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만 있던 자신이 배고픈 거면 일하고 돌아온 지승혁은 더욱 허기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드셔야 할 텐데, 어떡하죠?”
“정현 씨가 만들어 둔 게 있잖아요.”
“하지만 그거, 국물이 졸아서…… 아예 먹을 수도 없을 텐데요.”
조정현이 우울하게 대답하자 지승혁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서 있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음…… 미안해요.”
지승혁의 사과에 당황한 건 오히려 조정현 쪽이었다.
“네? 아니, 형아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구요. 탓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한 말이에요.”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조정현을 보던 지승혁이 진지한 얼굴을 한 채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나만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자기가 너무 예쁘게 굴어서 자제를 못 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정현 씨한테 원인이 있는 건데 뭐, 둘이서 함께 잘못했다고 치죠.”
“…….”
지승혁은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렸다.
태연자약한 중얼거림에 할 말을 잃은 조정현은 입술만 오물거렸다. 반박을 하지 않은 건 지승혁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조정현 역시도 그에게 자신의 페로몬 향이 묻어 있는 게 내심 보기 좋았다. 눈앞의 알파에게 자기 거라는 도장을 팍팍 찍어 놓은 기분이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한 조정현이 입을 열었다.
“형아, 밥. 밥 먹어요.”
“그럴까요? 잠시만 기다려요. 가지고 올게요.”
“네에.”
지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는 조정현의 대답을 들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지승혁의 손에는 나무로 된 트레이 테이블이 들려 있었다. 여러 가지 반찬들을 올려 두고도 흔들림 없이 내려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조정현이 작게 감탄했다.
“별거 아니에요. 어릴 때는 그릇 서른 개를 둔 상도 옮겼는걸요.”
“서른 개요? 그릇을요?”
“네. 어서 들어요.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지승혁이 수저를 들어 손에 쥐여 주었다.
“어, 국이네요……?”
테이블 위에는 좀 전에 졸아들어 국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거로 보였던 국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타지는 않아서요. 물 좀 많이 넣고 다시 끓였어요.”
“네에.”
국은 밍밍한 것 같기도 하고 살짝 탄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수저로 그릇을 휘휘 젓고 다시 한번 먹어 보았으나 역시 맛이 좀 애매했다. 국물을 한 입 떠 넣고 지승혁을 쳐다보니 그는 묵묵히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정현은 국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기로 했다.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는데 지승혁은 이번에도 매우 빠르게 먹었다. 속도를 따라가기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지승혁과 같이 밥을 먹는 건 좋았지만 속도까지 따라가는 건 힘들었다. 저렇게 빠르게 먹었다간 분명 소화불량에 걸릴 거라고 조정현은 생각했다.
조정현의 시선을 느낀 건지 지승혁이 밥을 뜨던 숟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곤 뭔가 생각난 듯 웃었다.
“내가 너무 빠르게 먹죠?”
“어, 아니…… 아뇨.”
“괜찮아요. 나도 알고 있는 거니까. 습관이라서 그래요.”
지승혁은 대수롭잖은 걸 이야기하듯 말했다.
“습관요?”
“빨리 안 먹으면 빈 그릇만 남았었거든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우리 자기 속도에 맞출게요.”
식사를 다시 시작한 지승혁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조정현의 속도에 맞추었다.
조정현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느라 평소보다 더욱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빨리 안 먹으면 왜 빈 그릇만 남는 건지, 그릇을 서른 개나 올린 상을 옮길 일이 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물 좀 마셔요.”
지승혁은 밥을 씹어 삼킨 조정현에게 물을 마시라며 권했다. 상당히 큰 컵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정현은 이렇게 물을 많이 마시면 물배로 다 차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마시자 그는 자신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깔끔하게 컵을 비운 조정현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한참 동안 마주 보며 식사를 한 두 사람은 마지막 따뜻한 차까지 함께 마셨다. 그리고 조정현이 식기들을 치우려 하자 지승혁이 막았다. 그러잖아도 힘들 텐데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하며 거절은 받지 않는다는 듯 조정현을 한 번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보호가 아닐까 싶어진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침대 밖에 나가려 했다. 두 발로 서려 했던 결심이 무색하게 조정현은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이전보다 그렇게 심하게 한 것도 아닌데 전신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짚이는 데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었기에 조정현을 얼굴을 물들이며 다시 침대에 올라앉았다.
밖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던 조정현은 이러다가 소가 되진 않을까 무서워졌다.
이런 느긋한 생활을 해도 되는 걸까.
별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에 익숙해지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조정현의 머릿속에 애써 덮어 놓으려고 했던, 제 처지에 대한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승혁은 자신과 사귀는 사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 부모가 그에게 빚을 지고 연락도 없다는 사실은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수십억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지승혁은 그에게 채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조정현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친절이라는 말로 그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한쪽만 기울어져 있는 관계였다. 오로지 조정현만이 이득을 얻는.
이렇게 취해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은 불안감은 한번 모습을 드러낸 후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체 지승혁은 자신의 어떤 걸 좋아하는 걸까.
심지어 우성도 아닌 열성 오메가일 뿐인데.
페로몬의 궁합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극우성 알파인 지승혁에게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얼마나 매력적일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딱히 짚이는 바도, 그럴싸한 이유도 댈 자신이 없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때 나오는 페로몬은 강력한 힘으로 알파를 유혹한다고 배웠다. 본능을 자극하는 향이고 어지간해서는 거부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지승혁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 건 그 조금 전 즈음부터였다. 그걸 생각한다면 페로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사귀는 사이로 관계가 재정립된 건 자신의 히트 사이클이 계기였다.
어리다고 하며 상냥하게 대해 줬으니까 그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역시 페로몬 작용 때문인 걸까.
“…….”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떻게 해도 페로몬을 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생각은 좌표를 잃은 배처럼 길을 잃고 흔들리기만 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지승혁의 목소리에 시트의 구겨진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던 조정현은 후다닥 고개를 들었다.
“아.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얼굴 보니까 그런 게 아닌데. 말해 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할 수 있죠?”
지승혁은 말 한 마디 지지 않았다.
“어……. 그냥, 형은 제 어디가 좋으신지…… 그냥 그런 생각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승혁은 솔직하게 말하는 조정현을 매우 귀엽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하고 나니 너무 감추는 것 없이 이야기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전에 한번 말해 줬는데 또 듣고 싶었어요?”
“네? 언제요?”
“정말 기억 안 나요? 전에 함께 저녁 먹었을 때 말했었는데.”
“……아.”
그가 말하자마자 바로 떠올랐다.
조정현의 기억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의 이런 점이 좋다고 하긴 했지만 어떤 점이 좋아서 이런 사이가 된 건지에 대한 답은 아닌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승혁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정현이 달콤한 말을 들으려 조르는 것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그저 단순히 지승혁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을 뿐인가. 그런 깨달음이 들었다.
유치한 순애의 발로였다.
지승혁의 마음은 이미 그가 조정현을 대하는 태도로 알 수 있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조정현은 그저 말로 확인받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페로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조정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끌린 거라고 말이다.
지승혁만큼 나이가 들면 일일이 말하는 것 없이 서로 알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지 않을 거다. 확인하려 하지 않고 능숙하게 마음을 갈무리했을 거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던 건 자신인데 실제로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다. 이래서야 지승혁이 어린애 취급을 한대도 어쩔 도리 없었다.
너무나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진 조정현이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어느 순간 지승혁이 조정현의 미간을 펼치듯 검지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놀란 조정현이 상체를 뒤로 물리며 한 손으로 지승혁이 만지작거리던 곳을 덮자 그가 웃었다.
“인상 쓸 정도로 신경 쓰였어요?”
“네? 아, 아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아니에요. 쓰, 쓸데없는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속내가 전부 까발려진 것 같아 더더욱 민망해졌다.
“그게 왜 쓸데없어요. 본인이 신경 쓰이는 일이면 그게 바로 중요한 일이죠. 잘 말해 줬어요. 그런 건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내가 우리 정현이를 좋아한 이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