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
일순 팽팽하던 긴장감을 끊은 건 조정현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괜한 걱정을 하는 거라는 조정현의 대답에 정태준은 일순 명치를 가격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허허롭게 웃은 정태준은 조정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곤 인사하며 떠났다.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조정현이 지승혁 쪽을 돌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뭐 할 말 있어요?”
“……두 분이서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음? 내가 의뢰했던 일 보고 차 들른 거예요.”
간단한 설명에도 조정현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아직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다가가 하얀 뺨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요.”
“태, 태준 형도 오메가인데요.”
꾸욱 모아놨던 걸 터트리듯 기세 좋게 말했다. 처음 지승혁은 조정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눈꺼풀을 한번 깜빡거릴 시간 동안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깨달았다.
정태준을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 지적할 때는 아니었다.
지승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요. 나랑 정태준?”
고개를 끄덕이는 조정현의 입술이 살짝 나왔다.
“질투했어요?”
“그! ……그러면 안 돼요?”
지승혁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꿋꿋하게 할 말은 다 했다.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조정현은 토달토달 말을 이었다.
“막, 벗은 몸도 보여주시고, 둘이서만 서재 들어가 계시고. ……문. 문도 꽉 닫으셨잖아요. 태준 형이랑 예전부터 알고 계시기도 했고, 그리고, ……그 형은 오메가시잖아요.”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친 모양이었다. 호흡이 가빠진 건지 어깨가 빠르게 들썩이고 보기 좋은 붉은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살살 피어오르는 페로몬이 조정현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보여주었다.
어리고 풋내 나고 귀여운 질투였다.
조정현이 말한 대로 정태준은 오메가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던 지승혁에게는 새삼스러운 지적이었다. 이건 지승혁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지승혁이 조정현을 끌어당기자 품에 답삭 안겨 왔다.
“태준 형이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을 제일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근데요, 형아.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시면 안 돼요?”
정태준은 지승혁을 콕 찍어, 지승혁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승혁은 귓등으로 흘려들은 이야기를 정작 해당 사항이 없는 조정현이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원래 눈치 좀 보라고 티를 내며 휘두른 말에 당사자 대신 다른 사람이 눈치를 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뭘 어떤 걸 하지 말까요.”
어르는 목소리로 묻자 조정현은 망설임을 담아 말했다.
“몸, 몸 보여주시는 거나, 단둘이 밀폐된 곳에 들어가 계신다거나. 그런 거요.”
쪽. 쪽.
지승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정현의 뺨과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럽고 여린 살에 입을 맞추자 조정현이 입을 맞추기 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어리숙한 몸짓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알겠어요. 그리고요? 또 뭐 없어요?”
“……너무 멋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저한테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요.”
“멋져요? 내가?”
“섹, 섹시하시기까지 하시잖아요.”
몸도 좋으시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직접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제법 오랜만이었다.
돌려 말하거나 꼬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감정을 부딪쳐오는 순수함이 눈부셨다.
조정현의 팔이 지승혁의 등에 둘러졌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하얀 뺨은 실제로 만져보니 따끈했다.
“미안해요. 설마 정태준을 신경 쓸지는 몰랐어요. 나한테 오메가는 우리 정현이뿐이라.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조정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뾰족하게 튀어나왔던 입술도 이제는 원래 모양대로 돌아가 있었다.
“아까 태준 형이 도둑놈이라고 하셨는데……. 다음에 만나게 되면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도둑놈은 형이 아니라 저라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지승혁이 의아한 얼굴로 조정현을 보았다. 조정현은 귓불까지 발그레해져 있었다.
“제가 형 졸라서 그런 거니까, 정확하게 따지면 제가 도둑놈이죠.”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하는 줄은 알고나 있을까. 품 안의 어린 오메가를 끌어안은 지승혁이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풋풋하고 달짝지근한 페로몬 향을 폐 속 깊이 들이마셨다.
정태준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집까지 찾아온 건 아닐 터였다.
하는 일이 점잖지 못한 거였으니 실제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도 여럿이었다. 마지막 발악으로 폭력배를 고용한 채무자도 있었다. 실제로 칼에 찔려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정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하러 일부러 지승혁을 찾진 않았다.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정도였다면 그냥 전화로 흘리듯이 두어 마디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찾아와서 경고를 해주었다.
[농담이 아니고, 너 저번에 받았던 그 제안, 승낙해야 할 것 같아.]
정태준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위협의 크기와 심각함이 어느 정도인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형아?”
조정현이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거렸다.
“우리 정현이랑 오래 살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어.”
지승혁은 그동안 계속 미뤄 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진창에서 구르고 굴러 백 마디 겉치레보다 하나의 실리를 챙기던 지승혁이 마다했던 일. 그 일을 처리할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승혁은 하루 내도록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조정현의 옆을 지켰다.
함께 식사하고 티비를 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느긋하게 몸을 붙이고 있는 일은 굉장히 평범했지만 그렇기에 의미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런 생활을 매일매일 영위하는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달랐다. 지승혁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잘 시간이 되어 자신의 방으로 가려는 조정현을 의아하게 여기며 붙잡았다.
“어디 가요?”
“네? 제 방이요. 이제 자려구요.”
“왜 그 방으로 가요. 나랑 같이 자야지.”
지승혁의 말에 조정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었다.
“같이 자도 돼요?”
“그럼요. 아니면 각 방 쓰려고 했어요?”
“각 방…….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도 안 해봐서요. 정말요? 같이 자도 되는 거예요?”
“애인인데 같이 자야죠.”
지승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조정현은 입술을 말아 물었으나 둥그렇게 솟는 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조정현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좋은 걸 좋다고 솔직히 표현하는 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은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하려 하지 않는 일이다. 또한 상대를 믿고 신뢰하기에 하는 행동이다.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다.
조정현의 그런 점이 좋았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는 조정현은 지승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웃었다. 쉼 없이 시트를 조물거리며 구기는 손가락을 한번 보곤 지승혁이 질문했다.
“침대가 좀 좁아요?”
“네? 아닌데요? 엄청 넓은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구석에 있어요, 자기야.”
조정현은 그제야 자기가 침대의 구석에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꼭꼭 깨물다가 응차, 응차 하면서 지승혁 쪽으로 몸을 붙여왔다. 지승혁이 그런 조정현을 끌어당겨 품에 안자 그가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빈틈없이 밀착된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따끈한 체온이 매우 기분 좋았다.
지승혁이 조정현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자 그도 마찬가지로 지승혁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아무런 사심 없이 눈을 감는 품 안의 어린 연인을 내려다보며 지승혁은 다시 한번 자신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지승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느릿하게 조정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 * *
곤히 잠든 조정현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친 지승혁은 나가기 전 가만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이라도 느낀 건지 조정현이 잠에서 설깨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끔뻑거렸다.
“자는 것만 좀 보려고 가려 했는데 일어났어요?”
“아니에요. ……흠, 형 출근하세요?”
조정현은 막 자고 일어나서 잠긴 목으로 기침을 한번 한 후 물었다.
“다녀올게요. 좀 더 누워 자요.”
“아니, 하지만……. 아.”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하는 조정현의 눈가에 키스하며 페로몬을 흘렸다. 알파의 페로몬에 안정을 찾은 조정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곧 잠에 빠져들었다. 지승혁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조정현을 내려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을 기다리는 검은 차체에 몸을 실은 지승혁에게 김성채가 리어뷰 미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김 실장님, 주소 불러 드릴 테니 이쪽으로 갑시다.”
지승혁은 그에게 주소 하나를 읊어주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김성채가 출발하겠다고 했고 지승혁은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도착한 곳은 대 저택이었다.
서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 호젓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지승혁이 들어가려고 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맞이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남자는 거절은 듣지 못한 듯 빈틈 하나 없이,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깍듯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