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9)화 (9/130)

#09

“조정현 씨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그리고 돌아온 말은 조정현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조정현은 접어놓은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성인인데요.”

“호적에 잉크도 안 말랐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진부한 비유를 드는 지승혁의 눈매가 우스운 것처럼 조금 휘어졌다.

“……저 민증도 있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항변하는 목소리가 좀 불퉁했다.

“스무 살이면 다 성인이에요?”

“법, 법적으로는 투표도 할 수 있어요.”

지지 않고 대답하는 조정현을, 지승혁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런 자세마저도 왠지 한 수 접고 상대해준다는 인상이 들어 조바심이 났다.

“법적인 걸 이야기하면 어쩔 수 없네요.”

지승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조정현에게서 머물러 있었다.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조정현 씨는 1월 1일 자정이 되는 순간 애가 갑자기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조정현은 바로 답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지승혁은 법률적인 걸 논하는 게 아니었다. 극단적인 예이긴 했지만 확실히 1분 차이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기에 조정현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대답을 들은 후 말을 이었다.

“내 기준으로 스물다섯까지는 전부 어린애예요.”

지금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정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기, 스물다섯이면 당연히 어른 아닌가요?”

“무슨 이야기인지 좀 더 나이 먹어 보면 알 거예요.”

지승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듯 말했고, 조정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대체 몇 살인데 그러냐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은 굳이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편하게 지내라는 말을 덧붙이는 지승혁의 눈을 마주 보던 조정현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단순한 인사였는데 말을 마치자마자 좀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너무 생색 부리듯 말했나 싶기도 했던 거다. 조정현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지승혁은 눈썹을 쓱 위로 들어 올렸다.

“그래요. 조정현 씨도요.”

지승혁은 인사를 하고도 잠시간 조정현을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말했다.

“그런데 좀 억울하긴 하네요. 나는 조정현 씨한테 계속 친절했던 것 같은데.”

“……아, 네에.”

조정현의 머릿속에 지승혁과 첫 만남부터 시간 순서대로 좌르륵 스쳐 지나갔다. 할 말은 많았으나 굳이 말하지 않는 걸 선택하곤 눈을 옆으로 굴렸다.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

입술을 조금씩 깨물며 가만히 서 있는 조정현을 내려다보던 지승혁이 “그럼.” 하고 말한 뒤 이번에야말로 볼일을 마친 듯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하며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조정현은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고요한 적막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좋은 침구와 안락한 공간에 있으니 그간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마치 뭐에 홀린 게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조정현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룰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눕는 침대는 너무나 편안했고 안락했다. 조정현의 의식은 깜빡거리기 시작했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지승혁은 확실히 바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지승혁의 집에서 묵게 된 첫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직 밖이 어둑한 시간, 인기척이 들려 잠에서 깬 조정현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지승혁과 부딪쳤다.

“내가 깨웠어요?”

“아뇨. ……저, 지금 출근하시는 거예요?”

말을 하고 나서야 조정현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이 아니면 왜 이 시간에 일어나 수트를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겠는가. 너무나 당연한 걸 물어본 것 같아 얼굴이 좀 뜨거워졌다.

“음, 저어, 잘 다녀오세요.”

조정현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건넨 말에 지승혁이 잠깐 눈길을 주었다.

“그래요. 집에 있는 건 편하게 사용해요. 그리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지승혁이 말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무슨 일일까 싶어 가만히 서 있던 조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싶어 물끄러미 응시하던 조정현이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지승혁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니, 이게 아니라. 조정현 씨, 핸드폰 좀 주세요.”

“아. 앗, 저 잠시만요.”

핸드폰 얘기였구나.

그걸 오해하고 손을 올려놨으니 황당해하는 반응이 이해가 갔다.

당장 얼굴이 뜨겁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멍했던 머리에서 일시에 잠이 달아났다. 조정현은 방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나가면서 창피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요.”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핸드폰만 건넸다. 그러고 보니 지승혁이 뭣 때문에 핸드폰을 달라고 한 건지 묻지도 않았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지이잉-

고개를 든 조정현의 눈에 지승혁이 자신의 핸드폰과 그의 핸드폰을 양손에 들고 있는데 보였다.

“내 핸드폰 번호예요. 저장해둬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나가지 말고 이쪽으로 전화해요. 전화 안 받으면 톡이라도 남겨요. 늦게라도 확인할 테니까.”

“앗. 네에.”

핸드폰을 돌려받은 조정현이 화면을 쳐다보았다.

“조정현 씨 공장이나 주유소 알아봤다고 했죠.”

“네? 네…….”

“빤한 월급 받는 일 하지 말고 집에서 가만히 있어요. 오메가가 그런 곳에 가면 험한 일 당할 수 있으니까. 내 말 알겠어요?”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에게 그럼 쉬어요, 하고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무슨 말이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투명창 너머로 지승혁이 타는 모습이 보였다.

돈을 벌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하기야 월급을 받아서 아무리 열심히 모은다 한들 그 큰 액수를 갚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노력도 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 텐데. 조정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내가 오메가인 건 어떻게 아셨지.”

작게 중얼거렸다. 부주의하게 페로몬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봤을까. 조정현은 다시 한번 자신의 페로몬 상태를 점검했다. 열성이긴 하지만 페로몬 조절은 완벽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제 와 조절에 미숙한 사람 마냥 페로몬을 흘려댈 리도 없었다.

알파라면 조정현이 오메가인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지승혁이 알파라면 조정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승혁에게서는 그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베타라고 생각했다.

조정현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작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하긴 어떤 식으로건 알 수 있었다. 그 서류에 자신의 부모님이 밝혔을 수도 있고 말이다.

일단은 집에서 가만히 있으라니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메가와는 달리 알파는 드물긴 해도 마주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베타보다 압도적으로 적은 알파와 오메가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조정현은 학교에서 충분히 배웠다.

지승혁이 지적한 그대로였다.

사무실에서 지낼 때에는 누구와 상담할 수도 없었고 그저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처럼 돈을 갚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기숙하며 일할 곳을 찾았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확실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곳에서 지내다가 러트가 온 알파를 만나거나 혹여 조정현 자신이 히트 사이클에 들어서게 된다면. 그런 가정을 한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문질렀다.

넓은 집에 혼자 남은 조정현의 걸음 소리가 작게나마 났다. 방에 들어가 핸드폰 화면을 밝히곤 빤히 쳐다보았다.

지승혁의 이름을 무엇으로 저장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승혁 씨라고 하기엔 너무 버릇없게 느껴졌고 사장님이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한 감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조정현은 결국 무난하게 ‘사장님’이라는 글자를 적어넣고 저장했다.

새벽 5시 12분.

평소라면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각이었다. 조정현은 다시 자려고 누웠지만 조금 전 창피스러웠던 일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인지 잠이 청해지지 않았다. 집주인이 출근한 시간에 객식구가 팔자 좋게 늘어져 있기도 뭐 했다.

청소할까 하고 물었던 질문에 지승혁은 긍정적인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더 못 할 짓이었다.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다.

가만히 앉아서 놀 바에야 무슨 일이든 하는 게 이치에 맞는 게 아닐까. 고개를 끄덕거린 조정현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하며 지승혁의 집에서 아침을 맞을 준비를 했다.

지승혁의 이미지가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콱 찔러도 피하나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존대를 쓰는 깍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선이 확실했다.

치킨을 먹고 난 후의 뒷정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이 제일 놀라웠다. 그런 일에는 일절 손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처럼 생겼는데.

그러고 보면 자신이 나서서 먼저 치웠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조정현의 안색에 핏기가 가셨다. 좌불안석이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지 않기를 잘했다. 뭐든 할 거리를 하나라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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