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내부는 낡긴 했으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김윤혜는 입고 있던 외투와 머플러를 벗으며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좀 휑하긴 한데, 저쪽에 앉아 있으렴. 금방 차려 줄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전기장판 켜야 하는데.”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잠깐 있는 건데요. 저도 같이할게요.”
“아니야. 내가 다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앉아 있어. 여기가 웃풍이 좀 있어서 그냥 있으면 추울 거야. 이제 전기장판 켰으니 조금만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이게 보기에는 이래도 아주 따뜻해. 그러면 둘이 잠깐만 앉아 있어요.”
김윤혜는 높은 열 때문에 누렇게 변한 전기장판이 겸연쩍은 듯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지승혁에게도 한마디 하고 빠르게 주방으로 갔다. 집은 아주 작아서 주방과 거실의 구분이 무색했다.
따다다다닥, 하고 가스레인지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하고 가라기에 오긴 왔는데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두리번거리던 조정현의 시야에 벽의 모서리가 들어왔다. 닦아 내긴 했으나 검은 자국이 선명했다. 저게 뭐지, 하고 쳐다보던 조정현은 그게 곰팡이 자국이라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동영상 등에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였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에어컨은 샛노랗게 색이 바래어 벽에 붙어 있었다. 제대로 작동이나 될까 싶었다.
조정현이 그동안 당연한 듯 추울 때는 따뜻하게 더울 때는 시원하게 살던 동안 그녀는 이런 곳에서 쓸쓸하게 혼자 살고 있었다. 갑자기 이루 말 못 할 감정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
지승혁이 조정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지금 조정현이 무슨 심정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조정현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끌어안고 싶은데 안 되겠죠?”
지승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정현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일부러 경박하게 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을 가볍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조정현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도 같은 생각 하고 있었는데.”
“……너무 그렇게 부추기지 말아요.”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 조정현은 피식 웃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엄지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형이 옆에 계셔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요.”
“별 얘기를 다 하는군요.”
지승혁의 대답에 조정현은 가만히 웃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런 자리도 없었을 테고 설령 마련이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담담하게 있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지승혁이 있기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어느 틈에 짭조름한 냄새가 풍겨 왔다. 미역국 냄새였다.
그와 함께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도 섞여들었다. 여러 가지 냄새가 함께 나는 거로 봐서는 동시에 몇 가지 음식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정현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김윤혜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리 앉아 있으라곤 했어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퍽 키가 작아 가슴께에 오는 김윤혜는 근처로 오는 조정현을 보곤 지레 손사래를 쳤다.
“아냐. 괜찮대두. 부르면 와.”
“도울게요. 제가 손님으로 온 게 아니잖아요.”
“…….”
김윤혜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것 좀 상에 놔줄래?”
김윤혜는 밥을 담은 그릇을 내밀었다. 어느새 온 지승혁이 팔팔 끓고 있던 미역국의 불을 줄였다. 그리고 국자로 미리 꺼내져 있던 국그릇에 덜기 시작했다. 조정현은 김윤혜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뭐 들었는지만 알려 주시고 앉아 계세요.”
“아유, 어떻게 그래.”
곤란해하던 김윤혜는 거듭 반복된 권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네 명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상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반찬들이 가득 올라갔다. 갓 썬 배추김치와 오이소박이, 잡채와 소불고기, 돼지갈비는 물론이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노릇하게 구운 생선. 그리고 손질된 두릅과 빨갛게 양념 되어 맛깔스럽게 익힌 더덕구이와 갖가지 나물 반찬들은 척 보기에도 얼마나 손이 갔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재료 구입부터 시작해 무슨 생각으로 하나하나 다듬고 만들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만들어 봤는데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어…… 네. 전부 맛있어 보여요. 이거 전부 만드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고생은 뭘. 그냥 혼자 뚝딱뚝딱 하다 보면 금방 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승혁 씨도 드세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지승혁은 인사 후에 식사를 시작했고 조정현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김윤혜는 그저 조정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정현은 밥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 김윤혜에게 말했다.
“저어, 같이 드세요.”
“나는 만들면서 먹어서 배불러. 얼른 먹어.”
음식을 만드는 동안 그녀가 간을 보는 것 이외에 뭔가를 먹는 건 보지 못했다. 조정현은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한 번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추가 뿌려진 국을 휘휘 저어 입에 넣자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났다. 음식을 삼키고 다른 반찬을 집어 먹었다. 그사이 김윤혜는 생선 살을 먹기 좋게 발라 주고 있었다.
반찬 하나하나 꼭꼭 씹어 먹고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점점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로 뭔가를 생각하기 전에 나타난 반응이 당황스러웠으나 왜 그러는지 분석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조정현은 연신 코를 훌쩍였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김윤혜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걸 깨달은 조정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뇨. 그냥 자꾸 코가 나와서요. 매운 걸 먹어서 그런…… 아, 아니. 그렇게 매운 건 아니구요. 맵진 않은데…….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근데, 그냥 갑자기 코가 막혀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조정현은 궁색한 변명을 하며 설피 웃었다. 지승혁이 건네는 물을 받아 마시며 기분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김윤혜는 그런 조정현을 걱정스레 보며 입을 열었다.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네. ……맛있어서요. 진짜, 너무 맛있어요.”
“제 입에도 꼭 맞습니다. 음식 솜씨가 정말 좋으시네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김윤혜는 조정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정현은 손등으로 코를 슥슥 문지르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차려진 모든 음식을 거의 전부 비웠다. 가짓수도 가짓수였기에 양이 많았지만 가능한 전부 먹으려 노력했다.
배가 너무 불러 숨 쉬는 것마저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정현은 자신이 한 숟갈 한 숟갈 먹는 걸 뿌듯하게 보며 비워지는 접시를 기쁘게 보는 김윤혜의 표정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처한 지승혁 덕분에 두 사람은 마주 앉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으며 스스럼없이 설거지를 자처한 지승혁의 행동에 가장 당황한 건 조정현이었다. 같이 오자고 권한 게 자신인데 잡일까지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승혁은 평연한 얼굴로 그런 조정현에게 가서 이야기 나누고 있으라며 등을 밀어주었다.
결국 조정현은 김윤혜와 함께 거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소화에 좋으라고 준 따끈한 매실차를 한 모금 마신 조정현을 보던 김윤혜가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뭐…… 묻고 싶거나 궁금한 건 없어?”
“……제가 입양됐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된 일인지…….”
막연한 단어로 구상한 말이었으나 김윤혜는 조정현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컵 안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김윤혜는 으음, 하며 목소리를 끄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그게 궁금했겠구나.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하던 곳에서 남자를 만났어. 그 사람은, 음, 그러니까 네 아빠였지.”
그녀는 마치 오래된 동화를 말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어. 많이 행복했지. 너를 낳고 나서…… 형질 감별 테스트에서 알았어. 네가 오메가라는 걸. 그런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어. 알파나 오메가를 키우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고 현실적으로 기댈 곳도 없었으니까. 갓난애를 데리고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던 김윤혜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연신 눈가를 훔쳤다. 조정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찾은 휴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흘린 눈물로 휴지는 금세 젖어 들어갔다.
김윤혜는 가방에서 포켓 티슈를 꺼내 다시 한번 눈물을 닦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녀에게 조정현이 물었다.
“저, 그, 상대분은요……?”
김윤혜는 고개를 저었다.
“임신을 알렸을 때 너무 기뻐했는데, 5개월쯤이었나. 일 다녀온다고 하더니 그대로 사라졌어. 회사에 찾아가 보니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건 알려 주는데 정확히 어디인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더라구.”
김윤혜는 눈물을 닦았다. 손에 쥔 휴지는 이미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그녀가 뺨을 닦을 때마다 부슬부슬 작은 부스러기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