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51)화 (51/130)

#51

병실이 조용했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정현이 지승혁에게 가만히 손을 뻗자 그가 먼저 깍지를 껴 잡았다. 지승혁과 몸을 맞대고 있고 싶어졌는데 씻지 않은 몸이 신경 쓰였다. 몸에 기운이 좀 없긴 했지만 부축을 받거나 할 정도는 또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가볍게 샤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워까지가 무리라면 세수나 양치라도 말이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막 침대에서 내려서려고 했을 때 누군가 똑똑 노트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태준 형?”

“정현 씨. 괜찮아요? 대충 이 시간쯤 치료실에서 나올 거라는 얘기를 사장님한테 들어서 찾아왔는데 뭐 방해한 건 아니죠?”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병실 안으로 들어온 정태준의 손에 꽃다발이 있었다.

“난 화분을 하나 하고 싶었는데 그건 또 병문안 선물로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요.”

“아,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조정현이 받아들기 전 지승혁이 그 꽃다발을 대신 받았다. 정태준은 조정현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이구, 얼굴에 살 내린 것 좀 봐. 얼른 오고 싶었는데 어떤 분이 하도 뭘 시켜 가지고. 늦게 왔네요.”

“어, 아니에요. 바쁘신 중에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태준은 웃으면서 조정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여기는 방문객한테 뭐 먹을 거 안 줘요?”

“죄송해요. 지금 있는 게 없어서…….”

조정현이 당황하며 말하자 정태준은 손을 내저었다.

“정현 씨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저기 지 사장님한테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어조로 말을 했으나 듣고 있던 지승혁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할 말이 있으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해.”

“아……. 태준 형,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지승혁의 말에 조정현은 그제야 맥락을 파악하고 얼굴을 붉혔다. 정태준은 몸을 돌려 지승혁을 쳐다본 상태에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자리 좀 비켜 달라는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계속 있는 게 참 성격 좋으시네요?”

정태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실실 웃으면서 한 마디 한 마디 하는데 도리어 조정현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조정현에게 한 번 시선을 준 지승혁이 소리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제가 잠깐 다녀올게요. 근처에 자판기라도 있을 것 같은데.”

“환자가 어딜 나가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하는 조정현을 지승혁이 제지했다.

“그래요, 정현 씨. 난 정현 씨랑 얘기하려고 한 건데 본인이 나가면 어떡해요. 빨리 얼른 잘 나가세요.”

조정현을 가로막은 정태준이 지승혁에게 한마디 하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지승혁은 결국 병실 밖으로 나갔고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정태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저놈은 나가면서 눈으로 욕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표정을 밝게 하며 조정현을 쳐다봤다.

“몸은 좀 어때요? 어지럽거나 울렁거리진 않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좀 기운이 없는 것만 빼면요.”

“페로몬 쇼크까지 안 가서 다행이에요. 쇼크 온 다음은 정말 조, 오오억 힘들거든요. 페로몬 진정제도 못지않게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텼어요.”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정태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말하는 게 꼭 정태준도 경험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정태준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건가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쉽게 물어볼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메가라는 게 참 거지 같죠?”

정태준이 그런 조정현의 생각을 읽은 듯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조정현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누군가에게, 심지어 지승혁에게조차 말 못 할 거라고 여겼는데 생각도 않게 정태준이 나타났다. 아예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체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정태준의 시원시원한 태도가 조정현이 겪은 일이 별거 아니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게 무엇보다 고맙게 느껴졌다.

조정현을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에그. 예쁜 얼굴 울상 됐네.”

정태준이 휴지를 건넸다. 좀 민망해진 조정현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 안 예뻐요.”

“어어? 이건 그렇지 않다고 더 칭찬해 달라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구요. 정말 안, 안 예쁘니까요.”

“와……. 사람 기만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아니, 기만. 그런 게 아니구요.”

뭔가 더 말하려던 조정현은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고맙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근데 그게 오메가만 그런 건 아니에요.”

“네? ……어, 정말요?”

“알파들은 상대하기가 차라리 쉬워요. 죽기 살기로 페로몬 흘려보내면 저쪽도 똑같이 되니까. 페로몬 쇼크잖아요. 오메가 쇼크가 아니라. 문제는 베타인 경우인데…….”

말을 이어 가던 정태준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고 조정현 쪽으로 눈을 굴렸다. 모양 좋은 입술이 반원 모양으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으음. 뭐, 됐고. 지금 몸 상태 좀 안 좋은 건 금방 나을 거예요. 현기증 같은 거 좀 있죠. 멀미 나는 느낌도 있고.”

정태준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에게 더 숨길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 조정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준은 그런 조정현의 등을 토닥였다.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시간이 지나면 뭐든 괜찮아지죠. 진짜 뭐든. 물론 기분이야 좀 조……오오금 그렇겠지만.”

많은 내용이 함축된 말이었다. 조정현은 손에 쥔 휴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에 자극당해 이성을 잃고 아무 상대나 갈구하던 그 싫은 느낌도 옅어질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국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정태준은 그런 조정현의 어깨를 작게 토닥였다.

부드럽게 변한 분위기에 이끌린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준 형. 저어…… 혹시 뭐 알아보는 거 비용이 얼마일까요? 그, 흥신소 같은 거요.”

“흠?”

조정현의 어깨를 토닥이던 정태준의 손이 멈췄다. 조정현은 휴지를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입양 기록이나…… 그…….”

목 안쪽이 뻑뻑하게 막혀 왔다. 조정현은 입술을 한 번 깨물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정현이 말을 잇기 전 문이 열리며 지승혁이 돌아왔다.

“아이쿠. 오셨네. 그래도 1인실이라 면회가 되어서 다행이었죠. 정현 씨 얼굴 봤으니까 그럼 이만 가 봅니다. 정현 씨, 흥신소 말고 나한테 물어봐요. 내 전문이고 그런 데보다 신속 정확하니까. 처음은 무료로 해 줄게요. 전화번호는 알죠? 언제든 전화해요. 지 사장님 통해도 괜찮고.”

정태준은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살살 웃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조정현은 낭패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태준은 병실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정태준이 문을 완전히 닫기 전 문틈으로 조정현을 보며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조정현은 그제야 그가 일부러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당혹스러운 건 바뀌지 않았다.

지승혁은 닫힌 문 쪽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조정현을 돌아보았다.

“흥신소? 알아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 저. 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침대에서 내려온 조정현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어렵지 않게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다. 마치 풀숲에 머리를 숨기는 동물이 된 것 같았다.

물론 지승혁에게도 언젠가 말은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태준이 터트린 폭탄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급작스럽게 물꼬를 터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 건 몰라도 최초의 말문을 여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겪어야 할 일이다.

문을 닫고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조정현은 거울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정확하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이다.

“헤엑……?”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절로 입이 벌어졌다.

울긋불긋 단풍이라도 피운 것 같았다. 얼굴이 한쪽만 부어서 잘 주물러 만든 떡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흉측한 얼굴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그렇게 맞았는데 이런 걸 예상하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아픈 것도 억울한데 보기까지 안 좋아지다니 억울함이 배가 되었다.

똑똑.

“정현아. 무슨 일이야.”

문 너머로 지승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저 양치 좀 하고 나갈게요.”

다행히 세면도구는 있었는데 양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세수까지는 무리더라도 양치는 정말 간절했다. 칫솔에 치약을 짜고 조심스럽게 양치를 시작했다. 오랜만의 양치질이 개운하게 느껴졌다. 볼에 칫솔이 닿으면 좀 아프긴 했으나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뺨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양치를 마친 조정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바로 앞에 지승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현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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