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김윤혜에게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한 번 빨았다가 고개를 크게 두어 번 끄덕였다. 결국 제 앞에 있던 통장을 가져와 바로 앞에 두고 손가락 끝으로 케이스 귀퉁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네. ……저, 감사해요.”
“감사는. 그런 말 하지 말어. 받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건 내 쪽인걸. ……아유, 음식 앞에 두고 내가 너무 말이 많았네. 다 식겠다. 얼른 먹자.”
“네.”
조정현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숙여 열심히 음식을 쳐다보는 척했다.
김윤혜는 국물을 한 번 떠먹어 보고는 “삼삼하니 맛있네.” 하고 말하며 웃었다. 조정현도 얼른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입을 열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정현이도 얼른 들어.”
김윤혜는 조정현에게 반찬 그릇을 밀어 주었다. 그녀가 조정현 쪽으로 밀어 준 밑반찬들은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식사를 몇 번 했을 뿐인데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눈여겨보고 챙겨 주는 김윤혜의 행동에 조정현은 다시 한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음, 잘, 잘 먹겠습니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색하지 않으려 한 번 기침을 한 후 대답한 조정현이 이내 수저를 들었다.
얼른 입에 뭐라도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식사비를 계산하느라 또 한차례 실랑이를 했다. 이번만은 조정현이 절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윤혜 쪽에서 먼저 포기했다.
조정현 쪽에서 김윤혜의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절해서 김성채에게 양해를 구하고 버스 타는 곳까지 함께 걸어갔다. 때맞춰 그녀가 타야 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김윤혜는 통장이 있다는 건 조정현 본인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설령 그게 함께 사는 그 사람이라도 알려 주지 말고 정말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말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현의 대답을 들은 김윤혜가 버스에 올라섰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던 조정현은 김윤혜를 태운 버스가 출발을 하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김성채가 기다리는 곳이 바로 근처였으니 걸어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흘끔이며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가던 조정현은 누군가와 몸을 부딪쳤다.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졌지만 조정현은 우선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안 봤어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하지만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조정현은 다시 한번 사과를 하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마침 버스가 도착했는지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도 부딪힌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조정현의 앞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제야 조정현은 남자를 제대로 보았다.
체격은 좋은 편이었고 차림새도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퀭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입가에 작은 피딱지가 있는 것 역시 그런 인상에 한몫했다. 이마가 번들거릴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살짝 흠칫했을 정도였다.
조정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훑어보는 남자의 눈빛이 거북스러웠다. 마치 상품 감정이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부딪힌 게 혹시 무척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나 싶어진 조정현은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못 보고 부딪쳤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까지 조정현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보던 남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진발이 좀 안 받나 봐? 실물이 더 볼만한데?”
“……네?”
조정현은 남자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도 그럴 게 너무나 생뚱맞은 말이었다. 조정현은 순간 자신이 남자를 알고 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맹세코 눈앞의 남자는 오늘 처음 봤다.
“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그러면, 실례할게요.”
조정현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남자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조정현의 말에 코를 울리며 웃었다.
동시에 남자에게서 알파 페로몬이 울컥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조정현은 순간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이런 길거리에서 페로몬을 흘리다니. 절로 안색이 굳어졌다.
다행히 성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페로몬은 아니었고 그 강도도 그리 센 편은 아니었다. 하기야 제정신인 사람이 그런 페로몬을 길거리에 서서 줄줄 흘려보내진 않을 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남자는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푹 꺼진 눈두덩과 까맣게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영 꺼림칙했다. 특히나 조금 전부터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참 싫은 느낌이었다.
조정현은 눈앞의 남자와 얽히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차라리 지금 자신만 있을 때 맞닥뜨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김윤혜와 함께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더욱 난감한 사태가 됐을 거다.
조정현이 남자를 빙 둘러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야, 어딜 가.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남자가 조정현의 어깨를 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조정현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정류장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호기심을 가지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놔, 놔주세요. 부딪친 건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누가 어깨빵당한 걸로 이러겠냐?”
남자는 조정현의 말이 우스운 듯했다.
“노인네 감시도 피해서 왔는데 이렇게 가 버리면 되겠냐고. 이제 와서 안 건드려. 얘기나 좀 하자니까?”
“하, 할 얘기 없습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남자는 영 이상했다. 정신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조정현이 남자에게서 잡힌 어깨를 빼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잘못 본 거 아니고 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 너 지승혁 알지?”
남자의 손을 잡아 떼어 내려던 조정현이 멈칫했다.
“그 새끼가 내 형인데.”
“……어.”
이전에 지승혁이 친부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조정현은 당황했지만 지승혁을 ‘그 새끼’라고 지칭하는 남자의 언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의에 더욱 경계심이 커졌다.
동생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만약 소개를 해 줄 생각이었다면 조정현에게도 넌지시 얘기를 띄웠을 거다.
그러나 지승혁은 그러지 않았다. 아예 남동생의 존재조차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서 지승혁이 이 남자를 어떻게 여기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 남자의 언동을 보아하니 그런 지승혁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개줄 묶여서 밖에 끌려 나가는 판국에 뭘 더 어쩌려는 건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먼 데서 무슨 꼴 당할 줄 알고 개기겠어. ……하, 근데 너 참 돋우게 생기긴 했다, 야.”
“……윽.”
제 어깨를 쥔 남자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가자 조정현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쳐다보는 시선에 조정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자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그 새끼가 끼고도는 이유가 있었네.”
이죽이는 남자를 보는 조정현은 그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섰다. 남자는 상체를 뒤로 기대듯 서서 삐딱한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벌벌거리고 있어, 또. 이런 대낮에 길거리에서 내가 뭘 하겠냐. 너한테 붙은 경호견도 있고. 야, 근데. 지승혁 베타랑 선보는 얘기는 들었지? 노인네가 예전부터 줄 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던 곳인데. 아, 벌써 씹 한 번 떴으려나.”
“…….”
조정현이 뭐라고 채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가 조정현의 뒤편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햐, 기가 막히네. 경호견이 냄새 맡고 왔어?”
지금은 조정현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조정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김성채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어…… 네에.”
우선 조정현의 상태를 확인한 김성채는 그의 앞을 막는 것처럼 남자를 마주 보며 섰다.
“지금 근신 중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근신, 씨발.”
김성채의 말에 남자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포장 한번 좋다. 그리고 알면 뭘 어쩔 건데. 내가 뭐, 죄를 저질렀어, 어쨌어. 우연히 대로변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나서 얘기 나눈 것뿐인데? 아, 뭐 여기서 대화하는 것도 하나하나 그 새끼 허락을 받아야 하냐?”
“그러셔야 합니다.”
“뭐?”
김성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지 사장님께 허락을 받으십시오. 그러셔야 하는 입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김성채의 말이 끝나자 남자의 눈이 순간 이질적으로 위험스러운 기색을 띠며 반질반질 빛났다.
“이 씨발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 새끼 밑에서 일하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남자가 성큼 다가와 김성채의 멱살을 쥐었다. 상황을 보던 조정현이 놀라 나서려고 하자 김성채가 그런 조정현을 가로막았다.
“씨발, 넌 비키라고……! 너한테 용건 없다니까.”
남자는 시선을 조정현에게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조정현이 목표인 듯했다.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조정현을 잡아채려 했지만 김성채가 가로막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김성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사장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