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언제 오셨어요. 깜빡 잠들었나 봐요.”
“기다렸어요? 내가 너무 늦었네요.”
“어, 아니에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말하고 나서 제 말이 좀 우스운지 조정현이 멋쩍게 웃었다. 졸음이 묻어나는 눈을 보며 지승혁이 방에서 자라고 권하려 했을 때였다.
꼬르르르륵.
조정현의 배에서 기세 좋게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얼굴로 배를 감싼 조정현이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아하하. 왜 이러지. 저 그러면 들어가서 잘게요.”
“배고파요?”
“네? 아뇨. 아니에요.”
또 한 번의 꼬르륵 소리. 이번엔 조금 전보다 크게 났다. 마치 배가 안 고프다고 한 조정현의 대답에 격렬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았다.
“저녁 안 먹었어요?”
지승혁의 질문에 조정현은 아니라고 하는 걸 포기한 모양이었다.
“……네에.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그랬거든요. 근데 진짜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고. 그냥 자면 돼요.”
“기다렸어요?”
여상한 질문에 조정현이 입술을 뗐다가 곧 다시 다물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조정현의 뺨이 붉어졌다. 확실히 피부가 하얘서 눈에 잘 띄었다.
“아니요, 그, 부담 드리려던 건 아니고요. 저,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으니까요. 혹시 형이 안 드시고 오셨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냥…….”
급기야 조정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이쯤 되니 조금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사과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불평은커녕 부담을 줬다고 도리어 미안하다고 하는 조정현은 여태껏 지승혁의 주변에는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뺨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손가락에 닿는 뺨의 감촉이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말랑하고 따끈하고 폭신했다. 순간 얼어버린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은 아쉽게 손을 떼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뚜껑을 열자 안쪽에 맺혀있던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뭐 만들었어요? 갈비찜이네. 이걸 만들었어요?”
냄비 뚜껑을 열어본 지승혁은 감탄했다.
감자와 당근이 들어간 갈비찜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달큰하고 짭짤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갈비찜을 할 줄 아는 스무 살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진 않았다. 당장 지승혁도 갈비찜은커녕 안에 들어간 감자 손질을 할 줄 몰랐다.
지승혁의 말에 뒤늦게 반응한 조정현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냥 고기 사다가 파는 양념만 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아마 형도 잘하실 거예요.”
말은 쉽게 하고 있지만 문제는 할 줄은 알아도 정작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 조정현은 그 적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게 얼마나 수고스러운지 지승혁은 모르지 않았다.
“맛있겠네요. 야식이라고 하긴 뭐한데 좀 먹을까요? 너무 늦었으니까 가볍게 한두 숟갈만. 너무 맛있게 생겨서 나도 출출해졌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오늘 저녁은 거른 상태였으니 말이다.
원래라면 챙겨 먹기 귀찮아서 씻고 바로 누웠을 지승혁이었지만 조정현이 만든 갈비찜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당겼다. 지승혁이 하는 말을 들은 조정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레인지로 다가와서 음식을 데우려는 조정현을 제지했다.
“이거 만들었잖아요. 데우는 건 내가 할게요. 앉아있어요.”
“아니, 괜찮은데요.”
“그냥 데우면 되는 거죠?”
“……네에. 어어, 센 불에 하시면 타요. 약 불로요.”
조정현의 말에 따라 불 세기를 조절했다. 지승혁은 이런 나무 주걱이 있었나, 새삼스러워하며 냄비를 뒤적였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고기 살들이 서로 분리가 되거나 감자가 쪼개지기도 했지만 모르는 척 적당히 섞어놓았다. 음식을 알맞게 데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끈한 김이 나는 갈비찜과 사 온 반찬 몇 가지를 꺼내니 그럴싸한 식탁 차림이 되었다.
아주 늦은 저녁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먹기 시작했다.
갈비찜의 고기는 야들야들했고 간이 적절히 잘 배어있었다. 끝 맛이 살짝 매콤해서 지승혁의 입맛에 잘 맞았다.
“맛있네요. 살짝 매워서 좋아요.”
“아, 정말요. 다행이에요. 사실은 그냥 파는 양념만 넣고 한 건 아니고 다진 마늘이랑 생강 같은 건 더 넣었거든요. 어, 청양고추 좀 넣었는데 괜찮으세요?”
“그랬군요. 솜씨 좋네요.”
이전에 조정현이 생강이 싫다고 했던 게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났다. 이런 데 넣는 건 또 싫지 않은 모양이지.
신이 나서 떠들던 조정현은 시선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이 매우 보기 좋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니 조금 밖에 먹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수저를 내려놓은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정현이 되물었다.
“밥을 맛있게 만들어 준 거 보답하고 싶어서 그래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조정현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지승혁은 가만히 그런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니, 괜찮은데요.”하다가 “없는데…….”하고 작게 중얼거리던 조정현은 지승혁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조정현은 그러면, 하고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다음에도 밥 같이 먹어주시면 좋겠어요.”
지승혁은 잠시 조정현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정현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조정현의 얼굴에 봄이 온 것처럼 발긋하게 꽃이 피었다.
“노리고 그래요?”
“네? 뭘 노려요? 네?”
적잖이 당황하는 얼굴이 재미있었다.
지승혁은 한 번 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보면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을 할 게 분명했다.
지승혁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정현 씨는 욕심이 없네요.”
여태까지 이런 일이 없던 건 아니었다. 지승혁이 무언가를 사줄까 물어보면 보이는 반응 대부분은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고가의 물건을 말하거나, 혹은 아주 드물게 그런 물질적인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안색을 굳히는 것이었다.
물론 조정현 같은 반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은 그 후에 더 큰 한 방을 노렸다. 적어도 지승혁이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그들을 탓하는 건 아니다. 지승혁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응당 그렇게 했을 거다. 사람이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그냥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주어진 기회를 일부러 놓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러나 조정현에게서 그런 계산적인 면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온전히 조정현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조정현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아닌데요. 욕심 많은데. 저 욕심 많아요. 완전.”
“그랬어요?”
웃으며 돌려준 말에 조정현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웅얼거렸다.
“노, 놀리지 마세요.”
살짝 원망이 섞인 목소리는 그러나 위압을 주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근데요, 미안하셔서 그러시는 거면 괜찮아요. 바쁘셔서 이 시간에 들어오신 거잖아요. 약속을 한 것도 아니구요. 그러니까 진짜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기다렸던 거고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대로 사과를 안 했네요.”
“예?”
지승혁은 조정현을 보는 상태 그대로 턱을 괴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잠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던 조정현이 웃었다. 사르르, 표정이 녹는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 걸까. 지승혁은 이상한 기분이 됐다. 지그시 보는 시선에 결국 웃던 조정현이 “아, 아니에요.” 하고 말하며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좀 아쉬워졌다. 웃는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조정현이 눈을 깜박거리자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리를 피하려 하는 것처럼 조정현이 빈 그릇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지승혁이 그런 그를 막았다.
의아함을 담은 큰 눈이 지승혁에게 향했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자신 쪽을 쳐다보았다.
“밥 먹어놓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만드느라 수고했어요. 들어가서 쉬어요.”
이어진 말에 조정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어요.”
수줍게 웃는 뺨에 동그랗게 산이 솟았다.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뺨을 문지르던 조정현은 양손을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맛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게 아닌데 지금 이 반응은 마치 처음 듣는 사람 같았다.
“맛있으셨다니 기뻐요.”
조정현은 어깨를 살짝씩 흔들며 말했다. 사이즈가 큰 옷이 마른 몸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푹 파진 네크라인으로 보이는 쇄골이 조정현처럼 여려 보였다.
“또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만들기 어려운 거면 어쩌려고 그래요.”
“요새 너튜브 찾아보면 만드는 법은 다 나와요.”
웃으며 말하는 조정현을 응시하던 지승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뒤에 서서 그가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다른 때라면 성가셨을 테지만 조정현의 목소리가 워낙 부드러웠기 때문일까. 지승혁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소리를 좀 더 듣고 싶어 설거지하는 손을 조금 더 느릿하게 움직였다.
* * *
조정현은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연예인들이 나와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정현의 시선은 멍하게 티비를 향해있었지만 그걸 보고 있지는 않았다.
한쪽 뺨을 만지작거리며 아침에 있던 일을 몇 번째 상기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