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현관 앞까지 나오게요?”
“어, 그게. 신발 갈아 신는 곳이 너무 기니까 제대로 배웅하는 기분이 안 들어서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현관 전실은 신발을 신고 네댓 걸음은 걸어야 현관문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때문에 그냥 방에서 인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지승혁이 기꺼이 허락하지 않을까 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조정현의 예상과 달랐다.
“아무리 실내라도 집 안이랑 바깥은 달라요. 이 시간엔 더욱 쌀쌀하니까 현관문까지만 나와줘도 충분해요.”
부드러운 거절에 다시 조를 수가 없었다.
결국 지승혁과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선 조정현이 생각난 듯 말했다.
“어, 저기. 제가 저녁 만들어도 될까요?”
“저녁?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잘은 아니고, 그냥…… 조금요.”
“그냥 편하게 배달해 먹어도 되는데.”
조정현은 지승혁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귀 뒤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집에 그냥 있는 것도 좀 그래서요. 한량 같잖아요.”
“한량이란 말도 말아요?”
지승혁이 놀리듯 말했다. 조정현은 답지 않게 발끈했다.
“당연하죠. 알아요. 저 이래 보여도 대학생이거든요.”
저도 모르게 입이 나왔다. 대학교에 등록한 후 지승혁의 사무실로 떠밀려 와서 제대로 나갈 기회는 없었지만 말이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웃음소리는 내지 않고 입 끝만 올려서 웃던 지승혁이 말했다.
“그게 조정현 씨가 마음이 편하면 그렇게 하도록 해요. 무리는 하지 말고요.”
지승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정현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안의 먼지를 닦는 것과 주방을 사용하는 건 비슷한 듯해도 좀 느낌이 달랐다. 좀 더 깊숙이 관계를 하는 기분이 들었기에 조정현은 열없이 웃었다.
지승혁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일해주는 건 정현 씨인데 감사를 내가 받네요?”
“어…… 하지만 사장니임, 이 아니고…… 형 아니었으면 저 길바닥에서 노숙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조정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지승혁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는 곧 그러도록 하세요, 라고 말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듯 두터운 철문 너머로 알림 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집을 나서는 지승혁이 조정현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다정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조정현은 자신이 먼저 인사를 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정현은 재빨리 반응했다.
“잘 다녀오시고 출근길 조심하세요.”
돌아온 인사에 지승혁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는 의미 있는 시선으로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바라보는 눈길에 왠지 조바심이 났다.
실제로 기다린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을 텐데 긴장을 해서일까. 퍽 길게 느껴졌다.
그럼 갈게요, 하고 말한 지승혁이 발길을 뗐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니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고도 잠시간 그곳에 서 있던 조정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정신이 또렷해서 다시 잠들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가 우습게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조정현의 정신은 수마에 잠겨 들었다.
희미한 의식 너머로 지승혁의 형질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걸 잊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것마저도 이내 흐려졌다.
* * *
조정현이 눈을 떴을 때는 방안이 환해졌을 때였다.
얼마나 잔 건가 핸드폰을 확인한 조정현은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아연해졌다. 아무리 중간에 일어났다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상 시간이라고 치기엔 너무 늦었다.
물론 조정현이 여태껏 바른 생활만 했다는 건 아니었다. 늦잠을 자기도 했으나 문제는 지금 머무는 곳이 조정현의 집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얼른 일어난 조정현은 몸을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저녁을 만들려면 장을 봐야 했다.
지승혁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마트에 가려고 해요]
간단하게 톡을 보낸 조정현은 외출을 위해 지승혁의 옷 중 사이즈가 작아 보이는 걸 찾아내 갈아입었다. 개중 작은 거였지만 그래도 조정현에게는 상당히 컸다. 겉에 입는 코트만큼은 오버핏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이즈가 커다랬다.
지승혁에게서 답이 왔나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켰다. 하지만 조정현을 맞이 한 건 새로운 메시지가 없는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걸까. 그러나 답이 없다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조정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국 자신의 것을 입고 문을 열고 나간 조정현은 자신을 가로막는 덩치와 맞닥뜨려야 했다.
체격이 상당히 큰 사내였다. 눈초리가 날카롭고 입술이 얇아 차가운 인상이 더해졌다. 남자는 영문을 몰라 눈을 둥글게 뜬 조정현을 내려다보았다.
“못 나가십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남자가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여기에 서 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 왜요? 요 근처 마트에 갈 건데.”
긴장감 없는 말을 들은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쿡 박혔다. 그는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어떤 입장인지 이해가 안 되나 본데 그냥 얌전히 들어가지?”
즉시 날아온 반말에 조정현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표정과 태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경시는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정현은 맹하지 않았다.
“……혹시 제가 여기 갇혀 있는, 그런 건가요?”
“…….”
남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에 서리는 감정은 어이없음이 분명했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조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탄이었다.
“아…… 그렇구나.”
꿈틀. 남자의 눈썹이 슬며시 움직였다.
“아니, 전혀 몰랐어요. 너무 편해서. ……그렇구나.”
중얼거리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조정현은 따끔따끔한 시선에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어이없음과 황당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갖가지 감정이 뒤엉킨 얼굴을 한 남자를 마주 볼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남자의 인상이 점점 험악해지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지승혁에게서 외출을 허락하는 톡이 왔으면 몰라도 답이 전혀 없는데 막무가내로 나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조정현은 얌전히 몸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조정현은 현관 전실을 볼 수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아 곤란한 듯이 뺨을 문질렀다.
“……갇혀 있는 거구나.”
조정현은 새삼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정말 몰랐다.
그도 그럴 게 세상 어느 누가 사람을 가두면서 핸드폰을 뺏지도 않고 배달 음식을 시켜주고 손발도 묶지도 않는단 말인가. 심지어 지승혁은 나중에 옷을 사러 가자고까지 했다.
이쯤이면 조정현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건 정상참작을 해줘야 했다.
뭔가 상황이 좀 이상하고 웃겼다. 심각하게 생각을 하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모든 정황을 되짚어 봐도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잠시 앉아있던 조정현은 지승혁에게 저녁을 만들어도 좋냐고 물어봤던 걸 떠올렸다. 이 상태면 저녁은커녕 외출 자체도 무리였다.
문밖의 남자에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조정현의 설명을 차분히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 앞의 남자는 왜 세워둔 걸까. 조정현은 딱히 어디로 갈 곳도 없고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만약 어디론가 도망갈 생각을 했다면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경찰이나 119에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을 거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던 조정현은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승혁에게서 답이 온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심지어 톡이 아니고 전화였다.
마침 늦은 점심으로 치킨을 데워 먹은 이후에 손을 닦고 있었다. 손에 흠뻑 물이 묻은 상태였던 조정현은 핸드폰 화면에 뜬 ‘지승혁 형’이라는 글자에 당황하다가 전화 거부하기를 해버렸다. 물기 때문인지 화면이 제대로 손가락을 인식하지 못해 벌어진 참사였다. 악 소리를 낸 조정현은 “어떡하지.”만 연발했다.
그러나 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려 입고 있던 옷에 손을 문질러 닦고 전화를 받았다.
“네, 네. 형이세요? 저기, 조금 전에는 제가 실수로 잘못 눌렀어요. 거부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구요.”
-그랬어요? 알겠어요. 뭐 하고 있었어요.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조정현은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지승혁의 목소리에는 적당히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덕분에 제대로 이해시킨 건가 미심쩍었지만 알겠다는 사람에게 되물어보기도 뭐했다.
“뭐 하고……. 아. 조금 전에 치킨 먹었어요. 저번에 먹다 남은 거요.”
-치킨? 도시락은 어쩌고요?
“네? 도시락요? 아…… 그것도 먹긴 했는데, 음식 버리면 아깝잖아요.”
도시락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인터폰이 울렸는데 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엇갈렸을 수도 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밖에 서 있는 남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치킨으로 배를 채웠는데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구태여 자잘한 일까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듯싶었다.
지승혁에게서는 잠깐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닌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통화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