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44)화 (44/130)

#44

평소처럼 직원들의 보고서를 받고 손이 빈 직원들에게 일을 분배하기 위해 서류철 몇 개를 들고 나섰다. 원래라면 서윤영이 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그가 없었기 때문에 지승혁이 직접 나섰다. 지승혁은 정해진 선을 넘으면 주의를 주긴 했으나 내가 어떻게 이런 일까지 하냐, 하는 권위의식은 없는 편이었다.

서윤영에게 사고가 나서 당분간 출근이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니 직원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승혁은 그들이 다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허성재 씨는 이쪽 채권을 좀 맡아 주십시오. 그리고…….”

지승혁은 이영선을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김선연 쪽을 바라보았다.

30대 중후반으로 입이 제법 무거운 자였다.

“김선연 씨는 내가 주소를 알려 줄 테니 이쪽으로 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김선연이 그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

지승혁은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 그에게 건넸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김선연에게 말했다.

“내 집 주소입니다.”

김선연이 고개를 휙 들었다. 지승혁은 그에게 카드키 하나를 건넸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만 계시면 됩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통과시키지 마시고요.”

“넵……!”

의욕이 왕성해진 모양이었다.

지승혁의 자택 주소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고 있는 일도 일이니만큼 매우 한정된 사람만이 아는 정보였고 집 앞의 경비를 맡긴다는 건 신뢰의 상징이기도 했다. 힘 있는 걸음으로 나가는 김선연의 등을 보던 지승혁은 잠시 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급한 업무를 본 후에 정태준이 말한 병원에 들러 봐야 할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서 서류들을 훑어보는데 전화가 왔다. 정태준이었다.

* * *

지승혁이 회사에 간 이후 조정현은 빈집에서 혼자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었다.

조정현은 밥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틀어 놓았다.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빈 공간을 채워 갔지만 손바닥만 한 작은 물건이 든 큼지막한 상자를 흔들어 덜그럭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 먹는 건 익숙했다. 단지 맛이 있어서 그 맛 때문에 먹는다기보다는 먹어야 하니 먹는다는 말이 알맞았다. 이상했다. 같은 음식을 지승혁과 함께 먹었을 때는 정말 맛있었는데. 조정현은 남은 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승혁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간다고 하는 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너무 그에게 어리광만 부리는 것 같아서 출근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지승혁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결과만 됐다. 작게 한숨을 쉰 조정현은 떠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밥이 식으면 더욱 맛이 없어진다. 부지런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정현은 화면에 비친 사람을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정현아! 정현이 안에 있지?

부모님이었다.

조정현은 제 눈이 의심스러웠다. 부모님이 이곳에 어떻게 오신 걸까. 자기가 이곳에 있는지는 어떻게 안 걸까.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그런 조정현의 고막에 다시 한번 어머니의 목소리가 와닿았다.

-정현아, 문 좀 열어 봐. 응? 잘 지냈니? 엄마한테 얼굴도 안 보여 줄 거야?

조정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그 말에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가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며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옷차림새도 전과 다르게 후줄근함이 느껴졌고 헤어지던 때와 비교해 안색이 조금 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현아, 아이그. 우리 아들.”

어머니가 와락 조정현을 안았다.

‘우리 아들’ 이라니. 그런 친밀한 호칭으로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격정적으로, 친근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어머니는 처음이었기에 내심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인터폰에서 봤을 때보다 직접 보니 그들이 초췌해진 걸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잘 세팅되어 있던 어머니의 머리는 길게 늘어져 있었고 품에서 나던 향수 냄새도 없었다. 그런 걸 뿌릴 여유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 조금 마음이 아파 왔다.

원금만 2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의 금액과 그들이 조정현에게 서류를 들려 지승혁에게 보냈던 일이 떠올랐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저릿했다. 아버지 역시 조정현의 등을 툭툭 쓰다듬었다.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거기에서 정이 느껴졌다.

“어,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우리 아들 데리러 왔지. 얼른, 얼른 가자.”

“네? 잠, 잠깐만요.”

조정현은 제 손을 잡아끄는 어머니의 말에 당황하며 다리로 버티고 섰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왜 나타났겠어. 지 사장에게 빚진 거 다 갚았다.”

“너 다시 데려가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돈을 모았는지 몰라, 정현아.”

조정현은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돈, 을 전부 다, 요?”

“그럼. 그렇지 않고서야 여길 어떻게 왔겠니. 너 그렇게 보내고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던지. 우리 원망 많이 했지, 우리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려 왔고 그걸 들은 조정현의 마음이 덜컹거렸다.

언제나 냉막하던 그들의 사이가 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확인을 받는 느낌은 조정현을 뒤흔들었다. 어머니의 말을 받아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지 사장도 돈 받으니까 미련 없이 너를 데려가라고 하더구나.”

“……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조정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조정현의 반응을 보며 어머니가 조정현의 팔을 문질렀다.

“우리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겠어. 다 지 사장이 허락해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얼른 가자. 여기 있는 물건들은 다 놔두고 가라더라. 그 돈에 환장한…… 아, 아니. 아무튼 서둘러, 아들.”

조정현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일순 부모님이 의심스러웠다.

조정현이 아는 지승혁은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분명히…….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마치 바다가 얼어붙는 것처럼, 조정현의 생각이 천천히 멈추었다.

‘정현 씨는 참 좋은 면만 보는 사람이네요.’

‘성의가 있는 점, 어려운 상황에서도 뭐라도 하려고 하는 점. 그리고 의외로 할 말은 하는 것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서는 점도 좋았어요. 세상일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점도 좋고.’

‘형아라고, 한 번만 더 불러 줘, 정현아.’

‘그랬어요? 좋네요. 이번 주 주중에 한번 갈까요?’

여태까지 지승혁이 다정하게 속삭였던 말들이 빙글빙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꽝꽝 얼어붙은 조정현의 머릿속에 지승혁을 처음 만났던 때가 덧씌워졌다.

‘내가 조정현 씨를 데리고 있으면 뭘 해 줄 겁니까? 나한테 해 줄 게 있습니까?’

“…….”

몸이 쑥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 지승혁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행동들, 그 말들, 그 눈빛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게 거짓일 리 없었다. 그래, 그 모든 게 거짓일 리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부모님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 그럴 거다. 그래야만 했다.

“아, 아뇨……. 그래도, 직, 직접 확인은 해 봐야…….”

약속을 했었다.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도장까지 찍었다.

그때였다.

“조정현 씨.”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찾아온 건 그들뿐이 아니었다.

열려 있던 현관문 틈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지승혁의 지시로 이 집 문 앞을 지키던 남자였다.

“사장님께서 모두 승인하신 일입니다.”

조정현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게 홉뜬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지승혁이 바로 통화를 누르자마자 속사포처럼 빠르게 정태준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지 사장님, 지금 이영선 사무실에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확인해 봐, 빨리.

전화를 끊은 지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영선은 자리에 없었다.

“이영선 씨 어디 있습니까.”

“아, 사장님.”

누군가 지승혁을 불렀다. 김선연이었다. 조금 전 지승혁이 자택 앞 경비를 지시 내렸던 사람이었다. 지승혁은 자신의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김선연이 언뜻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지승혁 앞으로 와 보고하듯 말했다.

“이영선 씨 30분 전에 사장님 댁으로 출발했습니다.”

“나는 김선연 씨에게 지시를 내린 거로 기억하는데요.”

갈무리할 틈도 없이 페로몬이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김선연은 베타지만 지승혁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낀 건지 안색을 바꾸며 바르게 서 있던 자세를 더욱 가다듬고 섰다.

“영선 씨가 대신 좀 바꿔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말입니다. 실수 좀 만회하고 싶다고 하도 그러는 바람에. 그러고 이전에도 한 번 맡아 본 적 있어서 그러라고 제가…….”

이걸 지금 말이라고.

지승혁의 턱이 꿈틀하자 말도 채 마치지 못한 김선연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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