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정태준이 ‘조정현을 닮은 귀여운 페로몬’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조금 틀렸다. 조정현의 페로몬은 귀여운 게 아니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의 페로몬은 달짝지근하지만 끈적거리지는 않는 향이었다. 꽃 향이라기엔 좀 더 가벼웠고 풀 향이라기엔 좀 더 단,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향에 지승혁은 정신을 쏙 빼앗겼다.
그 풋풋하고 달콤한 페로몬을 내는 오메가를 제 걸로 하고 싶은 극우성알파의 본능을 참기가 어려웠다.
지승혁은 살아오면서 러트를 여러 번 거쳤고 그중에는 극 우성 오메가도, 페로몬 향으로 유명한 오메가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기진 사람처럼 상대의 페로몬을 들이키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조정현의 페로몬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지승혁은 탐욕스럽지는 않지만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멍청하게 앉아서 눈앞에 있는 오메가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결국, 친절을 가장한 채 집에 들이는 것도 성공했다. 단지 조정현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가까스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지승혁은 정태준이 저와 똑같은 짓을 해 조정현의 페로몬을 맡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 조정현의 페로몬을 맡았다는 걸 떠올리니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정태준이 오메가였기에 다행이었다. 만일 알파였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지승혁 역시 장담치 못했다.
그런 지승혁의 상태는 알지 못한 채 조정현은 시계를 확인한 후 이만 자러 들어간다는 인사를 했다. 잘 자라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지승혁은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보고 전화를 받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 부분은 실장님께서 제안하신 대로 결정하죠. 네. 내일 보겠습니다.”
지승혁은 최대한 간단하게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지승혁의 손가락이 탁자를 천천히 두드렸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조정현은 치킨을 시켰다고 했을 때 썩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입맛이 고급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배달 음식이 너무 질려서 그런 거였다. 국민 야식이라고 불리는 치킨이 질리다니. 대체 어느 정도로 많이 먹었길래.
지승혁도 비슷한 이유로 가리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라면이다. 어릴 적, 매끼 라면만 먹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라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뿐인가. 냄새를 맡는 것조차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과 조정현의 모습이 겹쳐졌다.
책상의 한쪽 모서리를 노려보던 지승혁은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움직였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승혁은 망설임 없이 움직여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화면에 정태준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바쁜가.”
-아니, 하아……. 그건 아닌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지승혁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창 중에 전화했나 보군.”
-알면 워라밸 좀 지켜주시지, 지 사장님.
“빠르게 용건만 말하지. 조정현을 조사 해줬으면 좋겠어.”
정태준에게서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내 기억이 나쁜 게 아니라면 바로 어제 새벽에 조사한 걸 가져다 드린 것 같은데……?
“눈치가 많이 없어졌군.”
-…….
정태준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건 특별 수당 받아야 하는 거라, 금액은 아시죠?
“그럼 내일 저녁까지 부탁하지.”
-……저녁요. 예, 예. 입금만 해주시면 불가능을 가능케 할게요.
넉살 좋게 말하는 정태준의 의뢰 승낙을 들은 지승혁은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 후로 마무리가 덜 된 사항들을 확인하기 위해 서류를 들여다보던 지승혁이 자리에 누운 건 한참 후였다.
알림 소리에 눈을 뜬 지승혁은 평소처럼 준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조심히 한다고 했는데 깨운 걸까. 조정현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뒷머리가 붕붕 떠 있는 게 귀여워 보였다. 잠버릇이라도 따로 있는 걸까. 얌전하게 잘 것 같은데 그런 점이 또 의외였다.
“받아요.”
조정현은 지승혁이 내민 걸 쳐다보았다. 막 잠에서 깼기 때문인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지승혁이 들고 있는 걸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게 뭔지 알게 된 순간 조정현이 화들짝 놀랐다.
“어. 카드, 카드 안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재료 필요할 텐데 다녀와요. 너무 많이 사서 들고 오기 힘들면 전화하고요.”
받으라는 듯 카드를 건네자 조정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조정현 씨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서 그래요.”
칭찬을 하자 하얀 얼굴이 알기 쉽게 붉어졌다. 마치 꽃물을 들인 것 같았다.
조정현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들었다.
“저어, 오늘은 몇 시쯤 들어오세요?”
“한 7시쯤 될 것 같아요.”
대답을 들은 조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지승혁의 출근 시간은 일반인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굳이 배웅하지 않아도 될 텐데 조정현은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누군가의 배웅을 받는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어 새삼스러웠다. 굳이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잘 다녀오세요.”
“갔다 올게요.”
인사를 주고받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림.
어제에도 저녁을 만들던 조정현이 지승혁에게 씻고 나오라고 하는 했을 때 웃음이 났다. 대화 자체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대화를 하며 속이 근질거린다는 데에 있었다.
상당히 낯간지러웠다.
마치 신혼부부의 대화 같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수롭지 않고 평화로운 인사를 주고받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미지근한 온기에 몸을 담그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집에 돌아가서 조정현과 그런 대화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썩거렸다. 지승혁은 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이영선을 불렀다.
호출했으면서도 아무 말도 시키지 않고 세워두기만 하자 이영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눈치가 좋은 편이니 아마 지승혁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승혁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이영선은 조금 전보다 당황한 기색이 줄어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가만히 선 이영선은 지승혁이 말을 할 때까지 교육이 잘된 개처럼 기다렸다.
다른 직원들이 보고서를 들고 몇 번이나 출입할 때에도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흘끔흘끔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말이다.
찰칵. 직원 하나가 나가며 문을 닫자마자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이영선 씨에게 사과 듣자고 이러는 걸로 보이나 봅니다.”
지승혁은 보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를 적당히 구슬려 속일 수 있는 병신 정도로 생각했습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닙니다, 사장님……!”
가만히 듣던 이영선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승혁이 시선을 올려 그런 이영선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찔끔하며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냥 넘어가는 건 이번 한 번만입니다.”
경고를 하듯, 나직이 내뱉는 지승혁의 목소리에 이영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말에 이영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묵례 후 자리를 떠났다.
굳이 이영선에게 모멸에 가까운 대우를 한 건 그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단순히 조정현을 채무자 취급을 한 것만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었다. 이영선은 제 잘못을 덮으며 지승혁을 속이려 했다.
한번 쉬운 상대로 보이게 되면 그 뒤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기 전에 싹을 자르는 게 좋았다. 제 머리 위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말귀가 어두운 편은 아니니 조정현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다. 지승혁은 차례차례 일을 마무리 지으며 귀가할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일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터졌다.
겁도 없이 야반도주를 감행한 채무자 문제를 수습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한밤중이라는 말도 정중했다. 새벽 2시에 가까웠다.
이렇게까지 늦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일이 급박해 중간에 연락할 짬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자정이 넘어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정현이 귀가 시간을 물어봤던 게 떠올랐다.
핸드폰을 보니 마트에서 사용한 카드 금액이 문자로 와 있었다.
지금 시간이면 자고 있을 텐데.
지승혁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집 안의 불이 켜져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식탁이 있는 쪽이 전등이.
지승혁의 눈에 식탁에 엎드린 조정현이 들어왔다.
동그란 등이 매우 작게 느껴졌다.
지승혁이 시간에 맞추어 들어왔을 때 차리기 위해 준비를 해둔 건지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레인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냄비가 보였다. 뭘 만든 건지는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승혁은 가만히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엎드려 있어서일까. 도드라진 쇄골과 마른 어깨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승혁은 조심스럽게 조정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조정현 씨……?”
“……으, 으응.”
조정현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눈가에 그늘이 생길 만큼 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렸고 그다음 순간 경계심이 전혀 없는 멍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 형이네.”
무방비한 중얼거림이 무심코 웃음이 날 만큼 귀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