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개씨발 새끼.”
김성채가 한 말에 조정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사장님이라고 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언급된 지승혁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하마터면 김성채에게 정말이냐고 물을 뻔했을 정도였다.
김성채가 지승혁을 언급하자 남자의 기세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계산하는 듯 바쁘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핏기 없이 허옇게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리고 남자는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정류장 근처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지승혁이 내려섰다.
조정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지승혁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제일 먼저 들었고, 그다음엔 걱정 비슷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지승혁의 안색도 썩 좋지 않았고 살이 빠졌는지 얼굴선이 좀 더 날카로워진 듯 보인 탓이다.
지승혁은 언제나와 같은 흰 셔츠가 아니라 검은 목티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정현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남자를 응시하던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타십시오.”
“내가 왜.”
“지연호.”
남자가 거부 의사를 보이자 지승혁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지연호라고 부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연호는 순간 기가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치듯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바쁘신 분이 왜 여기에 있어. 그때 내가 쑤셔 줬던 칼맛을 못 잊어서 왔냐? 한 번 더 후벼 파 줘? 이번엔 멱도 따 줄 수 있는데. 어? 딱 대 봐, 좆같은 새끼야.”
조정현은 제가 들은 말에 숨을 멈췄다.
지연호는 이전에 지승혁을 칼로 찌른 장본인이었다. 머리끝에서 피가 삭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하니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형을 칼로 찌를 정도로 막 돼먹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지승혁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직접 차에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끌려가겠습니까. 어느 쪽이어도 나는 괜찮습니다만.”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승혁은 어디까지나 냉정을 유지했다.
무시할 수 없는, 숨이 막히는 위압감이었다. 옆에서 보는데도 이런데 바로 코앞에서 마주 보는 지연호가 얼마나 압박을 느낄는지는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열릴 것처럼 지연호의 입술이 씰룩였는데, 때마침 지승혁이 상체를 조금 기울여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워낙 목소리가 작아 정확히 지승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으나 지연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걸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국 지연호가 꼬리를 말았다. 구겨진 자존심을 고스란히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지연호는 조금 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인상을 구기며 지승혁이 타고 온 차에 탔다.
운전사와 미리 말을 끝내 놓은 건지 문을 닫자 차가 출발했다.
그제야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다가왔다.
마치 환상을 보는 것처럼 조정현은 멍하게 그 모습을 응시했다. 눈도 깜빡거릴 수가 없었다.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지승혁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여긴 보는 눈이 많네요. 자리를 좀 옮길까요?”
조정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안기지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는 그 시선에 지승혁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현아.”
익숙한 목소리에 조정현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입 안쪽 살을 지그시 물었다.
“차로 가요.”
조정현은 제 대답을 기다리는 지승혁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정현의 옆에서 걸었지만 딱 붙지 않았다. 조금 간격을 유지한 채 걷는 지승혁의 행동이 의아했다.
[지승혁 베타랑 선보는 얘기는 들었지?]
지연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충동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걸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조정현은 자신을 먼저 차에 태우고 뒤이어 올라타는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어머님은 잘 만났어요?”
심상하게 묻는 말에 하마터면 우리 지금 며칠 만에 본 줄 아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조정현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투정이 섞였다. 어린애 같은 제 태도에 조정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나도 보고 싶었어요.”
선선하게 말하는 지승혁의 목소리에 조정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꾹 다물어졌다. 얼른 지승혁을 끌어안고 싶었다. 입을 맞추고 그의 체향을, 페로몬을 맡고 싶었다. 조정현이 지승혁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을 때였다.
지승혁이 조정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안전벨트 매야죠.”
지승혁의 지적에 조정현은 아, 하고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멍청하게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다. 조정현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안전벨트를 맸다.
기분 탓일까. 마치 포옹하려던 걸 제지당한 것 같다.
우우웅거리는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차가 출발했고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불쾌한 경험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뇨, 그건, 형이 잘못하신 것도 아니고요.”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지승혁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낮고 부드러웠다. 상냥한 그 목소리를 오랜만에 다시 듣는 게 너무나 좋았다. 조정현은 길쭉하게 찢어진 그의 눈이 움직이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하지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맞선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지승혁이 다시 한번 “응?” 하고 물어 올 때까지 조정현은 알맞은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정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미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해 모르는 척, 괜찮은 척하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연호가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을 지승혁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형이 선, ……선을 보신다고요. 베, 베타인 분이랑요.”
이렇게까지 돌려 말하지 않기도 힘들 거다.
조정현은 입을 뗀 순간부터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끝까지 말을 마쳤다.
꾸미지 않은 투박한 질문에 지승혁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래요?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그, 그렇죠?”
태연한 목소리에 되레 조정현이 멋쩍어져 웃었다. 지승혁의 손가락이 차 안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또 다른 얘기 들은 거 없어요?”
“음. 뭐…… 그냥, 없어요.”
“그렇군요. 상대하느라 피곤했죠.”
조정현의 대답에 지승혁은 어디까지나 덤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얼굴에 한 번 시선을 준 후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그, 그분, 아니 그 사람이 형 동생분이시라고, 들었어요. 혹시 저번에 다치신 거 그 사람 때문이에요?”
지승혁은 작게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다른 얘기 들었네요.”
농담처럼 하는 말에 조정현은 입술을 벌렸다. 갑자기 이렇게 맥없이 굴 줄은 몰랐다.
“네? 아뇨…… 이건. ……일부러 그러신 거죠.”
“너무 신경을 쓰길래요.”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이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다 나았잖아요.”
“아니, 하지만…….”
“그런 얘기보다 나는 정현이 얘기를 듣고 싶어요. 요새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같은 거요.”
“…….”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말하는 지승혁에게 더 이상 뭐라 토를 달 수 없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지승혁에게 가졌던 서운함이나 그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속상함 때문에 이 순간을 망치기는 싫었다.
“복학하는 건 전화로 말씀드렸고요, 음.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해 줄래요? 직접 듣고 싶었거든요.”
지승혁은 조정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의 요청에 조금 머쓱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조정현은 다시 한번 그에게 복학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오늘 김윤혜를 만났던 일에 대한 것도 말했다. 먹었던 음식이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얘기해 줬다.
무의식적으로 김윤혜에게 통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그녀가 당부했던 것이 떠올라 직전에 멈출 수 있었다. 말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으나, 김윤혜가 특히나 신신당부한 일이었기에 조정현은 그 문제에 대해 함구하는 걸 선택했다.
“어르신과 만나서 좋은 시간 잘 보냈군요.”
조정현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던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그는 조정현을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선선할 때에는 우리 정현이가 바빠지겠어요. 전과하겠다는 것도 준비 잘 되어 가고 있어요?”
“네. 애매한 건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보려고요.”
“그래요.”
조정현은 자신의 얼굴 곳곳에 꽤 오랫동안 진득하게 닿아 있는 지승혁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저,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네?”
“계, 계속 쳐다보셔서요.”
조정현의 지적에 지승혁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아, 그렇군요. 내가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는 제 행동에 대해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계속 조정현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받고 나서야 간신히 깨달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