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8)화 (98/130)

#98

“정현이가 원하면 다시 등록해서 다니면 돼요.”

“……제가 하고 싶은 게 합격했던 과에서 전과해야 하는 거라서요.”

“전과? 어디로요?”

이어진 질문에 조정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렇게 해도 표정이 완전히 가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조정현의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슴벅였다.

“……나중에 전과하고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지금 말하는 게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으니 억지로 말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이것저것 많이 해 봐요. 뭘 해 봐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죠. 그리고 좋아하는 걸로 일을 잡아요. 필요해서도 아니고 해야만 해서도 아니라, 하고 싶은 거. 그거 해요.”

조정현은 지승혁이 말하는 걸 가만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왜 없어요. 내가 하게 해 줄 거예요. 정현이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하지만…….”

지승혁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조정현의 입술을 엄지로 가만히 문질렀다. 그 바람에 조정현은 더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지승혁은 그에게 닿았다가 떨어질 뿐인 입맞춤을 했다.

“내가 우리 정현이한테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하지만…….”

“나이 많고 돈 많은 애인이 애인 노릇 하겠다는 거예요.”

“……네……?”

조정현이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뭔가 하려는 말이 있는 듯 달싹거리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지승혁은 웃었다.

“슬슬 일어나 봐야겠어요.”

“어, 저도요.”

지승혁은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는 조정현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제지했다.

“지금 정현이가 할 일은 조금 더 누워 있기예요.”

“형도 지금 일어나시는데 제가 누워 있을 수는 없어요.”

“정현이는 내가 아니니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셨잖아요.”

순한 눈매에 힘주어 말하는 조정현의 논리에 지승혁의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조정현은 침대 밖으로 나와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 * *

점심시간을 앞두고 지호택에게서 호출이 왔다.

한창 바쁜 와중에 오라 가라 하는 게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하던 일을 중단한 지승혁은 지호택이 지정한 곳으로 나갔다. 한옥으로 지어진 한정식집은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하고 호젓한 곳에 위치했다.

지승혁을 본 식당 관계자가 그를 안내했다.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니 그림 같은 소나무가 마당에서 그를 맞이했다.

“이 안쪽입니다.”

“감사합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앉아 있는 지호택이 보였다.

미리 주문을 해 둔 건지 커다란 상에 빈틈없이 음식을 담은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늦었습니다.”

“으음, 아니다. 앉거라.”

지호택은 지승혁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청백색의 백자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연호는 이달 말에 나갈 거다.”

지승혁이 자리에 앉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공항까지 배웅하겠습니다.”

“뭣 하러 바쁜 사람이 거기까지 가. 윤 비서가 알아서 할 거니 놔둬라. 그냥 알아나 두라고 한 말이다.”

“네.”

지호택은 앞에 있던 호리병 형태의 주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기울였다.

그는 잔을 들어 바로 마시지 않고 입 근처에서 멈추었다. 곧 잔에 담긴 술을 마신 지호택의 눈이 지승혁에게 향했다. 지호택이 주병을 잡는 걸 본 지승혁이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제 앞에 놓인 잔을 잡아 내밀었다.

병 안에서 술이 흘러나오며 잔을 채우는 소리가 작게 났다.

“마셔 봐라.”

지승혁은 상체를 조금 돌려 술을 마셨다.

처음 입에 넣자 향긋하게 나던 오미자 맛은 술을 넘기자 혀끝에 쌉싸래한 삼나무 향을 남겼다. 달짝지근한 향기가 입 안에 오래도록 남았다.

썩 마음에 드는 술이었다.

“좋은 술이군요.”

“그렇지.”

지호택은 그 말을 하고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다고 들었다. 일정에 잘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무리 없이 맞출 수 있습니다.”

“그래. 좋아. 좋다.”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지호택의 시선이 흘끔, 지승혁에게 날아들었다.

“정찬오 의원이라고 들어 봤을 게다.”

“네.”

“네 얘기를 흘리듯 말했더니 정 의원이 관심을 보이더구나.”

이유 없이 정찬오 의원의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닐 거다.

지승혁은 지호택의 다음 이어질 말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정 의원에게 외동딸이 하나 있는데, 이제 막 스물넷 된 베타다.”

지승혁은 무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지금 변변찮은 오메가 하나를 다시 주워 와서 끼고 있다지?”

지호택은 지승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다시 주워 와서.’

지호택이 사용한 단어가 지승혁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일련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지승혁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지호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뭐, 결혼하고 나서도 정 의원 여식 하나로만 만족하고 살라는 건 아니다. 연애도 가끔 하면 좋지. 어차피 그 여식에게도 지금 사귀는 상대가 있다고 들었거든.”

지호택은 말을 잠시 중단한 채 술로 입 안을 축였다.

“결혼하고 애만 낳아.”

지승혁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눌렀다.

“뭐든 말이다 최고점이라는 게 있어. 그걸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지. 너도, 비싸게 팔 수 있을 때 파는 게 나을 게다. 정 의원은 그중 최고다. 처가로 뒀을 때 그 이상 가는 집안이 없어.”

지승혁은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재화로 표현하는 지호택을 무심하게 보았다.

“후계로 알파를 원하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정 의원 그 양반이 오메가고 처가 알파다. 한데 하나 있는 자식이 베타라 늘 아쉬워했지.”

지승혁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한 지호택은 가만히 술잔을 응시했다.

“근본이 없지는 않아. 형질은 유전이 아니라고 하지만 개소리지. 그게 유전이 안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정 의원도 너를 좋게 보는 거 아니겠냐.”

상품 품평을 하듯 일말의 의식조차 없었다.

“너한테 날개 한 짝을 마저 붙여 주려는 게야. 그래야 날지 않겠어.”

마치 지승혁을 위하는 것인 양 하는 말이 역겨웠다.

[날개는 양쪽에 있어야 제구실을 하는 법이지. 날개 하나만 달고 있으면 그건 그냥 병신이고 기형이야.]

지승혁의 머릿속에 이전에 지호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절반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대답을 못 들었다.”

지호택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무리 지호택의 밑으로 들어가는 걸 결심했지만 이건 논외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래 조건조차 될 수 없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으음.”

지승혁의 담담한 대답에 그가 침음을 냈다. 지호택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페로몬이 슬금슬금 풀어져 흘러나왔다. 마치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지승혁은 다가올 프로텍트의 발동을 각오하듯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거절이라고?”

“정찬오 의원의 힘 없이도 성공시키겠습니다.”

“병신 같은 새끼가, 입 닥쳐라.”

지호택은 들고 있던 잔을 미련 없이 지승혁에게 던졌다. 안에 들었던 술이 튀었지만 술잔은 깨지지 않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성공이라는 말이 쉬워 보이냐. 한낱 알파 주제에, 그래, 극우성이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잘나서 한다는 짓이 사채냐. 돈 몇 푼 만졌다고 기고만장해? 잘난 몸뚱이 말고는 가진 게 없으니 결국 나한테 와서 배를 드러낸 주제에, 뭐를 어떻게 성공시킨다는 게야. 네 알량한 인맥으로 쓰레기 같은 법안을 치울 수 있겠어? 법을 뜯어고칠 수 있겠냐는 얘기야!”

흥분한 지호택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지승혁은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숨소리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앉아 있던 자세가 무너져 내리는 걸 가까스로 참아 냈지만 그것도 곧 한계였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이전에 느꼈던 프로텍트 영향은 댈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혈관을 타고 무수히 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

내장을 갈고리로 찍어서 긁어내는 듯한 격통.

뇌를 꺼내 발로 밟아 비비는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신을 오물에 담그는 듯한 불쾌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극우성이 갖는 특유의 자긍심과 프라이드가 배설물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마치 알몸으로 배설물 위에서 뒹구는 것 같았다.

바로 목 아래를 팔뚝만 한 칼날로 위협받는 느낌이었다.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이유 없는 공포심. 논리적이지 않는 두려움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지는 본능이 날뛰었다.

미칠 것 같은 극통을 참아 내던 지승혁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깨달은 건,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대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제 모습이었다.

“버러지처럼 살고 있는 새끼 주워다 놨으면 제 밥값은 해야지.”

지호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방에서 나가기 전 그가 지승혁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쁘장한 남자 오메가가 귀하긴 한데 없는 건 아니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 정도는 내가 해 주마.”

“……싫, 습니다.”

밭은 숨을 내쉬며 몸을 틀던 지승혁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지승혁이 대답을 하는 자체가 놀라운 듯 지호택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게 보였다. 그는 한동안 지승혁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잘 생각해 보거라. 출근은 예정대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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