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5)화 (95/130)

#95

“정현아, 너 식당 해라. 이건 그냥 집밥으로 끝낼 게 아냐. 대박 날 거야. 내가 장담한다. ……아니다. 대박 맛집이 되면 내가 먹기가 힘들겠구나. 그냥 이렇게 차려 주라. 내가 뭐든 한다.”

정태준의 말을 들으며 조정현은 작게 웃었다.

만드는 데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삼계탕 국물 역시 마트에서 파는 삼계탕 팩을 구입해 그걸 넣고 끓였을 뿐이다. 전복 다듬는 건 특별히 신경을 쓰긴 했으나 그쯤이야 누구든 할 수 있는 거였다.

그저 그뿐인데도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반응해 주는 정태준이 고마울 뿐이었다.

“인삼은 백화점에서 사 와서 넣었어요. 좋다는 걸로 사서 넣긴 했지만 좀 더 좋은 게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이전에 승혁이 형이 저 사다 주신 게 있었는데 그건 진짜 먹고 나서 몸 상태가 바로 좋아졌어요. 후끈후끈 열도 오르고 기운도 났거든요. 태준 형 삼계탕 해 드릴 걸 알았으면 남겨서 잘 보관했다가 넣는 건데.”

“……어. 아니, 그건 내가 사양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거 가격이. ……음, 모르겠구나. 그래. 백화점에서 파는 거였으면 가격도 어지간했을 텐데 그걸로도 충분하지, 뭐. 고마워.”

정태준이 만면에 미소하며 말했다.

그도 이전에 지승혁이 구해 온 산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긴 했다. 그리고 산삼의 정확한 금액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조정현이 그에 대한 질문을 하기 전 정태준이 입을 열었다.

“지 사장님한테는 이거, 얘기 안 했지?”

“태준이 형 오시는 거 형도 알고 계세요.”

“아니, 그거 말고.”

정태준이 살코기를 발라 소금에 찍으며 물었다. 한 입 먹고 우물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은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정현은 간격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말할 거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길래 받아 줬지만 난 이거 자체를 비밀로 할 생각 없거든.”

칼로 자르는 것처럼 단호한 정태준의 태도는 깔끔하고 시원했다.

“말씀하실 거예요?”

“감출 만한 일이야?”

조정현의 질문에 답 대신 되물음이 날아왔다.

정태준은 바른 젓가락질로 겉절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조정현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음식을 씹는 정태준의 뺨이 움직이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정태준은 조정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하고 있었으나 그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정태준이 지승혁의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하기야 그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가. 조정현이 알게 된 시간을 가져다 비교할 게 아니었다.

그가 지승혁보다 자신 쪽을 더 우선시했다면, 조정현은 도리어 그게 더 염려스러웠을 거다.

섭섭하게 생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럴 마음도 없다.

이런 사람이 지승혁과 아는 사이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내가 너 아끼는 거 알지?”

입 안에 있는 음식을 다 씹어 삼킨 후 정태준이 조정현과 눈을 마주했다. 정태준의 눈썹이 조금 아래로 처졌다. 조정현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일방적으로 지승혁에게 말한 후 모른 척할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저에게 말을 꺼냈다. 조정현은 그 자체가 자신을 배려해 언질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조정현은 제 앞에 놓인 접시를 수저로 휘휘 저었다.

“오늘 말씀드릴 거예요.”

“음, 그래? 알았어.”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정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고맙긴, 뭘. 우리 사이에.”

정태준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조정현이 고기를 젓가락으로 찢어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을 응시하던 정태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놈이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더 펄펄 뛰긴 할 텐데.”

“아니, 형은 안 그러세요.”

두둔하고 나서는 조정현을 보며 정태준이 알 수 없는 눈길로 스윽 쳐다봤다. 조정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몇 술 채 뜨지 못하고 먹는 시늉만 하던 조정현은 음식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입맛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음식을 먹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태준은 조정현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걸 빤히 보고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굳이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차라리 무심한 태도를 취해 주는 게 조정현은 고마웠다. 왜 못 먹는지 물어 왔다면 둘러대기가 더욱 곤욕스러웠을 터였으니까.

정태준은 식사 잘 했다며 나중에 또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조차도 조정현을 배려해 주는 것같이 느껴졌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거실에 앉은 조정현은 한참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막상 제대로 읽어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읽어야 했다.

조정현은 숨을 멈추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손길로 봉투 안의 종이들을 꺼냈다.

한 장에 한 명씩 이름과 거주지가 적혀 있었다. 어느 한 형질로 치우쳐진 게 아니라 알파나 오메가가 섞여 있었다. 우철곤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형질인에게 증오를 가지고 있었는지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작 그런 감정 때문에, 그따위 것 때문에 전혀 상관도 없던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한 거다.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당했건, 그 일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천인공노할 짓을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짧게 훑어보았지만 서류마다 빠짐없이 지출 내역과 병원들이 적혀 있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꽤 여러 장이었지만 조정현의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다. 빠르게 종이를 세어 보니 60장을 조금 넘었다.

다시 그 서류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훑어보던 조정현은 그 참담함에 몇 번이나 읽는 걸 그만두었는지 모른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무게가 차곡차곡 조정현의 어깨에 내려앉아 그를 짓눌렀다.

읽던 걸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했고 토기가 밀려 올라와 몇 번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했다.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구토를 하다가 종국엔 나오는 것도 없이 욱욱거리기만 했다. 내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은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글자로만 이루어진 서류에 적힌 사람들의 인생은 우철곤과 겹친 이후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굴러갔다.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갈퀴로 훑고 간 흔적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게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조정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 중에는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예외 없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났다.

조정현은 서류들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피해자들이 입원해 있거나 통원하는 병원들의 목록들을 되짚어 보았다. 얼마나 잔인하게 그들을 괴롭혔을지 조정현의 머리로는 상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조정현의 상상이 더해지며 좀 더 안 좋은 결과를 그리는 걸 수도 있었다. 그의 짐작만큼 힘들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 포함되지 않은 분들은…… 그러면.]

[음. 뭐어. 그렇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정태준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는 게 너무 주제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볍게 생각하고 결정한 게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혹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걸 넘어서고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걸, 그 사람들이 잘 지내는 걸 확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우울함과 혼자 있을 때 종종 습격해 오는 충동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철곤에게 피해를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걸 넘지 못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그저, 잘 견뎠을 거라고. 꿋꿋하게 생활하고 있을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조정현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제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없는 것도 우습지만, 그런 가정을 생각하고 싶지조차 않았던 무의식의 방어기제였을 수도 있다.

저와 같은 피해자들을 알아보자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을까. 지금 와서는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채로 있으면서 막연하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어쩔 도리 없이 떠올랐다.

운명을 달리 한 사람 또한 여덟 명이나 됐다.

설마 모두가 관련이 있진 않을 거다. 그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고 같은 걸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덟 명 전부가 그러진 않았을 거다. 설령 한 사람이라도 그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데.

“…….”

조정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무게감에 온몸이 짓눌려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우철곤이나 그와 함께 이런 짓을 자행한 사람들에겐 과연 무엇이 중요했을까.

정태준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 무게를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조정현이 혼자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정태준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을 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으나 이내 지워 버렸다.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태준을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조정현은 서류를 옆에 두고 무릎을 끌어모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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