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지금도 충분히 기분 좋았다. 나쁘지 않았다. 나쁘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대로는 뭔가 아쉬웠다. 처음에 몸을 사린 건 자신이면서 너무 절제를 모르는 건가 싶었지만 당장은 욕망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내일 아침에 정현이 몸 상태 확인하러 병원에 갈 거예요.”
조정현의 생각을 읽은 듯 타이밍 좋게 지승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그는 조정현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승혁의 좆이 주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에 조정현은 가볍게 신음했다. 샤워할까 묻는 말에 조정현이 몸을 일으키자 안에 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아무리 해도 이런 느낌에는 영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따뜻하게 쏟아지는 물에 몸을 적시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잔불이 남은 육체를 애써 가라앉히며 샤워를 끝내고 나온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몸에 닿는 체온이, 온기가 마음을 부드럽게 진정시켰다.
* * *
“정현아. 일어나요.”
“……음.”
조정현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 뜨자마자 지승혁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지승혁은 멍하게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는 조정현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연이어 뺨과 입술에 뽀뽀한 지승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조정현은 손을 움직여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얇은 옷감 너머로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찔러 오는 지승혁의 것도. 조정현의 것도 고개를 들었으나 두 사람은 더 이상 다른 건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이상 하면 멈추는 게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술을 아쉽게 쫓던 조정현은 감았던 눈을 떴다.
체온으로 따끈하게 데워진 침대를 나가기는 영 아쉬웠으나 슬슬 준비를 하고 나가야 한다는 지승혁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조정현은 방 하나 가득 쌓인 옷 중에서 몇 벌을 골라 입고 지승혁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몇 주 만에 방문한 병원은 왠지 어색한 느낌이었다. 병원 특유의 분위기가 좀 낯설게도 느껴졌기에 조정현은 옆에 선 지승혁의 손을 잡았다.
귀도 순조롭게 아물고 있었고 페로몬 검사 결과 역시 양호했다.
결과지를 보던 의사는 예후가 굉장히 좋다며 이대로 유지한다면 예상보다 빠르게 페로몬이 안정될 거라 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 지승혁의 말에 조정현은 사람이 거의 없는 병원 구석에 앉았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근처에 모르는 사람이 앉았고 조정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병원 엘리베이터 근처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모르는 사람과 둘이 적막한 곳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람이 많은 쪽이 더 편했다. 조정현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딱히 별 할 것도 없었기에 습관처럼 동영상 어플을 켜서 목록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극우성 알파가 왔어? 저번에 그 남자? 키 엄청 크던데.”
‘극우성’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조정현은 고개는 핸드폰에 고정한 채로 눈만 움직여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이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큰 건 아니었으나 대화에 방해될 정도로 주변이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조정현은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 뭐 러트 주기랑 각인 때문에 상담하는 것 같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여기 일하면서 나도 극우성은 처음 봤거든. 일반 우성이랑은 좀 다른 모양이더라. 서 교수님이 그것 때문에 눈이 뒤집혀 계시던데.”
“왜?”
“왜긴 왜겠어. 극우성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드문데 이유 없이 각인도 못 하고 러트 주기가 틀어진 희귀 케이스가 들어오니까 그러는 거지. 서 교수님 알잖아. 해외 쪽 논문도 엄청 찾아보시는 것 같더라.”
“하긴. ……아, 왔다. 타자.”
두 사람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조정현은 그들의 대화에 등장한 극우성이 지승혁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러트 주기가 틀어졌다니 무슨 말일까. 그는 조정현에게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핸드폰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지만 조정현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 위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아, 형.”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핸드폰 봤어요. 볼일은 다 보신 거예요?”
“네. 이제 일어나죠.”
지승혁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그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확인하는 것도 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근데 형, 혹시 몸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
지승혁이 웃으며 되물었다.
“상담을 오래 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
과연 대답을 해 줄까. 조정현은 지승혁의 대답을 기다리며 살짝 긴장했다.
“별일 아니에요. 정현이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어요.”
“……네에.”
별일 아니라고 하면서도 지승혁은 그게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정말 더 물어보지 않아도 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지승혁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점심에 회식이 있어서 정현이 혼자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점심 회식요?”
“저녁에 하면 시간이 더 길어져서요. 점심에 1시간 반 정도 시간 빼놨어요.”
“아. 그러면. 어, 시간이…….”
조정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까지 1시간여 정도 남아 있었다.
같이 가자고 해도 될까 싶었으나 회식이라 하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지승혁과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회사 식사 자리에 자신이 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 박석영이 잘 지내는지는 직접 보고도 싶었고 궁금하기도 했다.
머뭇거리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말했다.
“정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동석을 권하지 않았다. 조정현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했다. 박석영을 보고 싶으면 이후에 또 기회가 있을 거다.
조정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아니, 그냥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내가 안 돼요.”
지승혁이 조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 * *
“조심히 다녀오세요.”
“금방 올게요.”
지승혁은 조정현의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회식이라고 얘기했을 때 조정현이 가고 싶어 하는 눈치라는 걸 알아차렸으나 권하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에서 숙박을 해결하고 있을 때 박석영이 살뜰하게 챙겨 줬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조만간 자리를 따로 마련해 줄 참이었다.
지승혁을 태운 차가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병원에서 조정현이 어디 아픈 게 아닌가 물어봤을 때에는 약간 당황했다. 아무 일 없다는 자신의 대답을 조정현이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더 질문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지승혁은 사무실이 아니라 바로 회식 장소로 향했다. 도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질 좋은 한우를 쓰고 맛도 깔끔해 알음알음 많이들 찾아오는 가든에 사무실 직원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지승혁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본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그는 손으로 사람들을 제지했다. 직원들은 지승혁이 앉을 자리를 미리 비워 두었으나 그는 그곳을 마다하고 미리 정해진 것처럼 식탁의 끝자리에 앉았다.
이영선의 맞은편이다.
마침 이영선은 제일 끝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은 빈자리였다. 누가 짰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그 전까지 웃으면서 직원들과 잡담을 하고 있던 이영선의 안색이 설핏 굳어졌다.
“식사는 잘들 하시고 계셨습니까.”
“아이고, 그럼요.”
“많이 드시고 부족하면 더 시켜 드십시오. 이번에 현무실업 해결됐으니 상여금 200% 지급해 드릴 겁니다.”
지승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모인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것처럼 웃으며 서로서로 잔을 부딪치고 고기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영선도 그들과 같이 웃으며 잔을 주고받았다.
그런 이영선을 응시하던 지승혁이 자신의 앞에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나도 한 잔 주시죠, 이영선 씨.”
“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주고 나만 안 주시면 됩니까. 서운하게.”
지승혁의 잔에 술을 따르던 이영선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움직였다.
“그래서 지금 드리고 있습니다.”
술잔의 8할 정도를 채운 이영선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어, 이영선이 잔 비었네. 받아, 받아.”
“이영선 씨는 제 잔만 받을 겁니다.”
선선히 웃으며 말하는 지승혁의 목소리에 잔을 들던 이영선도 또 그에게 술을 따라 주려 다가왔던 직원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고 있던 이영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지워졌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영선은 애매한 표정을 하고 지승혁의 속내를 가늠해 보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승혁은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 잔도 받으실 생각입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럼 저는 다른 애들 잔 채워 주러 가 보겠습니다.”
이영선에게 술잔을 채워 주러 왔던 직원이 후다닥 다른 곳으로 떠났다.
지승혁은 소주병을 들었다.
“받으십시오.”
작은 술잔에 술은 금세 차올랐지만 지승혁은 멈추지 않았다. 이영선이 당황하며 그만 줘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계속 술을 따랐고 결국 소주잔에서 넘쳐 흘렀다.
“잔이 작군요. 하긴 소주잔에 술을 받아 봐야 얼마나 받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영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 바라보던 지승혁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다각, 하는 소리가 났다.
“주신 술, 잘 마시겠습니다.”
“이영선 씨는 눈치가 참 빨라 좋습니다.”
지승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