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정현은 눈만 깜빡거리다가 곧 농담한 거라는 걸 깨닫고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출금에 대한 말이 나온 지금 물어보는 게 좋을까.
조정현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제 부모님은…….”
“아. 조정현 씨는 모르는군요. 감쪽같이 모습을 감춰버려서 지금 우리 쪽에서 열심히 찾고 있어요.”
큰 결심을 하고 물어본 것이 허탈할 정도로 지승혁에게서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물을 마시며 조정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은 수백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승혁은 딱 선을 긋고 있었다.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그가 너무 잘해줘서 잊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지승혁이 베푸는 거였다. 그가 호의를 거둬가 버린다면 그걸로 끝일, 그런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 돌을 얹고 누르는 것 같이 불편해졌다.
달각. 유리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일이라도 옷을 사러 가자고 하고 싶지만 일 때문에 당장은 좀 무리니까 불편하겠지만 며칠만 참아요. 그동안 드레스 룸에서 옷은 아무거나 꺼내 입어요.”
“……네, 감사합니다.”
중간에 조정현이 꺼냈던 부모님의 화제 부분만을 가위로 잘라내고 다시 이어붙인 것 같았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그 화제는 그만하자는 의사표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지승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조정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로 젓가락을 자근거리면서 깨물던 조정현은 지승혁의 시선을 느끼곤 멈춰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럭저럭 잘 먹던 도시락이었는데 더 이상 별맛을 느낄 수 없었다.
젓가락을 응시하며 반찬을 잡았다가 놓기를 한 번, 두 번 반복하고 있는데 지승혁이 말을 걸었다.
“좋아하는 건 뭐예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조정현이 고개를 들고 한발 늦게 반응했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짐작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느니 빠르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거요? 음, 어…… 부, 부모님요.”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전 지승혁과 했던 대화 내용이 떠올라 곤란해졌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지승혁에게 어필을 하는 것 같았다. 조정현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기, 일부러 불편하게 하려고 말씀드린 건 아니구요.”
지승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재촉했다. 지승혁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호랑이처럼 굴었다. 그런 분위기가 나는 이유는 지승혁의 저 눈동자 때문이라고 조정현은 생각했다.
그 눈동자 그대로 지승혁은 입이 채 떨어지지 않아 말을 고르는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말해봐요.”
어디서 따로 교육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승혁은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조정현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려놓았다.
“왜냐면 저를 키워주셨고…… 어, 불편한 거 없이 돌봐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음.”
“좋아하는 거랑 감사해야 하는 건 다른데 착각하는 것 같네요. 나는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는데.”
“부, 부모님 좋아하는 거 맞는데…….”
조정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두꺼운 침묵이 잠시간 내려앉았다. 어깨가 무겁다고 느낄 무렵 지승혁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네? 좋아하는 게 뭐냐고 하셨잖아요. 너무 많아서요.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조정현의 말에 이번엔 지승혁이 웃었다. 짧게 그렇군요, 하고 답한 지승혁은 말을 이었다.
“싫어하는 건 있어요?”
싫어하는 게 뭐냐는 것도 아니고 있냐고 묻는다. 마치 없다는 게 당연한 것인 마냥. 조정현은 입술을 쫑긋거렸다.
“싫어하는 거요? 당연히 있죠.”
“그래요? 뭔데요?”
남자는 대단히 의외로운 듯 되물었다
“아픈 거랑 생강요.”
조정현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
“……저……?”
목소리가 작은 것도 아니었는데 못 들은 건가 싶어 조정현은 조심스럽게 그를 한번 불렀다.
지승혁은 입을 다문 채로 조정현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아, 그래요. 아픈 거랑 생강이 싫다고요. 왜요?”
이번엔 조정현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조정현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아픈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
조정현이 멈칫하며 말을 멈췄다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혹시 아픈 거 좋아하세요?”
지승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뇨. 그런 취미는 없어요.”
“그쵸? 아픈 건 보통 싫잖아요.”
지승혁의 동의를 얻자 조정현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로 이어 질문했다.
“그럼 생강은요?”
“어…… 생강, 맛없잖아요. 생강 맛있으세요?”
또 한 번의 동의를 구하며 묻자 지승혁은 급기야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번엔 아닌가 보다.
조정현은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아니, 비웃은 게 아니에요. 너무 명료한 답이라. 맞아요. 생강 맛없죠.”
지승혁은 아직 웃음이 머문 얼굴로 조정현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히 무슨 의미를 담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부정적인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하세요.”
승낙이 떨어졌다.
“그러면 저, 사장님께서 싫어하시는 건 뭐예요?”
“내가 싫어하는 거? 글쎄요, 난 조정현 씨랑은 달라서 좋아하는 걸 꼽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지승혁은 그렇게 말하곤 무표정으로 깍지를 낀 양손의 엄지에 턱을 받쳤다. 그 상태로 가만히 조정현을 응시했다.
지승혁은 불시에 습격한 음식점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처럼 몹시 까다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기한 생각도 들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 같았다.
아무런 소음이 없기에 침묵이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 없을까.
조용히 검지 손톱을 다른 쪽 검지로 문지르던 조정현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시는 건 확실하시다는 거니까 뭐 고르실 때 고민은 많이 안 하시겠어요.”
말해 놓고 보니 자칫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뻗어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구요. 그러니까, 좋으시겠다는, 그런 거예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여기면 어쩌지 싶어져 지승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긴장의 실을 툭, 끊으며 지승혁이 웃었다.
그와 동시에 조정현은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현 씨는 참 좋은 면만 보는 사람이네요.”
조정현은 지금 이 상황이 사람을 앞에 두고 욕을 하는 걸까 고민했다. 물론 지승혁이 한 말 자체는 칭찬이었지만 저런 말이 왜 갑자기 나온 건지 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좋은 재능이에요.”
“……그런가요?”
“네.”
지승혁의 길고 투박한 손가락이 툭툭 식탁을 쳤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주 좋아해요.”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아주.
별 뜻이 없는 걸 텐데 그 말이 괜스레 귓가에 맴돌았다. 지승혁을 쳐다보던 눈동자가 떼굴떼굴 아래로 움직였다. 좌우로 배회하던 시선이 정착한 곳은 도시락이었다.
조정현은 도시락 안에 남은 밥알이 몇 개인지 세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귓불이 뜨끈하게 느껴졌다.
* * *
단잠을 자던 조정현은 벨 소리에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창밖은 아직 어둑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는데 언짢은 기색의 지승혁이 인터폰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화질이 선명한 화면에 젊은 남자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지승혁 씨. 문 좀 열어주세요. 네? 특별히 배달 왔다니까요.
“무슨 장난질이야.”
-에헤이. 장난질은 무슨. 찾아가는 서비스인데요. 듣는 사람 섭하게.
조정현은 듣기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였건만 상대는 꿋꿋하게 제 할 말을 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보기 좋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일부러 가지고 왔는데 들여보내 주시죠? 제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는 지 사장님이 잘 아시면서 이러시네.
지승혁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한숨을 쉬고 버튼을 눌렀다.
“한창 자고 있었을 텐데 깨웠네요.”
“아, 아니에요.”
지승혁은 잠시간 조정현을 응시했다.
“……어.”
지승혁의 손바닥이 조정현의 드러난 목덜미를 감싸듯 덮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조정현은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했다.
“새벽이라 좀 춥죠. 목이 드러나서 내가 그렇게 보는 건가?”
“어. ……아. 괜찮아요.”
“안쪽에 목까지 올라오는 티가 있을 텐데. 기다려요.”
지승혁은 괜찮다는 조정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넉넉하게 쥐고 있던 손으로 조정현의 목덜미를 가볍게 한번 문지른 후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건조한 손바닥은 핫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끈했다.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자 허한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은 어깨를 추스르며 지승혁이 만졌던 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이거 받아요. 지금 갈아입고 나올래요?”
지승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정현은 목덜미를 감싼 손을 떼고 어색하게 팔뚝을 만졌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넘겨주는 티를 받아든 조정현은 그대로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승혁이 그런 조정현을 불러 세웠다. 그는 안방 쪽, 그러니까 자신의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곳에서 갈아입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