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4)화 (4/130)

#04

눈치껏 청소하고 있자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된 건지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나섰다.

박석영이 퇴근 전에 조용히 한구석으로 조정현을 불렀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날씨 예보에서 영하로 내려간다고 했다며 커다란 비닐 쇼핑백을 건넸다. 그는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조정현을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조정현이 사무실에 숙식을 해결하는 걸 마뜩잖게 생각하는 다른 직원 대신 일부러 당직을 바꿔 서기까지 했다.

박석영이 사채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경계도 했었다. 채무자의 아들인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영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조정현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박석영이 당직을 이유로 둘이 남았을 때 눈치를 살피며 한번 물어보기도 했었다. 박석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어린 게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렇지 뭐.” 하고 대답했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물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박석영을 형님처럼 따르던 다른 직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박석영의 죽은 아들이 살아있으면 조정현과 같은 나이라는 걸.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조정현은 박석영이 해주는 일을 무작정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조금 전에 심부름 값이라고 주는 돈까지는 정말 받을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 조정현은 박석영이 건네는 쇼핑백을 주저하며 받아들고 감사하다며 허리를 굽혀 몇 번이고 인사했다.

박석영이 퇴근한 후 조정현은 그가 준 커다란 비닐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안에 있는 건 패딩과 모포였다.

아무리 실내에 온풍기가 가동된다지만 새벽이면 너무 추웠고, 특히나 잠을 자면 체온이 내려가 아침에는 손이 곱아 들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는데 정말로 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무실에 당직자 한 명이 항상 근무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모두 다 퇴근했다면 조정현이 이 사무실에서 머물기란 불가능했을 거다. 오늘 당직을 서는 직원은 그나마 조정현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사는 김에 가져왔다며 컵라면 하나를 건네주었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니 꽁꽁 언 몸이 조금 녹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어떻게 하나 싶어 막막하기만 했는데 박석영을 필두로 직원들이 베풀어준 약간씩의 친절이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박석영이 워낙 인망이 좋았기에 조정현을 탐탁잖게 생각하는 다른 직원도 대놓고 내쫓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방법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수중에 가진 돈은 이제 2만 원 남짓이었다.

이곳 직원들의 배려로 가끔 음식을 사주는 걸 먹을 때도 있긴 하지만 지금 조정현의 주식은 가장 싼 삼각김밥이었다. 차비 문제도 있었기에 무턱대고 되는대로 면접을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숙식이 가능한 알바를 구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조정현은 남자가 먹고 남은 자리를 치웠다.

한참을 핸드폰으로 스포츠 중계를 보던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나 숙직실에서 좀 자고 올 테니까 일 있으면 불러라. 일없어도 5시 반엔 깨우고.”

“아, 네에. 들어가세요.”

조정현은 남자가 쓰다가 두고 들어간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았다. 부모님과는 연락되지 않았고 이럴 때 연락을 할 만한 친구 또한 없었다.

사무실 사람들과는 연락이 되는 걸까.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물끄러미 핸드폰을 보던 조정현은 미련을 털듯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박석영이 준 패딩을 껴입고 모포를 둘렀지만 벌써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사무실에서 전등 두 개만 켜놓은 채라 그런지 적막하고 썰렁하게 느끼곤 했는데 오늘은 유난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알람 울릴 시간이 되었다. 미리 일어나서 다행이었다. 가끔 잠버릇이 안 좋은 직원은 알람이 울리면 짜증을 내곤 했다. 핸드폰에서 알람 설정을 해지하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조정현은 코를 골며 자는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남자가 일어나 씻고 나오는 틈을 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니 찬바람이 훅 들이닥쳤다. 몸을 부르르 떨며 옷을 챙겨 입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지승혁이었다.

조정현은 순간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몸을 굳혔다. 박석영은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왜 여기 아직도 있냐고 하면 어쩌지 싶어져 주눅이 들었다. 조정현은 남자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서서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나오셨습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지승혁이 조정현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순간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하시고, 영업 건 있으면 나가봐도 됩니다.”

“예.”

지승혁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해서 사무실 직원들이 서류를 가지고 몇 번 들락거리긴 했지만 지승혁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하러 사람들이 나가는데도 그는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밥도 거르고 일을 할 게 있는 걸까 싶어 사무실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정현은 일단 밖으로 나와 언제나 삼각김밥을 샀던 근처 편의점을 지나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나온 조정현의 손에는 참치김밥 한 줄이 담긴 까만 비닐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무실 안은 아직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조용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틈 사이가 밝은 걸로 봐선 지승혁은 아직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조정현은 걸을 때 나는 비닐봉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김밥을 품에 안았다. 문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들이마신 조정현은 결심한 듯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저기.”

책상에 앉아 한창 서류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조정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눈빛이 형형한 게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조정현은 빠르게 책상 쪽으로 달려가 품에 안고 있던 김밥을 내려놓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용한 실내 공기가 무거웠다.

“점, 점심 거르시는 것 같아서요. 그거, 드시고 하라고 사왔, 어요……. 감사해서요, 저어, 여기서 머무르게 해주신 거요. 이상한 거 아니구요. 요 앞에 김밥집에서 진짜 바로 포장해 온 거예요.”

괜한 참견이었을까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무실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질 못해서인지 말이 엉키는 것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쨌건 조정현은 지승혁의 묵인하에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이 정도의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지승혁은 비닐봉지 안을 흘긋 보더니 조정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걸 사 왔습니까?”

“어, 네에. 참치김밥인데, 혹시 싫어하지 않으시면 드세요.”

“한 개뿐인데 조정현 씨 건 어디 있습니까?”

지승혁은 생각도 못 한 걸 물어봐 왔다. 조정현은 마르는 입술을 한번 축였다.

“저는 괜찮아요. 이따 저녁에 컵라면 사 먹으려구요.”

“내가 물어본 건 점심을 어떻게 해결했냐는 건데.”

“……아.”

지승혁이 조정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 남자의 눈매가 뭔가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수가 있지. 마치 광선이라도 쏘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바늘 위에 서 있는 것 같이 안절부절못하던 조정현이 밖으로 나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지승혁은 ‘저녁 얘기를 하는 걸 보니,’ 하며 말문을 열었다.

“본인 점심도 거르고 내 밥을 사 왔다는 겁니까? 아양이 아니고 감사한 마음에서?”

굳이 어제 했던 말을 또다시 끄집어 입에 올린 지승혁을 한번 쳐다보고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왜 지승혁은 굳이 이렇게 밉살스럽게 말을 하는 걸까 싶었지만 금방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승혁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반응이다.

조정현은 수십억 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달아난 채무자의 하나 남은 자식이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이 채권자에게 밥 먹고 일하라며 김밥을 사다 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마 없을 거다.

비꼬는 거냐고 하거나 돈이나 가져오라고 성질을 내겠지. 말로만 비꼬는 데에 그치는 거라면 차라리 양반이다.

조정현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니에요.”

인기척이 들린다 했더니 지승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정현에게로 다가갔다. 조정현이 반사적으로 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그 반응을 빤히 보던 지승혁이 물었다.

“지금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습니까?”

“네? 아니, 그리 많지는 않……. 만 칠천 원요.”

말을 하고 나니 더욱 겸연쩍어졌다. 혹시 이거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바로 꺼내 드리는 게 맞겠지 싶어 주머니로 손을 넣었을 때였다.

“이건 조정현 씨가 드십시오.”

“네?”

조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지승혁의 손에 조정현이 사 온 김밥이 들려있었다. 조정현이 그것과 지승혁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자 그가 재촉하듯 김밥을 쥔 손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조정현이 엉겁결에 받아들고 말았다.

바스락, 비닐 소리가 났다.

“전 재산 만 칠천 원 가진 사람한테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사채를 굴리긴 하는데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

“아니, 이건…… 저어……?”

“이만 나가보십시오.”

더 이상 항의도 하지 못할 만큼 단호한 음색으로 말하는 바람에 조정현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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