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조정현이 잠결에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금세 손을 떼 냈지만 지승혁은 그 뒤로도 한참을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조정현은 잔 것 같지 않은 지승혁을 보고 조금 당황한 듯했다. 조정현은 둥그런 눈을 크게 뜨며 설마 주무시지 않은 거냐고 질문했다. 지승혁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님용 침대방에서 자다가 이쪽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고 조정현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으나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퇴원 준비를 마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아침까지 먹으며 회진을 기다렸다. 의사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병실로 찾아왔다.
“조정현 씨 이제 퇴원하시네요. 상태는 전반적으로 좋습니다만 알파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공급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침 보호자분께서 극우성 알파시니 이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리하세요. 직접 공급받으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만 공기 중의 페로몬을 흡입하시는 형식도 괜찮습니다. 매일 매일이 제일 좋습니다만 그게 힘드신 경우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이상을 권장드립니다. 일단 약을 처방해 드리긴 할 텐데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라면 가급적 드시지 마세요.”
그렇다면 굳이 약을 처방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의사가 정확하게 그 부분을 설명했다.
“일반적으로는 무조건 약을 드시라고 하는데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안정을 시키는 게 예후가 좋기 때문에 가급적 약 복용을 하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혹시 약을 드시고도 상태가 진정되지 않으시면 응급실로 가셔야 합니다.”
“……네에.”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원 수속을 마친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운전사인 김성채가 조정현에게 퇴원을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와 조정현이 조금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아무도 없던 집에 조정현이 들어가니 그제야 완전한 집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집이란 잠을 자고 나오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돈을 번 이후 과시하는 것처럼 도심가에 얻은 집에 잡지에서 인테리어 해 놓은 대로 물건들을 사서 쑤셔 넣긴 했지만 그곳을 자신의 집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조정현이 있음으로 해서 그곳은 비로소 돌아갈 곳으로 바뀌었다.
지승혁은 살그머니 제 손을 잡은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잘 돌아왔어요.”
조정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으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조정현과 계속 느긋하게 쉬고 싶다고, 지승혁은 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요리를 금지당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지승혁은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요리를 했다. 그렇기에 더욱 조정현 역시 진심으로 그런 반응을 보였다.
퇴원한 첫날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앉아 있으라고 한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망하기가 어렵다는 카레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지승혁은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추려 꺼냈다. 재료를 손질하는 것까지는 얼추 그럴듯한 모양새를 냈다.
조정현이 주방 쪽으로 와 지승혁이 요리하는 걸 살폈다. 감자 깎는 걸 돕겠다고 집어 드는 손에서 도로 그것들을 빼낸 지승혁은 편하게 앉아 있으라며 조정현을 다시 거실로 돌려보냈다.
막 퇴원을 한 조정현을 위해 몸에 좋은 재료들을 많이 넣었다.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감자, 파프리카, 피망, 양파, 당근, 파, 뭔지 모를 초록 이파리들과 우유. 그리고 너무 매운 건 좋지 않을 테니 설탕까지 두세 스푼 넣었다.
TV를 틀어 놓고도 이쪽을 신경 쓰느라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연신 흘끔거리는 조정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완성된 모양은 제법 그럴싸했다. 지승혁은 먼저 조정현의 몫을 덜어 먹으라고 식탁에 차려 주었다. 잘 먹겠다고 인사한 조정현이 한 입 입에 넣은 직후부터 머뭇머뭇 지승혁의 눈치를 살폈다.
맛있냐는 질문에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제대로 잘 만든 모양이었다. 천천히 씹어 삼키는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이 접시에 음식을 가지고 와 마주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조정현이 안절부절못했다.
‘저어…… 형. 이거 그냥 제가 다 먹을, 앗. 드시면 안……!’
지승혁은 밥에 카레를 비벼 입에 넣었다.
‘……이걸 먹었어요?’
‘좀, 달긴 한데…… 괜찮아요.’
지승혁은 웃으며 말하는 조정현을 빤히 봤다. 그의 앞에 놓인 접시와 자신의 앞에 있던 접시를 들고 다시 냄비 앞으로 갔다.
조정현의 말대로 카레는 달았다.
문제는, 좀이 아니라 상당히, 매우, 어마어마하게 달았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나는 탄내와 뭉클한 식감까지 카레에 섞여 있었다. 지승혁은 카레만 덜어 냄비에 넣고 고춧가루를 찾아 안에 들이부었다. 너무 달아 문제니까 맵게 만들 수 있는 고춧가루를 넣으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한 행동이었다. 나무 주걱으로 내용물을 섞고 있는데 뒤에서 조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지금 뭐 하셨어요?’
‘네?’
‘그 안에, 지금…… 고춧가루를 얼마나 넣으신 거예요?’
상황을 빤히 봤을 텐데 묻는 조정현을 돌아보았다. 지승혁이 뭐라고 답하기 전 조정현이 다가와 냄비 안을 살폈다. 조정현의 표정이 서서히 굳는 걸 실시간으로 보던 지승혁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냄비 안의 카레 색은 시뻘건 색으로 바뀌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들고 있던 나무 주걱을 조용히 빼내 들었다.
‘요리는 제가 할게요.’
‘아…….’
웃는 조정현의 목소리는 뭐라 반박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엄격했다. 조정현은 난감한 기분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 있는 지승혁에게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형은 저쪽에 앉아 계세요.’
대놓고 쫓아내는 말에 지승혁은 뭐라고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현이 웃는 얼굴로 무슨 할 말이 있냐며 묻는 것에 더 이상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주방에서 나와야 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그리고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말 찍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체격도 작고 어렸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정현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쓰레기통으로 직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그 카레를 먹을 만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조정현이 지승혁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었다. 카레에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그 양이 문제였노라고 말이다. 자신의 행동을 좀 민망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한 그 목소리에 지승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정현이 요리를 하는데 상당히 엄격하다는 사실도 그날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전 일을 만회하기 위해 시판 스파게티 소스로 파스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또 의욕이 넘쳤던 게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소스만 부어 끝내는 건 성의가 없게 느껴진 지승혁은 굴소스를 넣어 보기로 결정했다. 요리를 하는 중에 맛을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굴소스의 감칠맛이 약한 것 같았다. 그래서 굴소스를 넣고 넣고 넣다 보니 어느새 4스푼을 첨가했고 그만한 양을 넣고 나서야 그나마 좀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완성된 파스타를 한 입 먹은 조정현은 아무 말 없이 따끈한 김을 내는 파스타가 담긴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조정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파스타 한 번, 지승혁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조정현의 반응에 지승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접시째로 도로 가지고 와 설탕 봉투를 잡았을 때였다.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조정현이 지승혁의 팔뚝을 지그시 잡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지승혁은 주방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렇게 정색을 하는 조정현을 볼 수 있을지는 몰랐고 또한 그 의외의 모습에 두근거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취향이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으나 평소와 다르게 엄격한 얼굴을 하는 조정현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설렜다.
지승혁의 시선이 옆에 앉은 조정현의 뺨이 고정되었다.
멍 자국은 처음보다 좀 많이 빠지긴 했으나 아직도 얼룩덜룩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깊은 상흔이 조정현의 머릿속에 자국을 낸 채 남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지낸 시간들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조정현은 그날 이후 집에서 잠에 제대로 들지 못했다. 밤에 끙끙거리기도 하며 몇 번이나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승혁은 가늘게 떠는 조정현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품에 안고 토닥여 주었다.
지승혁은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하는 조정현의 팔을 문지르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조정현의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오래지 않아 잠들었다.
알파 페로몬 역시 새벽에 잠을 설쳐 아침에 혼곤하게 잠들어 있는 틈을 타 흘려 보냈다. 저번에 병원에서 페로몬을 내보냈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걸 본 이후로는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워낙 지승혁이 은밀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페로몬에 노출되지 않아도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조정현을 그저 말없이 웃으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이 부족해서인지 조정현은 부쩍 멍해져 있을 때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