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조정현은 몸을 주춤거리며 뒤로 뺐다. 지승혁은 혹시 모르니까, 라는 말을 덧붙이는 조정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하. 이거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애 데려다가 나쁜 짓 한 것 같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조정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깨달은 지승혁이 미소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지승혁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도리어 조정현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뇨, 하지만…….”
“키스 마크예요.”
“네?”
이어진 말에 조정현은 눈을 크게 떴다.
조정현이 어디 산속에 살다 온 것도 아니고 키스 마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이런 모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입, 입술 모양이 아니네요?”
“입술? 아…… 그건 립스틱 자국이라고 하죠. 보통 키스 마크란 건 입으로 빨아서 생긴 자국이니까요.”
친절한 설명을 듣던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뒤늦게 가슴 근처에 잇자국이 난 걸 발견했다. 조정현이 한 곳을 가만히 쳐다보는 걸 의아하게 생각한 지승혁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뭘 보고 있던 건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마른 손바닥으로 그 부분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좀 흥분했었어요. 안 아파요?”
“……네에. 아프진 않아요.”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정현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가끔 만들곤 했는데 그걸 키스 마크라고 하는 줄은 몰랐어요.”
“가끔 만들어?”
조정현의 피부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춘 지승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가요.”
“네? 어, 여기 팔 안쪽에요. 어릴 때 제가 한번 빨아봤더니 살이 빨개지는 게 재미있어서 좀 세게 빨았더니 며칠 동안 사라지질 않더라구요. 그 이후로도 몇 번 하긴 했는데 나중에야 그게 피부 안쪽에서 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거라고 알게 됐거든요. 근데 그걸 키스 마크라고 하는 구나, 싶어서……. 형……?”
지승혁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는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조정현의 몸을 말없이 닦기 시작했다.
땀이 났던 목, 가슴과 납작한 배.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 처음 겪어보는 일에 너무 민망해진 조정현이 버둥거렸으나 밀어낼 힘도 없었기에 결국 그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세심한 손길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이전에 사귀던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해줬던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지승혁이 알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성의껏 몸을 닦아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
이제 와서 과거를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심술이 났다. 지승혁에게 이런 일을 받았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전 연인들에 대한 질투심이 들끓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어린애처럼 구는 것 같았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건데 자신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지승혁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싶었다.
심지어 그동안 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던 건 본인 아닌가.
타는 속을 애써 억누르던 조정현은 지승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작게 웃었다.
잠깐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운 지승혁의 손에 빵과 샐러드를 담은 트레이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조정현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나, 나가서 먹을게요. 침대에서 먹으면 안 돼요.”
“내가 뭐라고 할까 봐 그래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정현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하지만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침대 위에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면 안 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심지어 자신이 쓰는 침대도 아니고 지승혁이 쓰는 침대에서 그러기는 싫었다.
지승혁이 된다고 해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일, 일어날 수 있어요. 나가서 먹으면 돼요.”
허리에는 시트 하나를 잘 두른 채 끙끙거리면서 일어난 조정현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고작 두어 걸음 뗐는데 허벅지 사이가 잘 다물어지지 않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어기적거리는 조정현의 입에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보다 못한 지승혁이 들고 있던 트레이를 근처 협탁에 내려놓고 재빨리 조정현을 양팔로 안아 들어 옮겨주었다. 이런 상황도 상당히 민망했으나 거절하기엔 집이 너무 넓었다. 사실 걸어가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참인데다 지승혁도 태연하게 “일어나는 거 도와달라면서요.”하고 말하기도 했기에 모르는 척 몸을 맡겼다.
조정현은 식탁 의자에 앉아 지승혁이 차려다 준 아침을 얌전히 먹었다. 잔에 가득 담겨있던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조정현이 지승혁의 눈치를 살폈다.
이전에 사귀던 사람들과 호칭은 어떻게 했을까. 그냥 형이라고만 부르는 건 어쩐지 밍밍한 느낌이었다. 좀 더 연인 같은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근데, ……자기……?”
조정현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지승혁이 그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반응에 조정현도 입을 다물었다.
“정현 씨 사람 놀라게 하는 게 특기예요?”
지승혁이 나직이 웃자 조정현이 어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아뇨. 그…… 생각해봤는데, 저희 애인이니까……. 그래서요. ……키스하고 잠자면 애인이잖아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대답이 없는 지승혁의 반응이 몹시 신경 쓰이는 듯 계속 흘끔거렸다.
“……아니에요?”
지승혁에게서는 아직도 답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조정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태도가 답의 하나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어진 조정현의 손끝에서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 저희 그냥 잠, 잠만 자는 사이예요?”
목소리마저 떨려왔다.
결국 지승혁의 입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까지 내면서 웃음을 터트린 지승혁은 고개까지 내저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인터넷에서 보긴 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정말 애 취급을 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지승혁도 딱히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물어본 건 아닌 듯했다.
“맞아요.”
“네? 뭐가요? 저희 잠만 자는 사이라구요?”
조정현은 눈을 크게 뜨고 물어보았다. 여기에서 긍정을 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대답하지 말라고 떼를 써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승혁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조정현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정말 자신의 질문에 긍정을 하면 어쩌지 싶은 거다. 실제로 1초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체감상으로는 몇 분이 걸리는 듯했다.
“아니, 애인이라구요.”
“……아……. ……형?”
당황한 조정현은 어느새 다시 지승혁의 호칭을 형이라고 바꿔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지승혁이 엄지로 조정현의 입술을 문지른 후 제 혀로 날름 핥았다.
“참 달아요.”
“네? 이거 드레싱 오리엔탈 소스 같은데요.”
조정현은 샐러드가 담긴 볼을 흘끔거렸다. 달짝지근한 맛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싶어 샐러드에 있던 갈색 소스를 포크로 살짝 찍어 맛보았다. 이걸 달다고 하는 건가. 몰랐는데 지승혁의 미각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른 건가. 그래서 그동안 자신의 음식을 맛있다고 했던 건가 싶어 갖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달다고, 정현아.”
“…….”
조정현은 할 말을 잃고 제게 다가오는 지승혁을 올려다보았다. 지승혁은 자신의 팔 사이에 조정현을 가두고 허리를 숙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낮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직접 먹으니까 더 달아.”
픽, 입으로 웃으며 하는 말에 조정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리엔탈 드레싱이 맞는데. 이게 달다고?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조차 모르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쪽으로 의식하는 건 자신이 밝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것 같아졌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뺨에 가볍게 뽀뽀했다.
“아까 몸을 닦아주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씻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아, 네.”
확실히 물수건만으로 닦고 끝내는 건 좀 개운하지 않았다.
조정현은 멋쩍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지승혁이 다시 한번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예고 없이 일어난 일에 놀라서 어, 하는 소리를 낸 조정현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너무 말랐어요.”
“제가요? 그냥,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나랑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그 말을 들은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말일 수도 있었으나 조정현에게는 꽤나 별거였다. 앞으로. 기분 좋은 울림을 입안에서 되뇌었다. 미래를 말하는 것에 조정현은 좋아서 입술을 실룩이며 웃었다.
* * *
욕실에 들어간 지승혁은 따뜻한 물을 조정현의 몸에 뿌렸다.
같이 씻자는 말에 금세 얼굴이 빨개지던 조정현이었으나 거듭된 제안에 곧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따뜻한 물이 기분 좋아 한숨을 흘리는 조정현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 자신이 만든 키스 마크가 울긋불긋 하얀 피부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씻자고 데리고 오긴 했지만 정말 씻는 것만 생각하고 온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상대는 키스 마크조차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