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4)화 (94/130)

#94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게 품을 데웠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마른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들은 그대로를 말했으니까.

하지만, 지승혁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하지 않았다.

* * *

“나 왔어.”

“오시느라 힘드셨죠. 들어오세요.”

조정현은 정태준을 맞았다.

“밖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해요. 여기까지 오시게 하고.”

“음, 괜찮아. 파는 음식보다 정현이가 하는 음식이 더 맛있거든.”

“그 정도는 아니에요.”

조정현은 민망해졌다.

“지 사장님은 나갔고?”

거실에서 휘이 고개를 움직이며 내부를 둘러보던 정태준이 물었다.

“네. 퇴원도 막 하셔서 좀 쉬셨으면 좋을 텐데. 나가셨어요.”

“으음.”

정태준이 작게 소리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퇴원을 한 바로 그다음 날부터 지승혁은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칼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조금 쉬면 좋을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투덜거리는 어투로 말하던 조정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제일 힘들 건 바로 지승혁일 터였다. 티를 내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불만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정태준은 홀로 열심히 반성 중인 조정현에게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이곳에서 머무를 때 조정현이 부탁했던 것이었다.

“먼저 받을래?”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음식 차려 드리는 걸로 괜찮으세요? 너무 변변찮은데요.”

“그럼, 그럼. 특별 할인이라니까. 그리고 음식 만드는 데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그래.”

정태준은 발랄한 목소리로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조정현은 정태준에게서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 묵직한 무게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핸드폰으로 전송을 받아도 됐을 테지만 굳이 종이로 전달해 주겠다던 정태준의 고집이 왠지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으로 받아 봤더라면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거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실체를 갖고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태준이 그걸 의도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와.”

정태준의 탄성에 조정현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조정현을 돌아보았다.

“정현아, 너 나랑 결혼할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정현은 눈을 크게 떴다. 정태준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말이다.

“네? 네? 어, 네?”

“뭘 그렇게 놀라. 장난이야.”

조정현의 얼빠진 반응에 그가 피식 웃었다. 식탁 위에 소담하게 차려진 삼계탕을 본 정태준은 싱글벙글했다.

“이야아…… 진짜 엄청 맛있겠다. 만드느라 수고했겠네. 일단 나 손부터 씻고 올게. 먼저 먹고 있어.”

조정현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노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은 조정현은 종이봉투 입구의 접힌 부분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조정현이 정태준에게 부탁했던 건, 우철곤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근황에 대한 조사였다.

조정현은 봉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로 열어서 꺼내 보기만 하면 되는데도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욕실에서 나던 물소리가 그쳤다. 정태준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조정현은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는 정태준이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확인해 봤어?”

“아, ……아뇨. 아직요. 그런데 생각보다 두껍네요.”

“그래? 그거 원래 몇 장이었는지 알면 놀라겠네.”

정태준의 말을 듣던 조정현은 당황했다.

‘원래’ 몇 장이었는지 알면 놀라겠다니. 그 말은 꼭.

조정현은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정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봉투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형. 혹시, 여기에 알아보신 분들 정보, 다 넣지 않으셨어요?”

담담한 질문에 정태준은 그를 응시하며 어깨를 한 번 추어올렸다.

“맞아. 살아 있는- ……음. 뭐, 굳이 싶어서 다 안 넣었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가던 정태준은 한 번 말을 번복했다. 하지만 정태준이 무슨 말을 얼버무렸는지 알 수 있었다.

조정현은 들고 있는 봉투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정태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조정현의 안색을 살폈다.

“우철곤 새끼가 더럽게 놀긴 했으니까.”

조정현의 짐작이 맞았다. 피해자들은 그것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대체 몇 명이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다행히 페로몬 쇼크 직전에서 그쳤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고 더 심한 꼴을 당한 경우도 있을 거다.

당한 사람들은 아직도 아파하고 있다. 그 고통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그의 만행은 더럽게 놀았다, 라는 간단한 말로 가려질 수 있는 행위들이 아니란 소리다.

역시, 우철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얼마 전 뉴스 속보로 떴던 기사를 떠올렸다. ‘우철곤으로 추정’하던 시체가 정말 그가 맞다는 보도였다.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종이봉투가 구겨지며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 포함되지 않은 분들은…… 그러면.”

정태준이 삼계탕 국물을 휘휘 젓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음. 뭐어. 그렇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늘 확실하게 말하던 정태준이 드물게 애매한 대답을 했다. 조정현은 그게 자신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태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여러 가지.

고작 단어 하나인데 묵직하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정태준이 건넨 자료에 없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사정.

마음에 묵직한 돌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몇 분이에요?”

정태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얼굴에 닿았다.

“조사하셨으니까 아실 것 같아서요. 여기 포함되지 못한 분들, 몇 분이에요?”

“……으음.”

정태준이 곤란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모르겠다고 해도 그냥 안 넘어가 줄 거지?”

정태준이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두어 번 찌르다가 이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여덟 명.”

“…….”

흔히들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멍해진다고 하는데 정말이었다. 정태준의 말을 듣는 순간 조정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몇 명은 더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여덟 명이나 될 줄은 몰랐다.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꾸욱 사리물었다.

“저어, 태준 형. 좀 전에, 그,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얼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떤 말을 골라 사용해야 할지 조정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입 안으로 여러 단어들을 되뇌고 있을 때였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니까.”

정태준의 심상한 대꾸에 조정현은 머릿속에 떠다니던 말들을 내려놓았다. 조정현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몇 번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입 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은 지승혁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태준 역시도 조정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조정현 역시도.

“…….”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턱턱 막혀 와 견디기가 힘들었다.

조정현이 어렵게 말문을 연 건 대략 몇십 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러면, 혹시…… 그분들에게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요?”

“음…….”

정태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잠깐 조정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으나 이내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떨어질 땐 떨어지더라도 안전망이 있는 거랑 없는 건 차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조정현은 그렇게 말하는 정태준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작은 상자 안에 폐를 강제로 욱여넣은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혹시 그분들에 대한 것도 알 수 있을까요? 이름만이라도 좋아요.”

“내일 가져다줄 수 있어.”

선선하게 승낙한 정태준은 다시 숟가락을 집었다.

“감사합니다.”

조정현은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서류 봉투를 옆으로 치웠다. 식사를 하기 전에 괜히 이런 이야기를 했나 싶어 미안해졌다.

“어, 식사하셔야 하는 데 제가 방해했네요. 태준 형, 장조림 좋아하세요? 그러시면 더 가져다 드릴게요.”

“좋아하긴 하는데 일단 먹고 필요하면 말할게.”

정태준이 픽 웃으며 답하고는 뽀얀 국물을 한 번 떠먹어 보더니 녹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맛있다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조정현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뒤이어 조정현도 수저를 들었다.

“그래. 이거지. 와, 어떻게 이런 맛을 내냐. 어랍쇼, 뭐가 더 들어 있는데? 전복이야?”

“네. 닭만 드리기가 좀 그래서 전복도 좀 넣었어요.”

경쾌한 정태준의 목소리에 조금 전의 무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옅어졌다.

“입에는 좀 맞으세요? 겉절이도 좀 드셔 보세요. 영상 보고 만든 건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입맛에 맞으면 좋겠는데.”

조정현의 권유에 정태준이 배추겉절이를 먹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수저를 내려놓고 조정현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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