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6)화 (96/130)

#96

오솔한 집 안 공기가 조정현의 몸을 둘러싸 견디기가 힘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더 이상 다듬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조정현은 그 재료들을 되는대로 꺼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생각들이 조금 흐려진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안개가 걷히듯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음식을 다 만들 때까지 그 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묵직함은 뭘, 어떻게 해도 가시지 않았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괜찮을까 싶어 소파에 기대도 보았지만 도리어 그날의 상황이 떠오를 뿐이었다.

조정현의 턱이 잘게 떨렸다. 이내 그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TV를 켰다. 그러고는 왁자지껄한 쇼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해 둔 채 멍하게 응시하다가 다시 꺼 버렸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조정현을 달래지 못했다. 주의를 흩트려뜨릴 수 없었다. 도리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있다는 확신만 공고히 해 줄 뿐이었다.

숨이 막혔다.

지승혁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가만히 핸드폰을 응시하던 조정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을 사람에게 달리 볼일도 없이 전화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조정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버틸 뿐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고여 있던 정적을 찢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정현은 빠른 걸음으로 현관 쪽을 향했다. 유독 문 쪽이 환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서 불도 켜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아연해졌다. 지승혁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조정현은 재빠르게 집 안 복도 등을 켰다.

지승혁이 조정현을 보곤 미소 지었다. 그를 본 것만으로도, 한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조정현은 꽉 잡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조정현에게 끊임없이 달라붙었던 온갖 상념들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안심한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지승혁을 끌어안았다. 옷감에 스며들어 있던 바깥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지승혁의 살냄새가 맡아졌다.

“다녀오셨어요.”

평소보다 조금 늦게 퇴근한 지승혁은 조정현의 뺨에 평소처럼 뽀뽀를 했다. 부드럽게 닿는 입술의 감촉이 좋았다. 조정현은 계속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아쉽게 떨어졌다.

녹이 슬어 뻑뻑하게 멈춰 있던 사고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퇴원 이후로 지승혁의 귀가가 조금씩 늦었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피곤할 게 틀림없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오늘 정태준 씨는 왔다 갔어요?”

“아, 네. 식사하시고 가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프시진 않고요?”

괜찮다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던 지승혁은 넥타이를 끌러 내다가 조정현을 돌아보았다.

정태준에게 부탁했던 일을 지금 말하면 되려나, 상황을 살피는 조정현에게 “말할 게 있는데요.” 하고 지승혁이 말을 걸었다.

“지금 하는 일은 정리를 좀 할까 해요.”

그가 한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조정현이 눈을 깜빡였다.

“제오 캐피탈 대표직 그만두고 이직할 거예요.”

“……네?”

“다치지 말라고 했었죠? 이제 정현이가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지승혁이 조정현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를 품에 안았다. 넉넉한 손이 조정현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이직이시면 어디로요?”

“도영이라고, 알아요?”

“도영요?”

지승혁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조정현은 놀라 붙어 있던 몸을 떼고 되물었다.

한국에서 도영이라는 회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재계 1위라는 도영 그룹이 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전자, 건설, 자동차, 섬유 등등 시장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 거기에 입사하시는 거예요?”

“음, 정확하게는 도영 전자 쪽인데. 뭐, 낙하산이라고 해 둘까요.”

“낙하산요? 아니, 그건 스카우트 아니에요? 언제 제의받으신 거예요? 와…….”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조정현을 본 지승혁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가 조정현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전에 내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얘기했었죠?”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지승혁의 말에 조정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친부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게 도영 그룹 회장이었어요.”

“……. ……네?”

현실성 없는 말에 조정현이 반응을 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 도영 그룹…… 그 회사 회장요? 형 부모님이요?”

“그렇다고 하네요.”

지승혁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심상한 태도를 취했다.

“언제 연락받으신 거예요, 그, 친부모님요?”

“며칠 안 됐어요. 마음 정리를 좀 하느라고 이제야 말하네요. 바로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아뇨.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전혀 없는걸요. ……아, 아버지 찾으신 거 축하드려요. 두 분이 만나 보신 거예요? 아, 하긴. 만나 보셨을 테니까 이직도 하시는 거겠네요. 와, 정말 축하드려요. 도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데. 그러면 이제 형 월급 받으면서 회사 다니시는 거예요? 하긴 그렇죠.”

조정현은 스스로 말하다가 납득하기를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이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제오 캐피탈을 정리하는 중이라 요 며칠 귀가가 좀 늦었어요. 당분간 정말 바빠질 텐데 양해해 줄 수 있어요?”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질문에 조정현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건, 그건 당연하죠. 도영인데요. 앞으로 너무 일찍 들어오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도리어 지승혁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서운해 보이기도 한 얼굴이었다.

“와, 우리 정현이 무섭네. 일찍 들어오는 것도 안 돼요?”

“그, 아뇨, 아프시면 당연히 일찍 들어오셔서 쉬셔야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일하실 거 못 하시고 일찍 들어오시는 거면 좀 그래요. 늦게 오시는 건 저도 물론 싫지만, 형이 저 때문에 일 못 하시는 거면 그게 더 싫을 거예요.”

입술을 앙다물며 말하던 조정현이 말을 멈추었다.

“저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조정현은 뒤이어질 자신의 말을 기다리듯 고요히 쳐다보는 지승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태준 형에게 뭘 좀 부탁드렸었어요.”

“그랬어요? 무슨 부탁을 했는데요?”

“그…… 우철곤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을 좀 찾아 달라고 했어요.”

“……정현아.”

지승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조정현이 고개를 재빠르게 흔들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저어, 알고 싶었어요. 신경도 쓰였구요. 그게 잘한 생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한 번 강하게 깨물었다. 지승혁이 조정현의 턱 아래에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렸다.

“정현이가 미안해할 일은 없는데 자꾸만 사과를 하네요. 그거 말고 내가 해 줄 일은 없어요?”

부드럽고 상냥한 물음에 조정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괜찮다고 답한 후 말을 이었다.

“며칠 뒤에 잠깐 어디에 좀 혼자 다녀올까 하는데요.”

“어디요?”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조정현은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댔다. 그러자 지승혁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아직 안 정해졌어요? 언제 갈 거예요. 나랑 같이 가요.”

“바쁘시잖아요. 괜찮, 앗.”

지승혁이 조정현의 코끝을 잡아 살짝 흔들었다.

“매번 그렇게 괜찮다고 사양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금지.”

그가 짐짓 엄한 말투로 얘기해 왔다.

“아, 아니. 하지만 정말 괜, ……아.”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괜찮다고 하려던 조정현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있는데 왜 혼자 가려고 해요.”

“그렇지만 형 바쁘시잖아요. 회사에서 잘리면 어떡해요.”

“아직 출근도 안 했어요.”

“아.”

지승혁은 조정현의 반응이 우스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정태준이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이 그냥 해 줬어요?”

지승혁이 가볍게 주제를 바꾸었다.

“네? 아, 삼계탕요. 그게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삼계탕.”

지승혁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아, 형도 드시라고 만들어 뒀어요. 태준 형 거 만들 때 같이 만들어 둔 게 아니고 그 이후에 따로 만든 거예요. 닭 안에 찹쌀도 넣어서 끓였으니까 얼른 씻고 나오세요.”

닭 크기가 좀 작은 6호 닭을 사서 고아 두었다. 지승혁은 몸집이 큰 만큼 먹는 양도 상당했기에 그가 먹을 수 있게 두 마리 정도가 솥 안에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만들어 둔 훈제 오리 냉채와 고추잡채, 월남쌈 역시 냉장고 안에 곱게 들어 있었다. 그것들 모두 있던 재료를 채 썬 것이 전부이긴 했다. 전부 다 하면 양이 많았기에 조금씩만 덜어 내면 될 듯싶었다.

조정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지승혁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욕실로 들어갔다.

정태준은 좋아했는데 지승혁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그의 입맛에 맞기를 바라며 조정현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지승혁은 연신 맛있다고 하며 그릇들을 깨끗하게 비워 나갔다.

지승혁이 먹는 걸 보고 있자니 조정현도 조금 배가 고파 왔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함께 식사를 시작한 조정현은 그에게 달라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끈적거리던 상념들이 일제히 잠에라도 든 것처럼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 * *

다음 날.

“……저놈은 왜 여기 있어?”

조정현 뒤에 장승처럼 서 있는 지승혁을 본 정태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태준 형, 안으로 들어오세요.”

“에이, 뭘. 정현이 네 얼굴도 봤겠다, 이것만 주고 가 볼게.”

불쑥 내밀어 오는 서류 봉투를 엉겁결에 받아 든 조정현은 당황하며 그를 잡았지만 정태준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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