
조정현은 별 이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준이 가방을 안으로 옮기고 나오며 팔을 길게 앞으로 쭉 폈다.
“그러면 기간 한정 객식구 된 기념으로 내가 저녁 좀 만들어 줄까?”
정태준의 얼굴에는 누구나 호감을 느낄 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조정현을 집에 데려다주고 호텔로 돌아온 지승혁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일이 바쁜 건 정말이긴 했지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못해도 서너 시간 남짓의 수면 시간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조정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봤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직한 곳에서의 업무가 바쁘다는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물론 전혀 없는 거짓말은 아니다.
지승혁은 얼마 전 도영전자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사업부에 특채로 입사하게 됐다. 지호택은 신입으로 입사시킨 후 적당한 때에 승진시킬 속셈이 분명했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시기적으로 너무나 눈에 띄는 지승혁의 입사는 회사 내부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흔하지 않은 성씨에서부터 출발된 합리적인 추측은 모두의 머릿속에 어떤 결론을 내게 만들었다.
덕분에 처음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부터 지승혁을 찾는 임원들이 사무실의 문턱이 닳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승혁에 대한 소문은 더더욱 빠르게 퍼져 나갔다.
지승혁에게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시간 또한 가리지 않았다. 일을 익히기에도 바쁜 와중에 쓸데없는 데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들 하나하나를 적당히 예의를 차려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지승혁의 사수 역시 눈치를 살폈다. 편한 회사 생활을 만들어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건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자신에게 서류 작업 등의 일을 일체 맡기지 않았다.
결국 지승혁 쪽에서 먼저 할 일이 없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경 쓰지 말고 급한 일부터 처리하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지승혁은 상사에게 배려는 고맙지만 실무를 익혀야 하니 다른 부하 직원 대하듯 똑같이 대해 달라고 말했고 그제야 겨우 그에게도 업무가 배당되었다.
일 자체는 무리 없이 익힐 수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빠르게 배워 나가는 그의 업무 파악 능력에 상사가 혀를 내둘렀다. 처음엔 신입이 처리할 수 있는 단순한 업무에서 시작했지만, 곧 제법 중요한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자처해서 야근을 하다가 호텔에서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출근을 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루였다.
그러다 지연호가 감시를 뚫고 빠져나갔다는 보고에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사무실에 양해를 구한 후 조정현 쪽으로 향했다. 빡빡하게 경비를 세워 두었지만 그사이 지연호가 어떤 식으로 그들을 구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경비 목적으로 세워 둔 게 아니라 지연호가 바깥으로 탈출했을 때 지승혁에게 알려 주기 위한 경보기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손 놓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물론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로 조정현이 머무는 집 근처에 경호를 세워 두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연호의 감시를 맡은 이들이 그에게 매수되었다고 해도 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예상한 범위 내였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고 해도 좋았다.
지연호는 멍청하고 단순하긴 해도 아무 일에나 흥분하지 않았다. 약이 바짝 올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리다 인내가 끊어지는 일이 생기면 바로 그때 돌진하는 타입이었다.
지연호에게 있어 그 버튼은 지승혁에게 그룹을 승계하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을 때다.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지호택의 후계자로 지낸 세월이 있다. 그런 지연호의 정보망은 구석구석 뻗어 있을 게 분명했고, 지승혁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당한 만큼 지승혁에게 타격을 주고 싶어 할 게 분명했다. 지승혁에게는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니 그 목표는 지승혁의 그룹 승계를 어그러뜨릴 수 있는 일이나 혹은 조정현이었다. 다른 수상한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지연호는 자신이 보유한 주식들이 어떤 식으로 이동했는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지호택의 프로텍트에 들어간 지연호가 거절할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중요 인물에게는 그가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미 지연호 자신이 쥐고 있던 패는 모두 내주었다고 판단했을 테고, 사라질 땐 사라지더라도 지승혁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 할 게 빤했다. 지호택의 손이 아니라 저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지연호가 계산을 마치고 결정한 목표는 조정현이었다.
나머지는 무슨 일이 생겨도 뒷수습만 잘하면 됐지만, 그의 목적지가 조정현 쪽이라면 뒷수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지승혁은 어떻게든 조정현에게 도착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큰일이 벌어지기 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지호텍의 프로텍트에 귀속되어 있던 지연호에게 두어 마디 해 주니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빠르게 포기했다. 아무리 막 나가는 지연호더라도 알파라는 형질이 박살 나는 건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당연하다.
형질이라는 건 그게 아무리 열성이라 하더라도 쉬이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살아왔던 세상의 법칙이 어그러지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지간한 병신이 아니고서야 절대 포기할 리 없다.
지승혁의 단단한 입매가 꿈틀거렸다.
눈앞에서 지연호를 치워 버리고 나서야 제대로 조정현을 볼 수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린 모양인지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선에 대해서 물어 왔으나 태연하게 모르는 척 넘겼다. 그리고 조정현은 그런 제 거짓말을 믿어 주었다.
조정현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저 그런 쓸데없는 사실은 몰라도 되니 그를 보호한 것뿐이었다.
“…….”
지승혁은 오늘 만난 조정현에 대해서 떠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조정현은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아니, 변함이 없다는 건 맞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사랑스러웠다.
둥그런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따뜻한 피부를 만졌다가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여린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그 달콤한 살 내음을 맡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그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나마 스치듯 만졌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좀 더 만지고 싶다는 욕구가 들썩거렸다.
지승혁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길게 한숨 쉬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앞으로 닥칠 일을 준비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천천히 눈꺼풀을 감은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손에 닿는 건 목 끝까지 감싼 터틀넥이었다.
지승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침잠했다.
* * *
정태준과 함께 지낸 지 어느새 3일이 지났다.
이렇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구나, 싶은 감회가 드는 시간이었다.
극장이라도 갈까 하고 물으면 VOD를 보자고 했고, 마트에 갈까 물어보면 어플로 시키자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조정현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욕실에 들어간 정태준이 씻는 소리를 들으며 조정현은 소파 끄트머리 한 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아무리 달리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정현아, 몇 시에 잘 거야?”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정태준이 타월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조정현은 샤워 후 말갛게 된 정태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태준 형.”
“어?”
조정현의 부름에 정태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왜. 야식 먹고 싶어? 배달시킬까? 마침 나도 좀 출출한 참이었는데. 매운 거 좋아해?”
얼굴에 웃음을 띤 정태준에게 물어보기 멋쩍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어, 혹시나 하고 한번 여쭈어보는 건데요. 혹시 태준 형이 오신 거. 저 외출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주저하긴 했으나 한 번 운을 떼니 쉽게 말이 나왔다. 머리끝을 말리던 정태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조정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정태준이 입술을 한 번 씰룩거렸다.
“그것도 있고.”
정태준은 눈썹을 살짝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조정현의 입술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