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승혁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니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이제 됐다고 하려는 찰나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성의가 있는 점, 어려운 상황에서도 뭐라도 하려고 하는 점. 그리고 의외로 할 말은 하는 것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서는 점도 좋았어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좋고요. 세상일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점도 좋고.”
“……어…….”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칭찬의 말이 줄줄 이어졌다. 얼굴에 불이 날 것 같았다. 차라리 애정 확인 쪽이 더 건전할 것 같았다. 이건 인간적으로 내 장점이 뭔지 얘기해 달라고 조른 것 같았다.
심지어 과분한 칭찬이다.
괜히 말해서 본전도 찾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자신은 지승혁이 말하는 것같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지승혁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조정현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뭐 또 궁금한 거 있어요? 더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아, 아니. 아뇨, 아뇨. ……그으, 어, 음. 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쿵저러쿵 아니라고 말할수록 더욱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 결국 고맙다고 인사해 버렸다. 얼른 이 주제에 대해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 조정현의 반응이 귀여운 듯 지승혁이 미소 지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만한 일은 안 했어요. 괜찮아요. 원한다면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어요. 우리 정현이는 보기 드문 사람이라서요.”
“……제가요?”
“네에. 맞아요. 정현이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죠.”
자신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니. 대놓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닌 것 같았기에 더욱 민망했다. 조정현은 한 손으로 다른 쪽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요…….”
“정말이에요. 제가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우리 정현이 같은 사람은 처음인걸요.”
조정현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지승혁을 올려다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지승혁을 속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조정현이 아무리 아니라고 한다고 해도 지승혁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을 테고 아마 칭찬이 끝없이 이어질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조정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승혁은 페로몬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약간의 위안이 됐지만 어딘지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고 약간의 찜찜함이 남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조정현은 자신이 정말 묻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승혁에게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은 ‘제 어디가 좋으세요?’ 같은 물렁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모르는 채 있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슬그머니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소화되지 않은 무언가가 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승혁을 속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 넘어가도 지승혁은 괜찮다고 해 주지 않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승혁은 좋은 사람이었고 조정현은 그의 친절에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네? 어…… 그냥, 형 생각요……?”
멍하게 말하고 난 후에야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건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조정현이 뜨악한 얼굴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하려 할 때 지승혁이 그의 턱 아래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으로 살살 간질이듯 하는 행동에 조정현은 어깨를 조금 움츠러뜨렸다.
“내 생각을 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나랑 있을 때는 나랑 놀아 줘요. 머릿속 그놈은 몰아내고.”
‘머릿속 그놈’이라곤 해도 어차피 지승혁이다.
어차피 둘은 같은 사람인데 뭐가 다른 걸까 궁리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조정현이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자 지승혁이 대답을 재촉하듯 이마를 맞대곤 “네?” 하고 물어 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끄덕거리는 조정현의 답이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은 지승혁은 양치하자며 그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도넛처럼 생긴 칫솔 꽂이에 사이좋게 꽂힌 칫솔을 꺼내 거울로 서로를 보며 양치를 하는 시간은 묘하게 부끄럽고 행복했다. 쪽, 하고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서는 같은 치약 맛이 났다.
“내일은 병원에 갈까요.”
“병원요?”
“우리 정현이 페로몬 수치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조정현은 지금 전혀 몸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기에 돈 아깝게 굳이 별도의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지승혁은 완강했다.
“비싼 돈 들여서 검사를 왜 하는 것 같아요?”
“음, 아픈 데를 발견하려고요?”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원래 병원은 별문제 없다는 말을 들으려고 가는 거예요.”
희한한 논리다. 하지만 그런가, 하고 납득이 되는 것도 같았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이 웃었다. 착해요, 하는 말도 잊지 않으며.
함께 자리에 누워 지승혁의 품에 끌어안긴 조정현은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지승혁은 한 가지 틀렸다.
조정현은 솔직하지 않다.
솔직함의 기준이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하는 거라면 조정현은 그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에게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형이 저를 좋아하시는 건 혹시 페로몬 때문에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하는 대답이라도 돌아오면 어떡할까 싶어 무서워졌다. 이런 두려움은 처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점을 좋다고 해 주었는데. 나중에라도 지승혁이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아까 말할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조정현은 가만히 지승혁을 쳐다보다가 그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꽉 다물린 조정현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 * *
“……으?”
입가에 흐르는 침을 느끼며 조정현이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지승혁이 보였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준비를 마친 것처럼 지승혁은 빈틈 하나 없는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이 일어난 걸 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비친 지승혁은 오늘도 멋져 보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
조정현은 한발 늦게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헉. 출, 출근 안 늦으셨어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조정현의 반응이 우스운 듯 지승혁이 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애쓰던 조정현은 어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병원 때문에 기다리신 거예요? 깨우시지. 몇 시예요? 많이 늦으셨죠. 제가 빨리 준비할게요.”
“늦은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잠든 정현이 얼굴 보면서 지루한 줄 몰랐어요.”
지루한 줄도 모르게 잠버릇이 좋지 않았나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잠버릇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우선 빠르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정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지승혁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조정현은 지승혁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이전에 갔던 병원에 접수한 후 이전과 같이 채혈을 하고 검사 결과가 나올 동안 기다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몰랐는데 이제 보니 VIP 진료 구역이었다.
호명에 진료실로 들어가니 이전의 의사와 다른 사람이었다.
자리를 권하는 의사의 손짓에 지승혁은 조정현이 앉기 쉽게 의자를 빼 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려니 좀 쑥스러웠으나 작게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의사는 차트와 모니터를 번갈아 가며 본 후 입을 열었다.
“조정현 씨 되시나요? 편하게 앉으세요. 어디 보자…….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네요. 이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찾는 건 사실 드문데 아주 좋네요. 수치가…… 모두 다 정상 범주입니다. 별문제는 없겠습니다. 앞으로 이 상태만 유지하시면 되겠네요. 음, 그럴 일은 없으시겠지만 앞으로 4주 정도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되는 건 피하셔야 합니다. 아주 약한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다량의 페로몬은 피하세요. 자칫 안정된 페로몬이 또 흐트러질 수도 있어요.”
의사는 전날 지승혁과 이야기했던 대로 ‘별문제 없다’는 진단을 길게 늘인 말을 해 주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들은 뒤 알겠다고 대답한 조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승혁이 뒤에서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잡아 뒤로 빼 주었다. 지승혁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조정현은 그가 나가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금방 나갈 테니까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개인적으로 상담할 게 있어서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양해를 구했다. 조정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의사에게도 묵례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온 조정현은 대기실을 둘러보며 앉을 곳을 찾았다. 다행히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에 적당히 근처에 사람이 없는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지승혁이 뭘 상담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들려주기 싫은 것임이 분명했다. 조정현은 핸드폰을 꺼내 너튜브를 켰다. 어떤 알고리즘으로 떠오른 건지 모르겠지만 상단에 뜬 동영상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 상담소 알파와 오메가 페로몬 궁합 좀 봐 주세요 1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