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철커덕, 하고 금속음이 나고 적막이 감돌았다.
정태준이 무 자르듯 단호하게 가 버릴 줄은 몰랐던 조정현은 머쓱하게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가 버리셨네요.”
조정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지승혁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쁜 일이 있나 보죠. 들어가요.”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지승혁을 본 조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는 어제보다 두께가 얇았다.
“정태준에게 또 부탁한 게 있었어요?”
“네. 그 피해자분들 중에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고 해서요. ……제가 부탁드렸어요.”
“정현아, 이건.”
“괜찮, ……괜찮아요.”
이전에 지승혁이 괜찮다고 하지 말라던 이야기가 떠올라 잠시 멈칫했으나 그는 곧 다시 한번 반복하듯 말했다.
정말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원해서 자처했고, 스스로 하겠다고 한 거다.
소파에 앉은 조정현은 이것을 봐도 될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결국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안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지승혁이 옆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에 적힌 여덟 명의 나이는 많아야 30대였다. 그들 중 사고를 당한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
그들의 시간은 멈추었다.
내쉬는 숨이 떨렸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낀 조정현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지승혁이 신경 쓰지 않도록 몰래 마른 입술을 축인 조정현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끊어 내듯 짧게 내뱉었다. 조정현이 서류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승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굽었다.
다행히 조정현은 어제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지승혁이 옆에 있다는 거다. 조정현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오늘 한강 공원에 같이 가 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죠.”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승혁은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의문을 표시하지 않고 묻지도 않으며 조정현이 하고자 하는 일을 지지해 줬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도 하기 힘든 일일 텐데 지승혁은 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조정현이 지승혁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댔다. 품에서 그의 향이 났다. 페로몬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살 내음을 맡으면 안정됐다.
한창 바쁠 거라고 했던 지승혁이 오늘은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업무를 처리한다고 해서 괜히 신경을 쓰이게 했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가 이런 일이 있으리란 걸 예상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어제처럼 한동안 상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렸을 게 분명했다.
같은 짐을 나누어 들지는 못해도, 그저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힘이 되었다. 그건 참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게 고마운 반면 이런 감정을 혼자만 느껴도 되는 건가, 싶어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이 들었다.
조정현은 떠오른 감정을 털어 내기 위해 지승혁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는 뽀뽀를 하곤 떨어졌다.
두 사람은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 * *
지승혁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가 침대로 들어간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잠이 들었는지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정현의 요청에 따라 두 사람은 한강으로 향했었다.
평화롭게 산책을 하며 걷는 사람과 멀리서 들리는 웃음소리들로 공원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한강에 가기 전 꽃집에 들른 조정현의 손에는 하얀 국화가 들려 있었다. 그 꽃을 안전 난간대 아래에 내려놓은 조정현은 가만히 쪼그려 앉은 채로 강 쪽을 쳐다보았다.
조정현은 한강에 온 후로 말수가 확연히 줄어 이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게 직접 설명을 들은 건 아니지만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반 발자국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감정을 온전히 추스를 때까지, 조정현이 충분히 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조정현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기도 하고 동그란 머리통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살 흔들리기도 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없어서요. 세 분 정도가, 주소가 없더라구요.]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처음엔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승혁에게 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조정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여기 오자고 말씀드렸어요. 너무 주제넘은 건가 싶었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여기서 하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뭐라도 더 챙겨 올 걸 그랬나 봐요. 과일이나 술이라도.]
점점 작아지는 조정현의 말에 지승혁은 ‘그렇군요.’ 하고 답했을 뿐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강을 보던 조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조정현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는 건 결코 노을 탓이 아니었지만 지승혁은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지승혁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조정현이 뺨을 문질렀다.
[돌아갈까요.]
지승혁의 말에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정현은 집에 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지쳐 보이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권했다. 육체적으로 심한 노동을 한 건 아니었으나 감정을 견뎌 내는 것도 그 못지않게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마른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정현의 고민도 전부 자신이 대신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뒤에 누워 가만히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직 날이 밝기 전에 눈이 떠졌다. 오랜 시간 들었던 습관 때문이다.
지승혁은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잠들어 있는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과 곧은 콧대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쳐다보았을 때 조정현의 눈썹이 흔들렸다.
“잘 잤어요?”
“……음…… 네에.”
지승혁은 조정현을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정현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자면서 몸이 조금 식은 모양인지 조정현은 지승혁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체온이 기분 좋은 듯 조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이 끌어안는 느낌이 사랑스러웠다.
“……아침 드셔야 하는데.”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어요.”
“……그래도요.”
조정현은 느릿하게 웅얼웅얼 대답했다. 이내 다시 잠깐 잠든 모양인지 지승혁을 감싸던 팔에 다시 힘이 빠져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눈썹을 꿈틀한 조정현이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저 이제 깼어요.”
“그래요?”
지승혁은 조정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따끈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같은 보디 워시를 사용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정현에게서 나는 향은 달랐다. 좀 더 포근하고 달달한 느낌이 드는 향이었다. 조정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냄새를 맡자 그가 간지러운 듯 웃으며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색색, 숨을 내쉬는 조정현의 숨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뭔데요? 말해 봐요.”
“학교에…… 다시 가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목소리에 지승혁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요? 대학교요?”
“네. ……계속 안 다녀서 아마 학고 처리됐을 것 같긴 한데…… 형만 허락해 주시면 공부해서 다시 시험 보고 싶어요.”
조정현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휴학계 내 뒀어요.”
“네?”
지승혁의 말이 의외였는지 조정현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정현이 다니는 학교는 1학기부터 휴학이 가능하더라구요. 좋은 학교 들어갔어요.”
조정현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전혀 몰랐던 사실인 듯했다.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휴학을 하려면 1학기 이후에나 가능했기에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정현이 합격한 한국대는 다행히 1학년 1학기에도 휴학을 받아 주는 드문 학교였다. 휴학 신청을 한 건 그를 집으로 들이기로 결정하고 나서였다. 휴학 신청도 되어 있지 않은 것에 지승혁이 좀 놀라기도 했으나 조정현도 이걸 계기로 조심성을 가진다면, 나쁘지 않았다.
조정현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에 다시 다니지 못할 거라고 지레 판단하고 알아보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목까지 새빨개진 조정현의 이마에서 진득하게 땀이 배어났다.
그 원인이 본인의 일을 소홀하게 대했던 민망함 때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정현의 눈동자가 한곳에 안착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아뇨, 그냥 앉아서 공부만 했으면 됐으니까요, 저는…… 아니,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요.”
목소리가 완전히 풀 죽어 있었다.
“알아요. 하지만 한국대에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공부만 했다는 거잖아요.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니까. 수고했어요.”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다. 같은 노력을 들인다고 해도 받아 드는 결과물이 모두 같지는 않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려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재능이 있거나 그게 없다면 더욱 시간을 들여야 했다. 노력을 했다면 마땅히 칭찬받아야 한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토닥거리는 것처럼 머리를 쓰담거리는 손길에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입술을 위아래로 말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