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03)화 (103/130)

#103

“아뇨.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쳐다보시지 말라는 게 아니구요,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 해서 여쭤본 거예요.”

지승혁의 반응에 조정현 역시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승혁은 조정현을 쳐다보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새삼스럽다 싶어서요.”

지승혁이 천천히 턱을 문지르며 나직이 말한 후 다시 침묵했다. 조정현은 그의 다음 말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지승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원래 오늘도 정현이 얼굴 못 보나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좋아서 그래요.”

거칠 것 없이 솔직하게 이어지는 말에 도리어 조정현 쪽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공기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얼굴에 열이 조금씩 몰려들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기간의 공백을 단숨에 증발시켜 버리는 것 같은 달콤한 말에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정현은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반대편 엄지로 꾹꾹, 눌렀다.

“저도요. 저도 좋아요.”

열기가 더해진 차 안의 공기가 조금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형,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식사는 잘 하고 계세요? 잠도 잘 주무시는 거 맞구요? 그렇게 바쁘셔서 어떡해요. 좀 쉬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을 하면 할수록 몸을 불려 나가는 여러 가지 걱정에 조정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머릿속에 생각으로만 존재했던 것들이 말을 함으로 인해 실체를 가지기 시작했다.

지승혁은 극우성 알파라는 형질 덕분인지 아니면 본인의 꾸준한 관리 덕분인지, 좀처럼 지치는 일이 없었다. 관계를 밤새도록 한 후 체력이 부족해 하루 내도록 침대에 누워 있는 조정현과 다르게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내던 그였다.

한데 그런 지승혁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면 이럴까. 그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일정이 살인적인 걸까.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게 아닐까.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안 들 수 없었다.

강인한 체력을 가진 그가 이렇게 지친 티가 날 정도로 힘든데, 고작 얼굴 좀 못 봤다고 내내 침울해져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승혁에게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전화상으로 투덜거렸다가 이렇게 만났다면 정말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조정현은 입술에 힘을 주고 꼭 다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조정현이 정신을 차렸다. 지승혁의 시선과 마주친 조정현이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형 걱정되어서요. 몸 상태는 괜찮으신 거예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지승혁은 다시 잠시간 말이 없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곤 조정현을 빤히 응시했다.

“실은 좀 피곤해요.”

그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어지간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이기에 순순히 인정하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꾹 조이듯 아파 왔다. 조정현이 뭐라고 하기 직전, 짧게 한숨을 내쉰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음, 하지만 정현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승혁은 어느새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돌아와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조정현은 김윤혜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지라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누른 조정현은 물끄러미 지승혁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승혁의 건강이 염려스러운 마음은 변함없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 데, 넌 괜찮은 게 아니라며 뭐라 밀어붙이는 것도 아닌 듯했다. 만약 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조정현이 뭐라고 입을 대기 전에 지승혁이 알아서 했을 거다.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바쁜 상황에 처한 지승혁에게 몸 생각하라며 말을 보태는 건 그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 잠시 함께 있는 시간이라도 그가 좀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형,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요.”

기분 탓인지 지승혁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눈만 들어 올려 그를 보던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수습하기 시작했다.

넋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 성애적으로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흘려보내다니. 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페로몬을 내보내던 지연호를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조정현은 자신의 페로몬을 알아차렸을 게 분명한 지승혁을 흘끔거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어 마디라도, 뭐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의 태도는 마치 페로몬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 같았다. 아마 당황했을 조정현을 배려해 하는 행동일 거다.

그러나 페로몬을 핑계 삼아 지승혁을 끌어안고 싶었던 조정현은 그의 태도에 괜스레 서운해졌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럴 것도 아니었다.

차 안이라는 밀폐공간이고, 운전석에는 김성채도 앉아 있었다.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도 아니고 다음에도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 조정현은 파렴치한 생각 그만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무리 무의식적이라고는 하지만, 아니 도리어 그렇기에 더욱, 이렇게 페로몬을 흘린 뒤에 그의 손을 잡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사이이긴 했으나 그렇기에 더욱 멋쩍은 것일는지 모른다.

하다못해 김성채만 없었어도 지승혁에게 매달리는 일에 대한 저항감이 좀 덜했을 것 같은데.

조정현은 슬쩍 운전석 쪽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아주 약간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 봤자 바뀌는 건 없다. 망설임을 느끼는 건 어차피 저 자신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았을 거다. 비겁한 생각이다.

조정현은 맞잡은 제 손을 꼼질거렸다.

“…….”

그렇지만 껴안아 주지도 않는 건 확실히 좀 서운하긴 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페로몬이라도 좀 내주지.

자꾸만 불만이 흘러나왔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조정현은 지승혁 쪽을 흘끔였다.

피곤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고 제가 얼마나 철이 없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러잖아도 바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태평한 생각을 하는 자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어차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시간이야 많을 게 아닌가.

조정현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막힘 없이 도로를 빠져나간 차는 집 주차장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조정현은 저보다 먼저 내려선 지승혁과 자연스럽게 출입구 쪽으로 가려다가 가만히 서 있는 그를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지승혁의 얼굴에 미안한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조정현의 뇌는 찰나의 순간 지승혁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 지승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기에서 내려 줘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요?”

조정현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당연히 가능하다. 하지만 설마하니 주차장에서 인사를 하고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조정현에게 한발 늦은 당황이 찾아왔다.

“형, 형은요? 같이 안 올라가세요?”

“……미안해요. 상황 듣고 마침 근처여서 들렀던 거라 바로 들어가 봐야 해요.”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말하는 지승혁을 조정현이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실망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조정현은 빠르게 기분을 수습하려 애썼다.

지금 이대로 가면 또 언제 지승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내일은 볼 수 있을까. 오늘 밤에라도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자신 없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얼굴로 헤어지기 싫었다.

하고 싶은 대로 툴툴거렸다가 그를 기다리는 내내 후회에 빠져 있기 싫었다.

조정현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어요. 잠깐이라도 형 봐서 좋았어요. 식사 꼭 챙겨 드시구요. 틈나면 주무셔야 해요. 안색이 정말 안 좋으세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순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던 지승혁의 눈매가 어느 순간 부드럽게 풀어졌다.

“날 생각해 주는 건 정현이밖에 없네요. 고마워요.”

나긋한 목소리에 조정현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평범한 감사 인사인데도 말을 한 사람이 지승혁이라는 점에서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정현아.” 하고 지승혁이 나직이 이름을 불러와 조정현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미안한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한 말요? 뭔데요?”

조정현은 지승혁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앞으로도 며칠은 더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요. 혼자 있기 적적할 테니 정태준과 같이 지내도록 해요. 정태준에게 연락은 내가 해 둘게요.”

“태준 형이랑요?”

조정현이 의아하게 물어보자 지승혁이 “네, 정태준이랑.”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태준 형이랑 생활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저는 형이 더 걱정, ……음, 걱정되는데요.”

걱정이라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다른 표현이 있을 텐데. 좀 더 어른스러운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조정현의 머릿속에 묘한 조바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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