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04)화 (104/130)

#104

지승혁은 조정현이 말을 고를 동안 재촉하지 않고 끝까지 들은 후 답했다.

“정현이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조금만 기다려 주면 돼요. 알겠죠?”

지승혁은 살짝 미소하며 다독이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말했다.

“나는 정현이가 더 걱정돼요. 밥 잘 먹고 정태준이랑 붙어 있어요. 알겠죠?”

“……제가 앤가요.”

결국 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아주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럼 가 볼게요.”

지승혁은 떠나기 전 조정현의 머리카락 끝을 스치듯 만지고 다시 차에 올랐다. 묵직하게 문 닫히는 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차 문을 닫은 그가 창문을 내렸다. 얼른 들어가라는 권유에 조정현은 그를 배웅한 다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 조정현을 잠시간 응시하던 지승혁은 곧 운전석 쪽에 신호했고 이내 엔진음을 내며 차가 출발했다.

조정현은 차 배기음이 아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결국 오랜만에 만났지만 포옹도, 뽀뽀도, 키스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을 뿐.

오랜만의 재회치고는 너무나 싱겁게 끝이 났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보다 뭔가가 껄끄럽게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딱히 설명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비유하자면 매끈한 표면을 문지르던 손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 같은 그런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지승혁이 바빠서 집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얼굴을 잘 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이런가 보다, 하고 결론 내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같은 동에 사는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오른 조정현은 벽에 기댄 후 숫자판에 표시된 층수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실은 좀 피곤해요.]

지친 기색이 깊이 배어 있던 지승혁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조정현은 이럴 때 그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죽 저가 걱정이 되면 정태준을 집에 부르라는 소리를 했을까.

지금 조정현이 할 일은 지승혁의 걱정이 하나라도 없어지게끔 그의 말을 따르는 거였다.

지승혁이 걱정하지 않도록. 그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조정현에게 주어진 일은 그거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조정현이 현관문을 열었다. 적막한 집 안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집 안에 사람이 없어서 정체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움직이며 옷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조정현은 일부러 헛기침도 한 번 하고 “일단 씻어야지.” 하는 소리를 입 밖으로 굳이 냈다.

잠시 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조정현은 김윤혜가 준 통장을 가지고 소파에 앉았다. 한참을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케이스에서 통장을 꺼내 들었다. 통장 안쪽에 노란색 점착 메모지가 붙어 있었는데, 숫자 네 개가 적혀 있었다. 비밀번호인 듯했다.

표지를 넘긴 조정현의 시야에 통장 개설 일이 들어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김윤혜가 했던 말처럼 통장은 지금으로부터 십수어 년 전에 개설이 되었다. 통장 발행 회차 역시도 수십여 차례 이상이었다.

찬찬히 내역을 살펴보던 조정현은 가슴 안쪽이 뻐근해지면서 풍선이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그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으로 기재된 날짜를 눈에 담았다.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을 지내 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건 무겁고 폭신하며 따뜻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살펴본 조정현은 통장을 잠시 내려 두고 손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전해 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데도 꾸준하게 이 통장을 유지했던 김윤혜의 그 마음을 조정현은 감히 제대로 헤아릴 수도 없었다.

눈앞에 김윤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중에 또 만날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조정현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가끔씩 몸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느 사이에 또 괜찮아지는 걸 반복했다.

히트 사이클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벼운 몸살인가 싶어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반복되는 걸 보니 병원에라도 가 봐야 하나 싶어졌다.

소파에 기대 몸에 힘을 쭉 빼고 고개를 젖혔다. 요 근래 이런 상태가 잦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성 같기도 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조금씩 몸 상태가 나아졌다.

그때 인터폰에서 벨이 울렸다.

갑작스럽게 적막을 깨는 인공적인 벨 소리에 조정현은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가서 화면을 보니 다름 아닌 정태준이었다. 밝게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 뒤로 로비 층이 화면에 비추었다. 인터폰으로 문을 연 조정현은 빠른 움직임으로 통장을 정리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현관문 쪽으로 간 조정현은 미리 문을 열고 정태준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정태준은 작은 슈트케이스를 쥐고 있었다. 문에 기대고 서 있던 조정현을 발견한 정태준이 방긋방긋 웃었다.

“오. 정현아, 문 열고 나 기다려 준 거야?”

“네. 올라오시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으이그, 예뻐라.”

정태준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슈트케이스라도 대신 받아 들까 해서 조정현이 손을 뻗었지만 정태준이 괜찮다며 사양했다.

조정현은 안으로 들어오며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정태준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이 내는 기척이 새삼스러웠다. 되짚어 보면 이 집에서 타인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게 벌써 며칠이나 되었다.

적요하게 고여 있던 공기가 정태준의 등장으로 단번에 바뀌었다.

조정현은 가방을 한쪽 구석에 놓는 그에게 말했다.

“형이 갑자기 부탁하시지 않으셨어요? 저도 오늘 형 만나서 들은 거라,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아니, 뭘. 나야 정현이랑 같이 지내면 땡큐지. ……근데 오늘 지 사장님을 만났어?”

“아, 네에. 어떻게 우연하게요. 그동안 바쁘셔서 계속 얼굴을 못 봤었거든요.”

“……음, 그래. 그러면 오랜만에 보는 거였겠네.”

잠깐 텀을 두고 말하는 정태준을 보며 조정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정태준이 그런 조정현의 머리를 토닥였다.

“아이구, 그동안 쓸쓸했지.”

조정현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정태준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하나로 정의되는 기분이었다. 쓸쓸하다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아마 그것과 가장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조정현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태준 형. 혹시 언제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고 승혁이 형에게 말 들으신 거 있으세요?”

“어어? 정현이 지금 나랑 같이 있기 싫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너무하네.”

조정현은 짓궂게 웃는 정태준을 보며 당황해 즉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뇨. 그게 아니구요. 형이랑 있는 건 좋은데요,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가 해서 여쭤본 거예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구요.”

“아이구, 놀리지도 못하겠네. 알아, 알아.”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조정현을 본 정태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아직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조정현의 팔을 툭툭, 쳤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지 사장님이 연락해서 온 거라. 미안?”

“어, 아뇨. 사과하실 건 없으세요.”

조정현은 그의 대답에 낙담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정태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보던 정태준이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궁 기울여뜨렸다. 설마 표정에 제가 서운해하는 게 드러났나 싶어 당혹한 조정현이 뺨을 문질렀다.

“정현아, 잠깐만.”

“네?”

정태준의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다. 마치 열이라도 재는 것 같았다. 정태준의 체온이 조금 서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손바닥이 떨어졌다.

정태준이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며 질문했다.

“혹시 요새 몸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아뇨, 딱히 그렇진……. 그런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상하긴 했구나.”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정태준의 눈치를 살폈다.

조정현의 되물음 속에 숨겨진 뜻을 바로 알아차린 정태준이 경계를 풀어 주기 위해서인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이루었다. 조정현의 빗장이 단숨에 헐거워졌다.

“병원은 가 봤어?”

조정현은 켕기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내며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정태준은 웃는 얼굴 그대로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음, 그랬어? 그러면 지 사장님은 알아?”

갑자기 지승혁이 언급되는 것에 조정현이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론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 지승혁에게 별것 아닌 일로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어차피 조금만 쉬면 금세 괜찮아졌으니 말이다.

조정현은 조금 전과 똑같은 답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정태준의 얼굴이 조금은 난감하게 바뀌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린 정태준의 얼굴에선 조금 전까지 보였던 곤란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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