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5)화 (5/130)

#05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막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을 때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쾅, 문을 다시 닫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끽소리도 내지 못한 조정현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 미안합니다. 벌레가 있는 줄 알았는데 잘못 봤네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남자를 조정현은 잔뜩 움츠린 상태로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벌, 벌레요?”

“네. 모기인 줄 알았거든요.”

“……겨울인데요……?”

“아, 그렇네요.”

지승혁은 한쪽 팔을 문에 댄 채로 조정현을 내려다보며 평연하게 말했다.

이쯤이면 정말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키가 크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체격도 크고 정말 다 컸다. 한쪽 팔만 뻗은 건데 마치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정현은 몇 번 눈만 깜빡였다.

주변에 소음도 하나도 없고 조용해서 이렇게 보고 있는 게 굉장히 머쓱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였을 때 갑자기 어떤 냄새가 났다. 조정현이 알고 있는 페로몬과는 좀 달랐다. 한데 몹시 좋은 느낌이 나는 향이었다. 아주 잠깐 그 향기에 정신이 빼앗겨 멍해져 있을 때였다.

“……아야!”

갑자기 딱밤을 맞아버렸다.

조정현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이마를 한 손으로 누르고 지승혁을 쳐다봤다.

“정신 차리고 나가 봐요.”

아주 잠깐 멍해져 있던 건데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아차릴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던 걸까. 너무 민망해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보며 뻗었던 팔을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일련의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정현은 당황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조정현은 소파에 앉아 김밥을 내려놓고 하나를 입에 넣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 적막한 가운데 김밥을 싼 호일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음식을 우물거리며 지승혁의 사무실을 쳐다보았지만 블라인드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냉랭하게 말하고는 있으나 실제로 지승혁이 한 행동은 갈 곳 없는 조정현을 사무실에 머물게 해주고 식사를 거를 상황에 김밥도 돌려줬다.

말이 아니라 지승혁의 행동을 봐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면.

마지막엔 영문 모를 딱밤을 맞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지승혁은 조정현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것도 조정현에게 충고를 해주기 위함이 아닌가. 식사를 거르는 게 걱정이 되어 김밥을 사간 조정현에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

어느 모로 보나 지승혁은 조정현을 많이 봐주고 있었다.

삼각김밥이 아니라 제대로 속을 꽉꽉 채워 만든 김밥은 오랜만에 먹어봤다. 덕분에 전에 없이 속이 든든했다.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뽑아 먹으며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이 퇴근 시간이 되고 시간이 지나 당직을 선 직원도 자러 들어갔다.

모포를 두른 조정현이 소파에 누웠다.

춥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예 실외에서 지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았다. 빌딩 화장실에는 온수도 나와 씻을 때 불편함도 없었고 여차하면 차갑게 얼은 손을 녹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차가웠던 가죽 소파는 어느새 조정현의 체온으로 조금씩 데워졌다.

핸드폰으로 구인 사이트를 들여다보던 조정현은 감기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얼마 가지 않아 잠들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누군가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지승혁이 보였다.

“……헉.”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조정현은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알람 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보니 지승혁이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출근했다.

“오, 오늘 일찍 나오셨네요?”

“따라와요.”

“네?”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지승혁을 보며 조정현은 꾸물꾸물 일어났다. 추위 때문에 몸이 굳어 재빠르게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추위에 언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곧 없어졌다.

뭐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간 조정현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지승혁이 코트를 벗으며 안쪽에 있는 소파를 턱짓했다.

“앉아요.”

“네? 네에…….”

뭘 시키려고 하기에 소파에 앉으라고 하는 걸까. 조정현은 조심스럽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편 상태로 앉아서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자요.”

“……어. 네?”

“바깥은 추우니까 여기서 자라구요.”

조정현은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이런 권유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 아뇨. 그…… 30분 뒤면 박형주 아저씨도 깨워드려야 하고요.”

“내가 시간 맞춰 깨워 줄 테니 자요.”

“…….”

조정현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온풍기를 틀어놓은 건지 빠르게 공기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바깥 사무실보다는 확실히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금방 따뜻해졌다.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조금씩 눈이 감겼다.

조정현은 입가에 침이 흐를 뻔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어?”

덮고 잔 기억이 없는데 지승혁의 롱코트를 이불 삼아 덮고 있었다. 조정현은 숨을 삼키고 코트를 옆에 치웠다. 그러고 보니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박형주를 깨워주기로 했는데 큰일 났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박형주 씨는 내가 깨워줬으니 걱정 말아요.”

그때 뒤에서 지승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아니, 저, 아니…….”

“시간 맞춰 깨워준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 그건 저를 깨워주신다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조정현은 담담하게 말하는 지승혁을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다.

“그거 다 썼어요?”

지승혁은 조정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뭘 다 쓴 거냐고 묻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한 조정현이 되물었다.

“코트요. 다 썼으면 돌려줄래요.”

“아, 네……!”

조정현은 코트를 집어 들고 걸어가 지승혁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지승혁은 달라고 했던 사람치고 바로 받아들지 않았다. 코트를 쳐다보던 지승혁의 눈동자가 조정현에게 향했다.

“따뜻했어요?”

“네. 엄청요. 아…… 감, 감사합니다.”

“옆구리 찔러서 절받는 것도 괜찮네요.”

지승혁은 그제야 조정현이 들고 있던 코트를 받아들었다. 기분 탓인지 지승혁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지승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코트에 팔을 꿰었다.

“계속 그러고 잤어요?”

“네?”

“왜 숙직실에서 안자고.”

“아뇨, 숙직실은 직원분들이 쓰셔야 하니까요.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것도 아니구요.”

“…….”

지승혁은 별다른 말없이 코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의 태도가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아 지레 찔린 조정현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면 곤란하시죠. 빨리 다른 데로 갈게요.”

“어디 갈 데 있어요?”

“네? 아뇨, 그건 아닌데…… 열심히 일 찾아보면 되니까요.”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있어요. 세상 춥게 자길래 물어본 거였으니까.”

지승혁은 조정현의 대답을 듣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았다.

한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지승혁의 말이 다정하게 들렸다. 기분 탓인가 싶어서 목덜미를 긁적이던 조정현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습니다’로 말이 끝났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요’로 말을 끝냈다. 그저 그뿐인데도 지승혁의 말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정신을 차린 조정현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박형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납작한 초록색 컵이 포장된 투명 비닐이 들려 있었다.

“이거 받아.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어, 감, 감사합니다.”

조정현에게 비닐을 건넨 박형주가 말했다.

“내가 산 게 아니고 사장님이 사다 주라고 한 거야. 인사는 사장님한테 해.”

“아…… 네. 네에…….”

조정현은 눈을 굴리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일할 거 없으니까 그거 먹고 좀 쉬어.”

남자는 할 말이 끝난 듯 다시 밖으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컵의 노란 뚜껑을 열고 확인해보니 내용물은 수프였다. 조정현은 멍한 얼굴로 수프를 내려다보다가 함께 있던 일회용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수프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 * *

조정현이 다시 지승혁을 만난 건 그다음 날 점심 무렵이었다.

어제 이후로 직원들이 영 뭔가를 시키려고 들지 않아서 눈치 빠르게 요령껏 이것저것 알아서 치우던 중이었다.

오늘은 운 좋게 시급도 괜찮은 일자리 면접 약속이 잡혀있었기에 어느 때보다 더욱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전화로 면접 약속을 잡을 때도 왠지 느낌이 좋았다. 일자리가 남았느냐고 전화를 걸었을 때 가게에서 조정현의 사진을 먼저 보내 달라고 하는 건 좀 이상했으나 면접 전 절차라는 설명에 급한 대로 화장실에 가서 정면 사진을 찍어 보냈다. 가게 주인은 그 뒤로 몹시 친절한 태도로 조정현과 통화하며 면접 약속을 잡았다.

숙식도 가게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해주었기에 잘만 되면 이렇게 사무실 직원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조정현은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던 직원 몇 명에게 이 소식을 얘기했고 다들 잘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거 드세요.”

“아니, 괜찮다니까.”

“믹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에헤이, 이거 참…… 그럼 잘 마시마.”

이제 박석영은 곤란한 듯 못 이기는 척 조정현이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그때 지승혁이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박석영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종이컵을 한쪽으로 밀며 감추었다.

조정현은 자신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사장실로 들어가는 지승혁을 바라보다가 곧 그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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