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그런데 나가려다가 제지당해서 기분 상하진 않았어요?
물어보는 질문에 조정현은 그가 남자에게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자신이 남자에게 보인 반응 그대로 전해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네? 아. 그거…… 네. 괜찮아요. 그분이 하시는 일이니까.”
복잡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만큼 태연했다.
-조정현 씨는 이해심이 넓네요.
생각도 못 한 칭찬을 듣는 바람에 조정현은 당황했다. 어물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와중 전화기 너머로 지승혁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재미있는 거 하고 있어요?
의외의 질문에 조정현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아닌데요, 하는 답이 끝나자마자 수화기 너머의 지승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요? 빨리 통화 끊으려고 하는 것 같길래.
“네? 엇. 아, 아뇨. 그게 아니고…… 저야, 저는 계속 통화하고 싶죠. 근데 바쁘신 것 같아서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던 조정현은 지승혁이 낮게 웃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장난을 쳤다는 걸 깨달았다. 조정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지승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승혁이 작게 혀를 찼다.
-그래요, 그럼. 이따 봐요.
“네에.”
조정현이 대답을 들은 지승혁이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 긴 통화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살짝 얼이 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잠깐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기운이 좀 났다.
* * *
지승혁은 자신을 부른 직원을 앉은 상태로 눈만 들어 올려 쳐다보았다. 직원의 안색이 굳었다.
“무슨 일이야.”
“확인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지승혁은 대답 대신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내려놓고 가보라는 뜻이었다. 직원도 그런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조심스럽지만 각이 잡힌 움직임으로 서류 몇 장을 내려놓았다.
알았으니 가보라고 짧게 말한 그는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몇 문장을 눈으로 훑으며 읽던 지승혁의 머릿속에 몇 시간 전 받은 보고가 떠올랐다.
보고를 올린 건 문 앞에 세워둔 직원이었다.
[사장님께서 출근하신 뒤 마트에 갈 거라고 하며 잠깐 밖에 나왔습니다. 다시 들어가시라 좋게 말했는데, 자기가 지금 여기에 갇혀 있는 거냐고 물어보고 너무 편해서 몰랐다고 말한 뒤 들어갔습니다.]
조정현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알고 싶었다. 직접 못 본 게 안타까웠다. 머릿속으로 조정현이 말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세워 상상해봤다. 조금 전 전화 통화로 물어봤을 때 조정현은 당황하지 않고 그분이 하시는 일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문 앞에 세워뒀던 직원에게 말을 했을 때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했을까.
상상해 보던 지승혁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가로젓던 지승혁은 집에 돌아가서 한번 물어봐야겠다 마음먹고 주의를 돌렸다.
주변이 조용해져 시선을 들어 올리자 자신을 쳐다보는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할 일들은 다 끝내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나직이 묻는 소리에 찔끔하며 저마다 할 일을 분주하게 찾아갔다.
그러고 보니 조정현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놓고 어딜 물건을 사러 가겠다고 나선 건지 모를 일이다. 아마 본인의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승혁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딩동-
조정현은 누군가가 누르는 벨 소리에 방에서 나와 빠르게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현관문 쪽에서 누르는 거였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벨을 누른 사람은 현관문에 서 있던 그 남자였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빠르게 걸어갔다. 집이 워낙 커서 내부에서 이동하는 건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남자가 상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조정현에게 남자가 말했다.
“사장님께서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받으십시오.”
조정현은 남자가 직접 건네는 걸 받아들었다. 큼지막한 로고가 그려진 비닐 안에는 사각형의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좀 전에는 제가 드리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다시 사 왔으니 드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한 조정현에게 묵례한 남자가 내려놓았던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발걸음은 상당이 빨랐다. 가벼운 도시락을 들고 남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조정현은 그가 상자를 조리대 위에 올려놓는 걸 보았다.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친 건지 남자는 이전과는 다른, 깍듯한 태도로 이만 실례하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자동으로 문 잠금쇠가 작동하는 소리를 듣던 조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남자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며 손에 든 도시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투명한 뚜껑 너머로 장어가 보였다.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자주 먹지 않았던 도시락이었다.
조금 뒤에 도시락을 먹자고 생각한 조정현은 남자가 들고 온 상자 속 물건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남자가 가지고 온 것들은 마트에서 장을 봐 온 음식 재료들이었다. 각종 채소부터 시작해 고기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5kg짜리 쌀도 있었다. 상당히 무거웠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아 몰랐다.
이걸 마트에서 직접 사 온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조정현은 입을 꼭 다물었다. 각종 매체에서 봤던 갑질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혹시 지금 이건 자신이 갑질을 하게 된 건가.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는 비슷하게 여겨질 거다.
남자의 퉁명스러웠던 태도가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이런 일을 하려고 취업한 게 아닐 텐데 미안해졌다.
조정현은 얼른 현관문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한쪽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조정현의 등장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가져다주신 짐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별일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조정현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인지 남자의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조정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핸드폰을 들어 지승혁에게 톡을 적어 내려갔다.
아까도 한참 바빠 보였기 때문에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음식 재료들 받았어요. 대신 장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온 답은 없었다.
하긴 답이 왔어도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조정현은 빠르게 재료들을 분리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뭘 사 왔는지 파악한 조정현은 조리할 메뉴를 생각하며 핸드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을 마친 조정현이 결정한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다른 것도 만들고 싶긴 했으나 배달된 재료들이 참 중구난방이었다.
애호박에 양파, 파프리카, 시금치, 방울토마토에 멜론까지.
재료들이 분명 잔뜩 있긴 했는데 이걸 만들겠다고 염두에 두고 산 게 아니라 되는대로 집어온 것이 분명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간편한 밀키트를 사다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만두가 있었으나 육수를 낼 재료는 없었다. 그렇다고 떡하니 만두만 저녁이라고 내기도 뭐 했다. 조정현 혼자만 먹는 거라면 모르겠으나 지승혁과 함께 먹어야 하는 저녁 아닌가.
잠시간 그런 원망 섞인 생각을 하던 조정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부러 사다 준 것들이니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됐다. 이거나마 있는 게 어디인가.
완전히 낯선 메뉴를 만들 정도로 조정현은 요리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남자가 건네주고 간 도시락을 열어 안에 있는 음식을 절반 정도 덜어냈다.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남은 도시락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덜어둔 쪽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아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지승혁이 왔을 때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일부러 도시락을 사다주라고 한 지승혁에게도 미안했고 발품을 팔아 도시락을 사 온 직원에게도 마음이 쓰였다.
깨끗하게 다 먹은 조정현은 바로 사용했던 그릇을 닦았다.
여유를 두고 만들어 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하에 조정현은 바로 요리하기에 돌입했다.
조금 전 냉장고에 정리해 둔, 시중에서 파는 김치와 부침용 두부. 그리고 삼겹살을 꺼내 들었다. 요리연구가로 유명한 방송인이 공개한 레시피를 들여다보며 주방에서 도마와 칼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는 완전히 텅텅 비었으면서 냄비나 밥솥 같은 건 완비가 되어있는 게 좀 모순적이었다. 조정현에게는 잘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꾸만 화면이 어두워지는 걸 손으로 터치하며 음식을 만들던 조정현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하늘도 채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뭐 만들어요? 밖까지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지승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정현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워낙 아침 일찍 출근했으니 일찍 퇴근할 수도 있는 건데 생각을 미처 못했다. 지승혁 본인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막연하게 좀 늦게 퇴근하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었다.
“어, 오셨어요.”
“네. 다녀왔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레인지 앞에 서 있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다가왔다. 조정현이 조리하던 냄비 안을 들여다보던 지승혁이 미소했다.
“김치찌개예요? 맛있겠네.”
“어. 네. 그, 이 시간에 오실 줄 알았으면 서두르는 건데. 바쁘셔서 늦게 오실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바쁜 건 맞아요. 그저 오늘은 좀 일찍 들어온 거라.”
조정현은 입속으로 작게 그렇구나, 중얼거렸다.
“김치찌개 아직 덜 끓어서요. 밥도 아직이거든요. 퇴근하셨는데 씻고 나오세요.”
조정현의 말을 들은 지승혁이 눈썹을 한번 들어 올린 후 작게 웃었다.
“알겠어요. 얼른 씻고 나올게요.”
그 대답을 한 후 지승혁은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