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대출해 간 만큼 회수했냐고 물었죠. 네,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회수했어요.”
“네에…….”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부모가 지승혁에게 돈을 빌렸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이 어느 정도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
지승혁과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무자와 채권자.
두 사람의 만남이 그것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아예 없던 것처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지승혁은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 줄 게 분명했으나 조정현은 자신의 부모님이 얽힌 상황에서 괜찮다는 그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승혁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평소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조정현은 주의 환기를 위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녁, 드셔야죠.”
“정현아.”
지승혁이 소파에서 일어난 조정현을 불렀다.
“원망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화를 내고 싶으면 화내도 괜찮아.”
조정현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몸을 돌려 지승혁을 보았다.
“그렇게 하면 지금 상황이 바뀌나요?”
“네 속이 풀린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한마디로 상황은 그대로라는 이야기였다.
그럴 생각도 없지만, 지승혁에게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른다고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 않았다. 지승혁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걸로 서운해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수십억에 달하는 돈이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자신 쪽에서 먼저 그걸 없는 셈 해 달라고 할 수 없다.
조정현은 자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부모님의 빚을 없애 주는 것? 회사를 매각하지 말고 그대로 놔둬 주는 것?
그건 모두 다 제 욕심이 아닌가.
아, 하지만.
조정현은 입술을 한 번 잘근 씹었다.
대부업을 그만하는 건 안 될까.
의식할 새도 없이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번 돈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누리고 있는 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권유를 한단 말인가.
무리한 요구다. 조정현은 그 생각을 머릿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여태껏 자신에게 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지승혁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을 조정현에게 주었다.
이 이상 바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그가 기꺼이 내어준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불만을 표할 수는 없다.
조정현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저는 부모님이 저를…… 저에게 그렇게 하셨어도 괜찮았어요. 나쁜 짓을 한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형이, 승혁이 형이 한 일 가지고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아버지의 회사가 매각된다는 사실은 여태까지 조정현이 살았던,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과거가 사라진다는 것과 같았다.
이전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의사가 없는 것과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건 달랐다. 부모님도, 그들의 아들로 살아왔던 시간들도 증명할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체가 마음 한편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감정도 무뎌지고 옅어질 거다. 마치 흙이 쌓여 화석이 되는 것처럼.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르잖아.”
지승혁의 낮은 목소리에 조정현은 입술을 한 번 축였다.
그 말이 확실한 깨달음을 주었다.
지승혁과 그들은 달랐다. 같은 선상에 둘 수도 없다.
조정현은 기묘한 기분으로 지승혁을 바라보았다.
좀 더 떼를 써도 된다는 이야기일까. 억지를 부리고 고집을 부려도 된다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고 자신이 받아들이면 되는 상황이 아닌가.
조정현은 지승혁의 짐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시작은 가볍더라도, 계속 지고 있으면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져 어느 순간 부담스럽다고 느껴질 거다. 그 순간이 오는 게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때가 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더라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지승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작정한 듯 꽉 닫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바로 내어줄 수 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직 그럴 정도로 성숙하진 못했다. 조정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조정현이 내릴 결정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단지 그걸 위해서 생각을 제대로 다져 넣고 감정을 추스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아주 약간의.
조정현의 부탁을 들은 지승혁은 잠시 침묵했다. 지승혁은 허벅지에 올려 둔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얼마나?”
조정현은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 되어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조정현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지승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조정현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정현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됐다.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안달 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그 느낌은 뭐라고 설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야릇했다.
머리가 먼저 생각할 틈도 없이 불쑥 치고 올라온 건 만족감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런 감정을 느낀 자신이 너무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자신이 어딘가 좀 이상한 걸까.
조정현은 지승혁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아. 3, 3시간 정도요?”
지승혁의 표정이 이번에야말로 조금 이상해졌다.
“3시간?”
확인하듯 묻는 질문에 조정현이 고개를 끄덕했다.
지승혁의 표정이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2, 시간 정도……?”
조금 줄어든 시간을 말하니 다물어져 있던 지승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너무 길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당연히 아니에요.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니까.”
“얼마나 생각하셨는데요?”
말을 마친 직후 조정현의 머릿속에 인터넷에서 봤던,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하는 질문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보름 정도?”
“네에?”
조정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길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그래요?”
“어차피, 제 마음은 정해져 있고 그냥 생각 정리만 하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지승혁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정현은 재빠르게 덧붙였다.
“마음이 정해져 있다는 게, 갈 데 없다고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형이 좋으니까, 제가 선택한 거예요. 그냥 기분이 좀 묘해져서요. 묘하다는 게 싫다, 이런 게 아니구요. 설명하기 힘든데…… 아시죠?”
“그래요.”
중언부언하다가 머쓱하게 마무리한 조정현은 지승혁의 상태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정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귀가한 이후 그는 자신을 만지지 않았다. 뺨도 머리도 쓰다듬지 않고 손도 잡지 않았다.
조정현이 지승혁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안 만져 주세요?”
“……정현이는 가끔 대담한 말을 하네요.”
지승혁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잠시 조정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몇 초가 흘렀다. 체감상으로는 몇 분이나 지난 것 같았다.
“만져도 돼요?”
지승혁은 낮은 목소리로 허락을 구했다.
면전에 대고 이런 질문을 받는 건 생각보다 더 민망했다. 하지만 시선을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정현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허락을 받은 지승혁의 손이 천천히 조정현의 얼굴에 다가왔다.
처음 뺨에 닿은 건 엄지였다.
깃털이라도 닿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볍게 닿았던 엄지를 시점으로 천천히 다른 손가락이, 그리고 손바닥 전체가 뺨을 감쌌다. 조정현은 가만히 지승혁을 올려다보았다.
지승혁은 엄지로 조정현의 광대뼈 부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의 손길을 느끼며 조정현이 눈을 깜빡였다.
길쭉한 아몬드형으로 생긴 지승혁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집에 오셔서 뽀뽀도 안 해 주셨어요.”
조정현의 지적에 지승혁은 뒤늦게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느릿하게 조정현의 이마에 한 번, 뺨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닿는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어깨를 잡고 상체를 조금 일으켜 그의 이마에 뽀뽀했다. ‘쪽’도 아니고 ‘뾱’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났다.
조정현은 천천히 페로몬을 풀었다. 그러자 지승혁이 긴장된 몸을 풀고 조정현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넣더니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목덜미에 닿은 코끝을 여러 번 문질렀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조정현은 어깨를 살짝씩 들썩였다.
조정현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행동에 호응이라도 하듯 지승혁의 넉넉한 손이 조정현의 뒷목을 감싸 안았다.
관자놀이보다 조금 윗부분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조정현이 몸을 떼자 지승혁은 한 번 팔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순순히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