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운전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이만 퇴근하십시오.”
짤막하게나마 인사를 주고받는 지승혁이 조정현은 조금 의외였다. 운전하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건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번 부모님의 차에 탔을 때 이런 류의 인사 등은 일절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차에서 내린 지승혁이 운전사와 내일 일정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차 문을 잡은 채로 서 있었다. 조정현은 그가 자신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재빨리 움직였다.
“올라가죠.”
“네? 아, ……저.”
여기까지 와 놓고 막상 그의 집으로 들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룻밤 재워주는 비용으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면 어쩌지 싶은 걱정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앞뒤 생각 않고 행동했다가 이상한 곳에 면접을 보러 갈 뻔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지승혁이 자신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보일 이유가 일절 없었다.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도 못한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곳에 일하러 갈 뻔한 걸 중간에 구해준 것 역시 지승혁이다. 그걸 보면 그가 친절을 베풀어준 거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뱅글거리는 생각에 어지러워진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안 잡아먹을 테니 걱정 말고 와요.”
“잡, 아니, 그런 게 아니구요.”
시답잖은 농담에 고개를 내젓는 조정현을 보던 지승혁이 비죽 웃었다.
“약속이라도 해줘야 믿으려나. 손가락 걸까요? 뭐 하면 도장도 찍고.”
지승혁은 농담이 아닌 듯 새끼손가락을 편 한 손을 조정현 쪽으로 내밀었다. 점점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정현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어쩌겠는가.
처음부터 갈 곳이 없다고 한 것도, 제안을 승낙한 것도 조정현 본인이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미적거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조정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요.”
한 걸음 내딛는데 지승혁 쪽에서 아무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옆을 돌아보자 지승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재미있는 걸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정현은 그가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지승혁이 조정현을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요.”
옆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몇 발자국은 앞서 있는 지승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조정현은 걸음을 재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카드키로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최상층의 버튼을 누르는 걸 보며 조정현은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반짝반짝 잘 닦아놓은 엘리베이터의 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남자는 조정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어깨도 넓고 체격도 커서 어딜 가나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일 것 같았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적한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세요.”
기분 탓일까. 왠지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럽게 변했다고 느껴졌다.
조정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현관문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무실도 그러더니 한층 전부를 사용하는 듯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지승혁을 부지런히 따라갔다. 바로 정면에 보이는 작은 벤치를 돌아 들어가니 넓은 거실이 나왔는데 마치 인테리어 책자에서 그대로 뽑아온 듯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승혁은 입고 있던 코트와 슈트 재킷을 벗어 적당히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정말로 지승혁의 집에 온 사실이 실감 났다.
“왜 그래요.”
“아뇨, 진짜 집에 데리고 오셨구나 싶어서요……. 저는 그, 아무 데, 아니, 다른 데에 데려다 놓으……. 아, 아니에요.”
뺨에 지승혁의 따가운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조정현은 입을 합 다물었다가 눈을 굴렸다.
“……죄송해요.”
“뭘 또 사과씩이나 해요. 됐어요.”
지승혁은 대수롭지 않은 것 마냥 대답했으나 조정현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잖은가. 지승혁이 자신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이유가 도저히 설명이 안 됐다.
그러고 보면 영화 같은 데에서 성격 더러운 재벌이 사람을 사다가 샌드백처럼 때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었다. 실제로 합의금 조로 수표를 던지며 다른 사람을 폭행한 재벌이 뉴스에 나오기도 했었으니 아예 허황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이렇게 집으로 데리고 온 건 혹시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때, 때리실 건가요?”
떨면서 물어본 것에 지승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하고 조정현을 응시할 뿐이었다.
“제가요? 조정현 씨를?”
“……때, 때리셔도 돼요.”
조정현이 결연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지승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조정현 쪽으로 다가왔다. 절로 뒷걸음질을 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사람 때릴 때 왜 미리 말하고 때려요. 그냥 때리면 될걸.”
조정현은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절로 지승혁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손이 무척 컸는데 주먹을 쥐면 아마 더 클 게 분명했다. 한 대 맞으면 정말 많이 아프지 않을까 절로 겁이 났다.
“저……. 사장님. 부탁이 있는데요. 저는 그, 때리시기 전에 미리 말씀해주시고 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때린다는 선택지 말고는 없어요?”
당연한 질문에 조정현은 말문이 막혔다. 웅얼웅얼 궁색한 말 몇 마디를 주워섬기려던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말했다.
“그리고 조정현 씨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려요. 말라 가지고 한 대 때리면 뼈가 부러질 것 같은데.”
그 얘기를 들으니 괜히 울컥, 반발심이 들었다.
지승혁은 이전에도 태연하게 딱밤을 때리지 않았는가.
“그렇진 않은데요…….”
“그렇게 맞고 싶어요?”
작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물어봤다.
“그런 취향이 있으면 때려 드리고요.”
지승혁이 커프스링크를 풀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인데도 불구하고 근육이며 돋아난 힘줄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정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아아뇨. 없어요. 그런 거.”
“그럼 들어가 쉬어요.”
몸을 돌리며 하는 권유에 조정현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저…… 이제 뭐 시키실 거 없나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조정현을 남자가 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뭘 시킬 것 같은데요?”
“뭐, 뭐든요. 시키시는 건 뭐든 할게요.”
“뭐든 한다고요? 그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조정현을 보는 지승혁의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네? 어, 그러니까 뭐든 시키셔도 된다는……. 건데요. ……어, 청소나……. 뭐 그런 거요.”
조정현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 걸 시키려고 내가 조정현 씨 데려온 거 같아요?”
힐난하는 어조라기보다는 재미있어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왜 데리고 오셨어요, 하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승혁은 조정현이 삼킨 말이 뭐였는지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갈 데 없었잖아요, 조정현 씨. 있었다면 사무실에서 숙박하지도 않았을 테고 면접 본다고 무턱대고 그런 데를 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아니에요? 내가 괜한 참견을 한 건가요?”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조정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지승혁은 단순히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승혁과의 첫 만남부터 생긴 편견 탓에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법도 했다. 사과를 해야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 아뇨. 참견 아니에요. 저, 죄송-.”
“사과받을 일은 아니에요. 조정현 씨도 이해한 것 같으니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죠.”
지승혁은 부드러우나 단호하고 확실한 어조로 못을 박듯 이야기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느낌이 들어 눈치를 살피던 조정현의 이름을 지승혁이 나직이 불렀다.
“먼저 씻어요.”
지승혁은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조정현에게 권했다.
“네? 그래도 되나요?”
조정현은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찜질방이나 목욕탕을 매일 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기에 사무실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씻은 건 세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씻으라는 권유를 뿌리칠 이유가 일절 없었다.
해맑은 조정현의 질문에 지승혁의 눈동자가 짙게 반짝였다.
“물론이죠.”
흔쾌히 답하면서 맞은 편에 보이는 문이 욕실이라는 친절한 안내에 걸음을 옮기던 조정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개운하게 씻을 생각에 신 났던 조정현은 주저하며 흘끔흘끔 지승혁을 돌아보았다.
“왜요. ……아.”
조정현의 망설임을 본 지승혁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나왔다.
“갈아입을 옷 챙겨주는 걸 잊었네요. 사이즈가 좀 클 테지만 그거라도 괜찮아요?”
“아, 네!”
말하기 민망한 내용을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조정현은 지승혁이 먼저 제안해준 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끄덕거리던 조정현에게 지승혁이 말했다.
“욕실 앞에 가져다 둘 테니까 들어가 씻고 있어요.”
조정현은 뺨을 씰룩거리며 네, 하고 답했는데 그 소리가 꽤 컸다. 이 정도로 큰 소리를 낼 생각은 없던 조정현이 제 입을 가렸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입술을 감쳐 물며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지승혁은 대답 대신 손을 내저으며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가 알려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파우더룸이 나왔다. 욕실은 좀 더 안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옷을 벗은 조정현은 차곡차곡 옷을 개서 한쪽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