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3)화 (13/130)

#13

“아, 네에.”

일부러 지적당하자 왠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주저하며 답했다. 하지만 다른 말을 떠오르지 않았다.

정태준은 그런 조정현의 반응을 보며 킥킥거리다가 몸을 빙글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럼, 지 사장님. 이른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정현 씨, 편할 때 아무 때나 연락해요!”

조정현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든 정태준은 게가 눈을 슥 숨기는 것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정태준이 사라지자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조정현은 조심스럽게 지승혁 쪽을 쳐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를 기점으로 정태준이 인사를 할 때까지도 그에게 아무런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승혁과 시선이 딱 맞부딪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무슨 할 말 있어요?”

“네? 아, 아니…… 없, 없어요.”

실은 묻고 싶은 게 몇 개 있었다. 하나 그렇게 물어보는 데 있다고 덥석 말할 수 없었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의 생각을 읽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마치 조정현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기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정현이 백기를 들었다.

“죄송해요. 사실은 있어요.”

“말해요. 듣고 있어요.”

지승혁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나긋했다. 하지만 조정현의 등을 밀어주는 것 같은 힘이 있었다.

“진짜 제가 이 집에 처음 온 사람이에요?”

조정현이 말이 끝나자 지승혁은 순간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왜 거짓말하겠어요.”

“아뇨, 무척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집에 아무나 안 들여요. 조금 전 그건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서류를 안 준다고 해서 그런 거예요. 저래 봬도 성격이 있어서.”

해사하게 잘생긴 정태준이 순식간에 ‘그거’로 격하되는 순간이었다.

심상하게 말하는 지승혁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차분했다. 어쩐지 얼굴에서 땀이 날 것 같은 조정현과는 전혀 달랐다. 조정현은 자신의 뺨도 문지르고 입고 있는 옷도 잡아당겼다.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에요.”

뒤이어 들려온 말에 조정현은 조금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승혁은 조정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게 지승혁의 버릇인 것 같았다.

그는 짙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

“왜요, 거짓말 같아요?”

“아뇨. 그게 아니고……. 그걸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좀…… 아니, 나쁘다는 게 아니구요.”

무표정하던 지승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들어섰다.

“조정현 씨는 참 솔직하네요. 아. 뭐라고 하는 게 아니고 칭찬이에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정현의 어깨에서 힘이 살짝 빠져나갔다. 그런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조금 전과 같은 어조로 질문했다.

“궁금한 건 그거 하나예요?”

“…….”

조정현은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지승혁은 지금 조정현에게 묻고 있었다. 따로 물어볼 건 없냐는.

왜 돌려 물어보는 걸까.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는 쪽이 기분상 더 나았을 거다. 조정현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요? 대답해주실 거예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네요.”

지승혁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본 채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먼저 긴장을 푼 건 지승혁 쪽이었다.

“너무 찔러봤군요. 맞아요. 물어봐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언뜻 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예 대놓고 저런 말을 하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맥이 빠져 뭐라고 항의할 생각마저 쑥 들어가 버렸다. 지승혁은 한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조정현 씨는 참, 그런 표정으로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젠 안 그럴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네? 제가, 왜요?”

지승혁의 말에 당황한 건 조정현이었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조정현은 제 얼굴을 더듬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인식만 못 할 뿐 다른 사람이 보기엔 웃겨 보였던 걸까.

하지만 지승혁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물었다.

“그런데 내 번호 저장하면서 사장님이라고 적었어요?”

“아, 네? ……네에.”

설마 이런 걸 물어볼 줄 몰랐기에 조정현은 잠깐 간격을 두고 답했다.

갑작스럽게 굴러간 대화 주제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계속한다고 해도 어떤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정현은 이전에 봤던 서류들을 떠올려보았다.

[담보 제공 증서], [친권 및 양육권 포기각서].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모를 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래, 지금 조정현 입장에서 누가 누구를 걱정한단 말인가.

부모님의 대출금은 원금만 23억이라고 했다. 이자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이 분명하다.

뭘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 정도의 거금을 갚을 능력은 조정현에게 없었다. 억지를 부리거나 뭘 궁리한다고 해결될 일 역시 아니었다. 조정현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집어넣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응시했다. 만약 시선에 형태가 있었다면 지금쯤 조정현의 얼굴에는 여러 자국이 났을 거다.

“난 사장님이라서 조정현 씨 데려온 게 아닌데.”

“…….”

이번에는 정말 생각도 못 한 말이 돌아왔다.

조정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굴러갔다. 머리가 얼른 돌아가지 않았다.

사장으로서 데려온 게 아니라니. 그럼 왜?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던 조정현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만약에 그랬으면 조정현 씨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죠.”

이번엔 얼굴에서 땀이 나는 게 아니고 등에서 나는 것 같았다.

참 이상했다. 왜 이렇게 진땀이 날까.

조정현은 쥐고 있던 핸드폰 표면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럼, 저, 뭐라고 저장해야 할까요? 사실은 지승혁 씨라고 할까 하다가 너무 버릇없는 것 같아서 그만뒀거든요.”

“지승혁 씨는 너무 거리감이 있네요.”

“지승혁 아저씨도…… 아닌 것 같고요.”

“아저씨?”

지승혁이 되묻다가 픽 웃었다.

“하긴 나이 차이로 보면 그게 맞긴 하겠네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조정현이 놀란 듯 “네?”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지승혁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듯했다. 도리어 자신을 쳐다본 조정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몇 살로 보여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아요.”

“조정현 씨가 초등학교 3학년 되어서 잠자리 잡고 놀 때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 합법적으로 술 마시러 다닐 수 있는 나이였어요. 그러면 아저씨 맞죠.”

스스럼없는 말에 조정현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덧셈 뺄셈을 해본 조정현은 지승혁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나이 차이는 좀 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네 그렇네요, 하고 답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조정현 쪽이 지승혁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저기, 그러면, 형은 어떠세요.”

“형?”

지승혁의 입매가 우스운 듯 휘어졌다.

조정현은 그에게서 승낙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지승혁은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릴 뿐이었다. 칠흑처럼 짙은 눈동자가 가만히 조정현을 응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즈음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너무 사적인 호칭인데요.”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결코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비록 조정현 혼자의 추측이긴 해도 말이다. 조정현은 슬금슬금 지승혁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간 기다렸다.

하나 지승혁에게서는 ‘그러니 그만둬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저장할게요……?”

확인하듯 던진 조심스러운 질문에 거절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정현은 빠르게 저장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지승혁이라는 이름 뒤에 ‘형’이라는 글자를 두드리는 손끝이 왠지 빨갛게 익는 것 같았다. 아마 지승혁의 시선이 닿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장만 그렇게 할 거예요?”

“네?”

“한번 불러볼래요?”

한 발자국 거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는데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은밀하게 느껴졌다. 부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말하자니 주저되긴 했다.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과한 주목을 받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까.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조정현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형.”

살짝 눈을 크게 뜨던 지승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형이라고 처음 불려 본 건 아닌데 조정현 씨가 하니까 되게 좋네요.”

뭐라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말했다.

“나는 이제 나갈 준비해야 하는데 좀 더 잘래요, 아니면 나 배웅해 줄래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정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지만 아마 이 상황에서 좀 더 잔다는 걸 고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조정현 또한 홀린 듯 배웅하겠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지승혁이 나온 시간은 아직 바깥 하늘이 어둑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조정현은 지승혁을 알고 난 이후 알게 됐다.

지승혁의 한쪽 손에는 조금 전 정태준에게 받은 갈색 종이봉투가 들려있었다.

신발을 신은 지승혁은 자신의 뒤를 따라 신을 신으려는 조정현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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