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0)화 (90/130)

#90

조정현이 그의 반응에 조금 당황해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자 정태준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현아! 그런 말 쓰면 안 돼!”

되돌아온 반응에 조정현 쪽이 더욱 당황했다.

“……아니, 형.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냥 제가 그런 말을 안 쓸 뿐이지 그 정도는 다 알아요.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오늘도 그러셔서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정현이가.”

조정현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하는 정태준을 머쓱하게 쳐다보았다.

정태준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대체 어떤 건지 궁금해졌지만 조정현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지승혁이 지호택에게 전화를 한 건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그래, 나다.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니다. 얘기는 전해 들었다. 연호가 멍청한 짓을 했다고.

멍청한 짓.

지호택의 단어 선택에 지승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지연호가 저지른 짓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둘 다일 가능성이 컸지만.

단지 지연호가 벌인 일에 대한 사항을 먼저 거론했다는 점이 지승혁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임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약물에까지 손을 댄 지연호에게 지호택이 그룹의 경영권을 넘길 일은 없다는 거였다.

지호택이 지연호를 끌어안고 내치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그가 알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호택이, 자신의 프로텍트 안으로 들어온 극우성 알파인 지승혁을 두고 약물에 중독된 지연호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지연호는 열성 알파가 아닌가.

지승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외에 좋은 요양 시설이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지호택은 지승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해외라는 점이 중요했다.

국내 시설로 지연호를 보낸다면 아무래도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그룹 승계를 누가 하느냐로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다.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인 지연호에 대한 구설은 최악의 형식으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을 테고, 그건 주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호택으로서도 반드시 피하고 싶은 부분임이 분명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지호택이 “으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자리가 비게 된다. 그건 너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

어차피 지호택에게도 고를 수 있는 패는 지승혁 하나다. 그걸 두 사람 중 모르는 이는 없다.

지긋하게 찔러 오는 질문이 요구하는 답은 일목요연했다. 어쩌면 지호택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게 정해져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지호택이 예정해 놓은 길대로 말이다. 묵직한 압박은 이제 피할 길이 없었다.

지승혁이 붕대로 감은 상처 부위를 손으로 덮었다.

조정현이 울면서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뭉개진 목소리로 열심히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위험한 일은 안 하면 안 되냐고, 지승혁이 다치는 게 싫다고 했던 말이. 제 연인의 부탁이.

“심려 마십시오, 회장님. 자리가 비게 될 일은 없습니다.”

-허어…….

지호택의 목소리에 명백하게 달가워하는 기색이 배어들었다.

지호택은 지승혁이 말을 하는 의미를 분명히 알아듣고 있었다. 낮은 웃음소리에는 기꺼워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연호도 해외에 나가 보고 싶어 했으니 이번 기회로 제 형 덕분에 원을 이뤄서 좋아할 게다. 연호가 마지막에 효도하는구나.

말의 내용만을 보면 한없이 비꼬는 것이었으나 지호택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지승혁은 짧게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디 보자. 퇴원해서 정리하는 건 열흘이면 되겠지.

지호택은 느긋한 목소리로 유예기간을 선언했다. 일방적인 통보였으나 뭐라 항변할 수는 없었다. 지승혁은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너는 실망시키지 말거라.

명심시키듯 마지막 말을 경고처럼 던진 지호택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 떠오른 통화 시간을 내려다보는 지승혁의 입가가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핸드폰을 움켜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조금 전까지 괜찮던 상처가 조금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다시 몸을 뉘인 지승혁은 눈을 감았다.

지승혁 혼자만이라면 나서서 그 자리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호택의 밑으로 들어가지조차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지승혁에게는 조정현이 함께 있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지나온 길에서 지승혁이 우위에 서서 언제나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시작할 때는 몸뚱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이것보다 더한 일도 했고, 더 보잘것없는 자에게 고개를 숙였던 일도 있었다. 이깟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 그 상대가 지호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단지, 조정현이 보고 싶었다.

마치 몇십 년간 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정현을 품에 안고 살 내음을 마음껏 맡고 싶었다. 그를 꼭 닮은 페로몬도. 말갛게 웃는 얼굴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그 전부가 그리웠다.

병실에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그랬다면 오늘의 이 통화 역시 할 수 없었다.

지승혁은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지승혁은 이틀 뒤에 퇴원하게 됐다.

담당 의사는 지승혁의 회복 속도에 극우성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완전히 상처가 아문 건 아니었기에 당분간은 조심해야 했다.

병실에 누워서 온전히 휴식만 취하던 건 아니었다. 지승혁은 제오 캐피탈을 정리하는 밑 작업부터 들어갔다. 그렇기에 밖에 있을 때보다 외려 더욱 바빴다고 할 수 있었다.

다치기 전과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단지 지승혁이 할 수 있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시간이 걸린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적당히 밑 작업을 끝내고 남은 건 퇴원 후에 처리할 작정이었다.

“형.”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조정현이 지승혁을 불렀다.

“오늘은 더 예쁘게 하고 왔네요.”

“어, 진짜요? 감사합니다. 태준이 형이 골라 주셨어요.”

“그랬어요?”

지승혁의 칭찬에 조정현은 쑥스러워하며 뒤따라온 정태준 쪽을 돌아보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정태준의 센스가 상당히 좋았다.

차분한 카키 그레이 색의 코트는 칼라가 넓어 조정현의 얼굴을 더욱 작아 보이게 했다. 브이넥으로 깊게 파인 하얀 니트가 조정현의 긴 목과 쇄골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고, 가죽 로퍼는 발목까지 오는 검은 슬랙스와 합쳐져 분위기를 밝아 보이게 했다.

정태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지승혁에게 말했다.

“누가 사 준 건지 정현 씨 좋은 옷 되게 많더라구요. 정현 씨랑 나랑 체격이 좀 비슷해서 나중에 좀 빌려 입기로 했어요. 괜찮죠, 지 사장님?”

샐샐 웃는 정태준에게 지승혁의 무심한 시선이 꽂혔다. 일부러 저러는 게 빤했다.

굳이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지승혁에게 조정현이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아직 좀 힘드시죠.”

조정현은 당연한 질문을 한다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지승혁에게 가지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갈아입어야 할 옷이 담겨 있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손과 함께 쇼핑백을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조정현의 체온이 느껴졌다. 조정현의 얼굴 하나하나 찬찬히 살피듯 쳐다본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바로 입 맞추고 싶은데 안 되겠죠?”

“어…….”

조정현이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하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지승혁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밉살스러운 말을 하는 정태준 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 음, 저 퇴원 수속하고 올게요.”

할 말을 마친 조정현이 후다닥 바깥으로 나갔다. 조정현이 나가자 지승혁은 표정을 감출 노력을 들인다는 것도 귀찮아졌다.

“와, 돌변하는 것 좀 봐. 정현 씨가 이걸 봤어야 했는데.”

정태준이 한탄했다.

“옷 갈아입게 나가.”

“왜 갑자기 내외하고 그래. 내가 설마 너한테 뻑이 가서 달라붙겠냐? 우리가 그런 끈적한 사이는 아니잖아.”

한마디도 지질 않는다. 지승혁은 짧게 숨을 내쉬곤 상의를 벗었다. 옷을 갈아입는 지승혁에게서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정태준이 말했다.

“너 정리한다며? 무슨 바람이 다 불었어?”

“…….”

“영감탱이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않던 놈이.”

제오 캐피탈을 정리하는 걸 정태준이 모르길 바라는 게 무리였다.

정태준은 그냥 한번 지나가는 말로 묻는 게 아니었다. 지승혁은 니트에 머리를 꿰어 넣으며 말했다.

“정현이가 나 다치는 게 싫다고 하잖아.”

정태준의 미간에 주욱 금이 갔다.

정태준은 잠깐 동안 지승혁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의도를 살펴보는 듯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승혁이 되는대로 둘러댄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으억. 미친. 사랑꾼 되셨어, 아주.”

정태준이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승혁은 바지를 갈아입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댔다. 정태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근데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으셔서 본인 생일도 말을 안 하셨어. 평소에 둘이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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