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커다란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따끈한 물을 받아두고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차마 거기까지 욕심을 낼 수 없었다. 보디 클렌져과 샴푸 등의 기본적인 건 한쪽에 주르륵 놓여 있는 걸 확인한 조정현은 샤워를 시작했다.
적당히 따뜻한 물이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게 기분 좋았다.
빠르게 몸을 씻고 나온 조정현은 샤워 전 벗어두었던 옷이 있던 자리에 얌전히 놓인 옷가지를 발견했다. 새 속옷까지 있었다. 조정현은 빠르게 착의를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옷이 좀 컸다. 긴소매라 손가락 끝을 덮고도 남았다. 소매가 그 모양이니 어깨솔기 역시 원위치에서 한참이나 밑에 와 있었다.
네크라인은 브이자로 되어있었는데 사이즈 차이 탓인지 좀 과하게 어깨가 보였다. 너무 앞으로 몰리지 않도록 손으로 계속 정리를 해야 할 듯싶었다.
지승혁이 입었던 옷인가 싶어 킁킁 냄새를 한번 맡아보았다. 세제 냄새인 듯, 부드럽고 따뜻한 향이 났다.
척 보기에도 지승혁이 워낙 덩치가 크긴 했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인종이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조정현이 팔을 접었다. 그나마 바지는 반바지였기에 바닥에 끌리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허리가 좀 헐렁해서 걸을 때 흘러내리진 않을까 싶었다. 몇 번 접어보긴 했지만 바지였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사이즈가 맞지 않으니 다른 걸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조정현은 적당히 타협하고 욕실에서 나갔다.
지승혁이 비스듬하게 벽에 기대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조정현의 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지승혁은 머리카락에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고 들어왔을 때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나올 때를 기다린 건가 싶었다.
욕조에 물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저, 감사합니다. 옷도 주시고. 어, 샤워도 잘했습니다.”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역시 좀 크네. 바지도 좀 컸을 텐데. 불편하진 않아요?”
지승혁이 조정현의 드러난 목과 어깨를 살피며 말했다.
“어, 아니에요. 접어 입으니까 괜찮아요.”
조정현은 티셔츠를 들어 허리를 접어 입은 바지를 보여주었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옷을 들어 보여주는 건 좀 그랬나 싶은 후회가 뒤늦게 밀려와 조정현은 슬그머니 옷을 내렸다. 조정현은 아직 젖어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근데 저기, 저 기다리셨어요? 죄송해요. 좀 더 빨리 나오는 건데.”
“아니에요. 그리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 뭘요.”
지승혁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식사해야죠? 뭘 좋아하죠?”
지승혁이 느슨해져 있던 넥타이를 다시 한번 끌러내며 질문을 이었다.
“조정현 씨는 뭐가 좋아요? 적당히 배달 음식을 먹을까 하는데.”
지승혁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선택지를 주었다.
“피자랑 치킨 중에 뭐가 좋아요?”
“…….”
“음?”
“아, 그럼. 그럼 치킨요.”
조정현이 뒤늦게 선택하자 핸드폰을 쥔 지승혁이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 주문을 마친 건지 핸드폰을 내려놓은 지승혁이 조정현에게 말했다.
“아무 방이나 써도 괜찮으니까 적당히 침대 있는 방 골라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조정현의 대답을 듣는 게 별달리 중요하지 않은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 쏴아아, 하는 샤워 소리가 들렸다. 조정현이 사용한 욕실과는 다른 욕실이었다. 하긴 이렇게 넓은 집이면 욕실이 세 개 정도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승혁의 모습이 사라지자 조정현은 내부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아무 방이나 사용해도 된다고 했으니 일단 방을 하나 골라야 했는데 내부가 워낙 넓었기에 둘러보는 것만도 일이었다. 조정현은 대충 근처에 있는 방문을 열어보고 그중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을 골랐다.
적당히 침대 있는 방을 고르라고 하는 걸 봐서는 침대방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은 있는 것 같았다. 손님이 많이 오는 걸까. 하기야 그러니 겨우 두 번째 본 조정현도 덥석 자택으로 부르는 거겠지만 말이다.
조정현은 창문 밖에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내다보다가 침대 위에 앉았다.
푹신한 느낌이 굳이 상표를 보지 않아도 상당히 좋은 매트리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방이 마음에 들어요?”
“앗, 네에.”
어느새 다 씻고 나온 건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고 있는 지승혁이 서 있었다. 양복을 벗고 편한 티셔츠 차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빈틈없이 정리되었던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서인지 묘하게 어리게 보이기도 했다.
지승혁은 방을 쓱 둘러보았다.
“다른 방에 비해서 좀 작을 텐데.”
“현관이랑 가까우니까 혹시나 나가시거나 들어올 때 소리가 나잖아요. 그러면 배웅하는 거나 마중하는 게 편하니까요.”
머리를 털어내던 지승혁이 움직임을 멈추고 조정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에 조정현이 입을 다물었다.
“아, 혹시 그런 거 번거로우세요? 그러시면 제가 다른 방 쓸게요.”
“아니에요. 이 방이 마음에 든다면서요. 그러면 써야죠.”
조정현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벨이 울렸다.
“배달 왔나 보네요.”
먼저 식탁에 앉아있으라고 한 지승혁의 손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치킨 봉투가 들려있었다. 꼭꼭 묶여있는 봉투를 열자 냄새가 더욱더 강하게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상자를 꺼내 내용물이 잘 보이게 연 지승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치킨 무의 비닐을 열고 싱크대에 버린 후 가지고 와 조정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념으로 시켰는데. 괜찮죠?”
“네. 좋아해요.”
조정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싫다고 한들 이제 와 다시 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지승혁을 따라 조정현이 늦게 치킨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치킨은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뜨끈했고 맛도 제법 있었다. 적당히 달짝지근한 양념도 입맛에 맞았다.
“입맛에 안 맞아요? 아니면 배가 별로 안 고팠어요?”
“네? 아, 아니에요. 많이 먹었어요.”
“두 조각이?”
되묻는 말에 조정현은 애매하게 대답하며 열없이 웃었다.
“근데 집이 좋네요. 되게 넓어요. 티비도 엄청 크고. 방도 많고. 안에 가구들도 완전히 손도 안탄 새것들이고요. 근데 여기 청소하시는 분이 힘드실 것 같아요. 제가 잠깐 사무실 청소해봤잖아요. 사무실이 넓으니까 확실히 먼지가 좀 잘 쌓여서, 아, 그게 힘들었다는 건 아니구요.”
빠르게 말하는 조정현을 바라보던 지승혁이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낯 가려요?”
툭 던져진 질문에 조정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잠시 멈췄다.
“사람이랑 단둘이 있을 때 낯가리는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거든요. 하나는 알기 쉽게 말수가 적어지는 타입. 또 다른 하나는 조용한 걸 못 견디고 말이 많아지는 타입. 보통 후자를 사람들은 붙임성이 좋다고 여기긴 하는데.”
지승혁은 붉은 양념이 묻어난 물티슈를 툭, 식탁 위에 던졌다.
“조정현 씨는 후자네요.”
말을 끝까지 듣던 조정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누구랑 이렇게 있는 게 익숙지 않아서요.”
“그래요?”
여상하게 대꾸한 지승혁은 조정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편하게 있어요.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닌데.”
“아…….”
그는 별도의 소스를 넣느라 함께 온 작은 비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닐끼리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곤 조정현이 먹다 남긴 뼈들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그걸 본 조정현이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지만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손으로 가볍게 제지했다.
자신이 먹다 버린 뼈들을 집는 게 더럽다고 망설일 법도 했는데 지승혁은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비닐 하나에 솜씨 좋게 쓰레기들을 모아 넣던 지승혁을 보며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여기에 저 있으면 그, 따로 애인 부르실 때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걱정이네요. 만약 곤란했으면 조정현 씨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요.”
대수롭잖은 걸 얘기하듯 말한 지승혁은 쓰레기를 담은 비닐의 입구를 꽉 묶었다. 슥슥 움직이는 손가락은 길쭉해서 마치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손가락을 멍하게 보며 조정현이 말했다.
“저 다른 사람 집에 온 거 처음이에요. 부모님이 그런 건 엄격하셔서요.”
말하고 나니 왠지 너무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지승혁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조정현의 말을 이어받았다.
“나도 누구를 집으로 데리고 온 건 처음이에요.”
“네?”
생각도 못 한 말에 조정현이 되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승혁은 비닐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건 치워둘 테니까 더 먹고 싶으면 좀 더 먹어요.”
“어, 네?”
“티비 보면서 먹어도 되고요. 먹고, 알아서 들어가 쉬어요.”
조정현은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가는 지승혁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본 그에게 조정현이 말했다.
“아, 그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하려다가 머뭇거린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시선으로 재촉했다.
“갑자기, 친절하셔서……. 아니,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 저야, 감사한데. 갑자기 너무 잘, 잘해주셔서, 제가 뭐 해드릴 것도 없는데 그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조정현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손사래를 쳤다가 하며 제풀에 지쳐버렸다.
“왜요. 그게 궁금할 수도 있죠.”
한데 지승혁은 의외로 선선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