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룸 안으로 들어온 지승혁은 우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은 이미 몇 병이나 비어 있었고 아직 내용물이 있는 것들은 테이블 위에 주르륵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술병들 사이로 주사기 하나가 보였다.
지승혁이 무표정하게 그걸 내려다보았다.
하다 하다 약까지 손을 댄 모양이었다. 한숨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지연호도 나름의 이유를 줄줄 늘어놓을 거다. 하지만 애가 아닌 이상 그런 건 어디까지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에 구실을 붙였을 뿐이다. 어린애도 아니고 스스로 결정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했다.
“쓰레기 청소는 오랜만에 맡아 보네.”
자조하듯 중얼거린 말에는 은은한 분노가 배여 있었다. 지호택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부분까지 예상하고 지호택에게로 간 거였다. 이제 와서 못 한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으나 더러운 기분조차 괜찮다고 여길 생각은 없었다.
“어……. 이게 뭐야. 이제 내가 환상을 보나. 씨발.”
어느 틈에 지연호가 정신을 차렸는지 지승혁을 보고 눈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묘하게 멍한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마 김소진을 찾는 모양이었다.
“씨발게, 베타면 베타답게 어, 알파가 선택해 줬으면 고분고분 굴어야지. 어디서 콧대를 세워. 후유증도 안 남는 약이라니까 사람 말도 못 믿고, 콧대를 세워. 씨발. 어디 갔어, 그거. 데려와!”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꼴이 마치 판에 핀으로 고정해 놓은 벌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지승혁은 그런 지연호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놓으라며 악을 빽빽 써 대며 팔다리를 휘둘러 댔지만 약에 절어 제대로 조절도 못 하는 움직임으로 지승혁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지연호가 하는 꼴을 잠시 내려다보던 지승혁이 팔에 힘을 주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때리는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지연호는 더 이상 버둥거리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늘어뜨렸다.
지승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놈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느라 어린 제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걸 빤히 알고 있음에도 제시간에 귀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짜증스러웠다.
잠시간 조용한가 싶던 지연호가 정신을 차린 듯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씨발 새끼가, 어? 사람 치네? 개새끼야. 지 애미도 모르는 새끼가 어딜 사람을 쳐? 개놈아!”
지승혁을 도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일말의 동요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가 말한 대로 지승혁은 저를 낳아 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지 애미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다. 물론 지연호는 지승혁을 열받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이긴 했지만 말이다.
딱히 그 사실이 분하거나 원통하지 않았다. 상처가 아닌 부분을 들쑤셔 봤자 아플 리가 없다. 그러니 그 말로는 지승혁을 자극할 수 없다.
지승혁은 몇 마디 욕설을 지껄이는 지연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전화를 걸었다. 혼자 힘으로 지연호를 데리고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그와 닿는 게 싫었다.
그의 페로몬에 직접 닿는다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굴러먹던 새끼라 이런 얘기는 아무리 해도 귀에 꽂히지도 않지? 아아아, 그래. 네가 옆에 끼고돌던 오메가 얘기해야 그나마 신경 좀 쓰이냐? 어? 씨발, 예쁘장하게 생긴 오메가 맛이 좀 좋으셨나 봐? 어? 좋은 건 서로서로 돌려 먹어야지, 안 그래?”
지승혁은 눈동자만 움직여 지연호를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도발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말이었으나 그냥 넘겨들을 수 없었다. 그가 지승혁의 반응을 원했다면 성공이었다.
지승혁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지연호는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갔다.
“그러잖아도 내가 좋은 파티 하나를 계획 중인데 그 오메가 하루만 빌려줘. 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식으로 상부상조해야지. 걱정은 하지 마. 구멍 동서는 나도 취향에 없어서, 나는 안 할 거야. 내가 또 그 정도 도리는 지킬 줄 알지.”
뭐가 우스운지 킬킬거리는 지연호의 몸이 스르륵 소파로 쓰러졌다. 그는 계속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몸을 추슬렀다.
지승혁은 지연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폭탄이 골치 아픈 건 그 위력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게 터지는 시점을 몰라서다. 문제가 될 것 같다 싶으면, 그게 터지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 미리미리 치워 두는 편이 안전하다.
지승혁은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한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 악무십시오.”
“뭐? 무슨―”
뜬금없는 지시가 떨어지자 지연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빠악.
지연호의 몸이 한쪽으로 들썩이며 기울어졌다. 충격으로 눈을 크게 뜬 지연호는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사이 지승혁은 같은 손으로 그의 반대편 뺨을 후려쳤다.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지연호의 입이 터졌는지 피가 손등에 묻었다.
“으, 아으, 씨, 바알. 그만, 으억……!”
시뻘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지연호가 중얼거렸다.
지승혁은 소파에 엎어지다시피 한 지연호를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딴 식으로 노니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나한테 자리 내주게 생겼잖아요, 지연호 씨.”
“뭐, 뭐?”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밀려 떨어지기 전에 꼬리 말고 얌전히 엎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 짖을 상대를 못 가리겠으면 주둥이에 입마개도 하시고요.”
지승혁의 계산대로 지연호가 발끈했다. 일부러 자극할 만한 단어를 골라 쓴 보람이 있었다.
그 말을 마친 지승혁은 이번엔 주먹을 쥐고 지연호의 얼굴을 날렸다. 충격에 나가떨어지며 소파 팔걸이에 이마를 부딪친 건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지승혁은 쥐었던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지연호의 이에 스친 건지 손등이 작게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조정현이 보면 속상해할 텐데 어쩌나 싶어 혀를 찼다.
제 손등의 상처에서 시선을 뗀 지승혁은 늘어져 있는 지연호 쪽을 한 번 흘끔였다.
“사람 찌를 만한 배짱도 없으면서 소리만 크게 짖지 말아야지.”
말을 마친 지승혁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미끼를 던졌는데 물어야지, 멍청한 새끼.
지연호의 멍한 얼굴에 조금씩 기묘한 기색이 들기 시작했다. 지승혁은 그걸 확인하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섰다. 하는 김에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살펴보며 딴짓을 했다.
“회장님께 미리 보고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일부러 지연호에게 다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약과 술에 절은 뇌로는 앞뒤 분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거다.
얼른 반응하길 기다렸다.
이 정도로 떠먹여 주는데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면 쓸모없는 턱을 부숴 버리든 해야지.
의도대로 지연호 쪽에서 수상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걸 들으며 지승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손에 떨어진 기회를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작게 들리는 금속음에 지승혁은 입술 끝을 씰룩였다.
“씨발, 새끼. 죽어……!”
옆구리 근처에 뜨끔한 감각이 들었다.
살을 찢으며 들어오는 이물감의 느낌에 지승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개새끼, 짖기만 하는 게 아니라 놀랐냐? 씹새끼. 죽어, 씨발 놈아!”
지연호가 지승혁의 몸을 찌른 걸 빼내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찌른 건 좋아도 흉기를 빼내는 건 곤란했다. 목숨에 지장이 가지 않을 부분으로 찌르는 걸 유도했다곤 하지만 출혈이 심해진다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지승혁은 입을 꾹 다물고 저를 덮친 지연호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떨어트린 후 발로 걷어찼다. 나가떨어진 지연호는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박았는지 이번에야말로 조용해졌다. 지연호에게서 흘러나오던 페로몬도 딱 멈췄다.
적막한 공간에 지승혁의 숨소리만 들렸다. 옆구리 쪽에 박힌 검은 손잡이 주변으로 불타는 듯한 통증이 들었지만 참을 만했다.
지승혁을 찌른 건 지연호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걸로 보이는 나이프였다. 이런 걸 상시 소지하고 있다는 점이 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연호는 찌른 후 손잡이를 비틀지도 않았다. 이거라면 내부 상처도 깔끔할 테니 지승혁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승혁이었다면 치료나 회복에 애 좀 먹으라고 놓여 있던 술병을 깨서 잘게 찔렀을 텐데 지연호는 그 정도로 막 굴러먹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고 자라길 천생 도련님이었다.
“아……. 정현이 걱정하겠네.”
아픈 건 둘째 치고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는 게 더욱 난감했다.
게다가 찔린 걸 알면 조정현이 걱정할 게 빤했다. 좋은 것만 보여 줘도 부족한 연인인데 신경 쓰게 만들 수는 없었다. 움직이는 게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진통제 몇 알 씹어 삼키면 그것도 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다.
이 정도 상처가 처음도 아니고 최대한 통증 없이 몸을 움직이는 법은 알고 있다. 지승혁은 사람을 불러 적당히 처치하고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셔츠가 피에 젖어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거추장스러웠다.
지승혁은 문을 열고 밖에 있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
“안쪽에 정리해 뒀으니까 챙겨서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