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뭐라고 잘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을 걸어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횟수가 많았다.
지금도 지승혁의 시선을 못 느끼는 듯 가만히 TV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있던 조정현이 참고 있던 것처럼 숨을 터트렸다. 미동도 없이 열려 있던 눈동자가 그제야 시린지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가 뜬 조정현은 곧 자신을 쳐다보는 지승혁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죄, 죄송해요. 무슨 말씀 하셨어요?”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러면……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조정현이 눈을 깜빡이며 한 질문에 지승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TV 볼 때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뇨…….”
조정현이 다시 TV 쪽으로 고개를 돌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지승혁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그에게 기댔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몸을 끌어안듯 상체를 그에게 조금 틀었다.
“고마워요. 형이 제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에요.”
“우리 정현이는 당연한 거로 고마워하네요.”
농담으로 하는 말에 조정현은 조금 더 지승혁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요새 계속 멍해져 있어서 죄송해요.”
조정현은 고개를 숙여 얼굴이 안 보이는 상태로 지승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몸을 좀 더 밀착하니 따뜻한 체온이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계속 떠올리고 있어요. 좀 이상해요, 저.”
“뭘 떠올리고 있는데요?”
“……그냥…….”
질문을 받은 조정현은 머뭇거렸고 지승혁은 그런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때 그 사람들…… 생각요.”
대답이 묘했다. ‘그때 그 일’도 아니고 ‘그때 그 사람들’이라니.
지승혁은 조정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이어진 질문에 조정현은 고개를 들었다. 지승혁의 질문이 뜬금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조정현은 지승혁과 눈이 마주치자 제 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빠르게 다시 얼굴을 숙였다.
“……어떻게, 형은 그렇게 다…….”
제대로 말을 한 건 아니었으나 지승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승혁은 가만히 조정현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치우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정현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때 그 사람들.”
조정현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게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그 사람들을 지금 정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는 거예요.”
지승혁의 질문에 조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였다.
지승혁은 정말로 조정현을 위해서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정현이 죽이고 싶다고 한다면 모조리 죽일 거고 내장을 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다 바칠 작정이었다. 똑같은 일을 겪게 해 주고 싶다면 물론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었다. 조정현이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단죄하고 싶다면 목줄을 채워 끌고 와 조정현의 눈앞에 대령할 수도 있었다.
조정현이 한마디만 하면, 지승혁은 그게 뭐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냥…… 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라 생각날 때면 화나긴 하는데…….”
조정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과 목을 만졌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던 조정현은 곧 그 기억을 떨쳐 내는 것처럼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 용서한다거나 복수는 허무할 뿐이라거나 하는 그런 거창한 건 아니구요. 그런 건 아닌데…… 사실은 집에 돌아오고 나서 지내는데 점점 화가 나더라구요. 나한테 왜 그랬을까. 왜 나였을까. 그래서 상상해 봤어요. ……그 사람들한테 똑같이 해 주는 거요. 몇십 번, 아니…… 아마 몇백 번 했던 것 같아요.”
한숨처럼 이야기하던 조정현은 눈을 내리깐 채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잘근거리며 깨문 후 말을 이어 갔다.
“저한테 한 거랑 같은 걸 그 사람들에게 해 준다면 어떨까, 그것보다 더 심하게 한다면 어떨까. 계속 생각했어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속에 있는 말을 토해 내는 것처럼 빠르게 이야기한 조정현은 깊게 호흡을 한 번 했다.
“근데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 아파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머릿속으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거리기도 하고 그 순간에는 통쾌하기도 한데요, 근데, 생각을 끝내면 허무해져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제가 싫더라고요. 몇 분이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저도 싫고, 계속 그 생각에 얽매여 있는 거 자체도 싫고요. 점점 저라는 사람도 이상해지는 것 같고.”
지승혁은 조정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 손을 조정현의 손이 가만히 덮었다. 조정현은 입을 다물고 손가락 끝으로 지승혁의 손가락을 잠시간 만지작거렸다. 말랑한 손가락 끝이 굳은살이 박여 단단한 손가락을 덧그리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조정현의 시선은 아래쪽에 향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 준다고 하더라도 별로 속 시원할 것 같지 않더라구요. ……모르겠어요, 막상 하면 다를지도. 하지만 제가 생각한 대로면 어떡하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면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좀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고 있는데 그냥 그 사람들 때문에 제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게 싫어요. 제 시간을 그 사람들 생각하는 데 계속 할애하는 것도 싫고요. 그렇게 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맞았던 것도 아팠던 것도 너무 억울한데 여기서 더 시간을 차지하게 두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없던 일처럼, 처음부터 없던 사람들처럼 잊어버리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네. 정말요. ……근데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혼잣말을 하듯 작아진 조정현의 목소리에는 자조 섞인 웃음이 묻어났다.
지승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조정현은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시간이 아까워 얽히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지승혁 자신이나 그 주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퍽 다른 행동이었다. 받은 건 갚아 주고 할 수 있는 만큼 짓밟았다.
육체적으로 강인한 것만이 강한 게 아니었다.
조정현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는 타입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조정현이 생각하는 방식은 상황이 그런 걸 어쩌냐며 변명을 주워섬기며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으려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정현은 지승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강했다.
그런데 트라우마에 걸려 주저앉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범죄를 겪은 후에 이렇게 빨리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조정현은 제 다리로 버티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힘들어하고 있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이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감탄을 넘어 경이로울 정도였다.
지승혁은 그의 이마를 엄지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래요. 우리 정현이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렇게 하도록 해요.”
“하지만…… 그러면 좀 비겁하잖아요. 저한테…… 저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직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맞는 거고. ……그래야 강한 거잖아요.”
지승혁은 가만히 조정현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살이 빠져 전보다 앙상한 몸이 만져졌다.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려왔고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정현아.”
조정현이 고개를 머뭇머뭇 들었다.
“네가 아니면 아닌 거야. 싫은 생각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덮어 버리고 싶으면 덮어 버리고 잊어버려도 돼요. 정답이라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모든 일에 최우선은 본인이에요. 그 외의 다른 건 신경 쓰지 말아요.”
“하지만…….”
“지금 정현이가 당장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하기 싫다고 미루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지승혁의 질문에 조정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비겁한 게 아니에요. 강하고 약하고가 아니고 그런 걸 나눌 필요도 없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을 보살피는 거니까요. 그리고 설령 좀 비겁하면 어때요. 그런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들 하는데 좋게 말하면 성숙해지는 거지만 결국 원래 모양에서 깎여 나간 거예요. 깎인다는 건 아프다는 거고. 우리 정현이는 아픈 걸 제일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한결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지승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조정현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입술을 한 번 야무지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지승혁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제 옆에 형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지승혁의 대답에 조정현은 작게 웃었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동물처럼 조정현은 뺨을 지승혁에게 비볐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 어떻게 됐어요? 경호원이랑, 그 할아버지랑…….”
“아. 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