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야야, 그러지 말고 여기도 좀 치워라.”
“아, 네……! 잠시만요.”
“거, 형님. 담배꽁초 두 개밖에 없는데 뭘 치워요.”
“꼬맹아, 일거리 주는데 싫으냐?”
“아니에요. 괜찮아요.”
“심부름했으니 심부름비를 줘야지. 이리 온나.”
“네? 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 정말 괜찮아요.”
“어른이 돈을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
이 앳된 목소리는 분명히 기억에 있었다.
지승혁의 기억하는 바로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사이가 저렇게 살가울 리가 없었다. 지승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고 서윤영은 그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볼까요.”
서윤영이 슬며시 물어보는 것에 지승혁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왜요.”
“사장님 지금 표정이…… 아닙니다.”
서윤영은 더 이상 말하는 걸 포기한 듯 어물쩍 말을 흐렸다.
“들어가서 목이라도 비틀까 봐 그럽니까?”
“…….”
농담이랍시고 건넨 말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입 부근을 한번 문지른 지승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쪽 구석에 모여서 노닥거리던 직원들이 지승혁을 보곤 웃음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사람이 심상찮은 공기를 느끼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이 벌어지며 어,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조정현 씨.”
“……어, 사장님, 오셨어요. 오늘은 사무실에 오지 않으실 거라고 들었, 아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게 쏠리는 시선을 느낀 조정현이 말을 바꿨다.
지승혁은 안색이 창백해진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사장인 자신의 일과를 공유할 정도로 친해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승혁은 슬슬 눈치를 살피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갚기 어려울 텐데요. 아니면, 잘 좀 봐달라고 아양이라도 부리고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아양 부릴 상대를 잘못 짚었습니다.”
조정현의 둥그런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거침없이 모욕하는 말이 쏟아져 나오자 그곳에 있던 전원이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감히 지승혁에게 뭐라고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에게는, 특히나 오냐오냐 자랐을 것이 분명한 아이에겐 처음 경험하는 비아냥일 것이다. 울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조정현은 몇 번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입술이 더욱 진하게 됐다.
“되게…….”
숨을 들이마시는지 가슴이 부풀었다.
“못되게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나온 말은 지승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지승혁을 올려다보는 조정현의 얼굴은 여전히 붉어진 채였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툭 치면 울 것 같이 눈도 커다래선, 그래도 할 말은 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박 팀장님, 잠깐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지승혁은 흘긋 조정현에게 시선을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지승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호출했다는 사실에 퍽 당황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정현을 꼬맹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하던 중년 남자가 일어나 지승혁의 뒤를 따랐다.
묵직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간 지승혁이 박석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은 박석영을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가죽 소파의 나쁜 점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난다는 거였고, 좋은 점 역시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난다는 거였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에 조금만 움직여도 나는 소음은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바를 박석영 역시 알고 있는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딱 각을 잡고 있었다.
벽시계의 초침이 두어 바퀴를 돌았을 때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왜 나한테 그 얘기가 안 들어온 겁니까.”
“죄송합니다.”
“덮어놓고 잘못했다는 소리 들으려고 물어본 게 아닙니다.”
“여기 건물 청소가 시원찮아서, 그, 사정이 좀 딱하기도 하고…….”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여기에서 숙식시키면서 데리고 있습니까?”
지승혁의 말에 그곳에 있던 박석영의 입이 꽉 다물렸다.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꽉 막힌 침묵이 다시 한번 들이닥쳤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적막을 깨고 들려온 소리에 지승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작달막한 얼굴이 보였다.
“저, 죄송합니다.”
일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박석영이 황급히 지승혁의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조정현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안으로 들어와 지승혁 쪽으로 다가왔다. 피부가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틀어쥔 거로 봐서는 겁이 나는 걸 참고 있었다. 지승혁의 시선이 천천히 조정현의 얼굴로 움직였다.
“그래서요.”
“예?”
“할 말 있으니까 들어온 거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 요량이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말이 끝나자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뭐, 뭐라고 하실 거면 저한테 해주세요. 제가 억지로 무리하게 여기 있겠다고 고집부린 거고, 이분들은 저한테 친절하게 해주신 것밖에 없어요.”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예상외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잠자코 듣는 지승혁의 태도에 용기를 얻은 건지 조정현은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여기서 있는 게 곤란하셨다면 처음에 제가 여쭤봤을 때 그렇게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때는 알아서 하라고 하셔 놓고 지금 와서 뭐라고 하시는 건 조,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것 봐라.
지승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한 상태에서 말을 마쳤다.
지승혁은 자신의 눈빛이 어떤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워낙 형형해서 감히 마주 보기가 무섭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새파란 어린애가 그런 지승혁의 눈을 마주 보며 항의하고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하, 하고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박석영이 굳었다.
“그리고 또 할 말 있습니까.”
지승혁이 묻자 조정현은 큰 눈을 깜빡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조, 조금 전에, 그, 아양 부리는 거냐고 하신 거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호의로…… 호의라는 말도 이상하지만 일자리 알아볼 동안 저 여기에서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한 거예요. 별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한 게 아니라요.”
“감사한 마음에서 말입니까.”
“네. ……제, 제가 여기 청소하면서 빚 좀 감면해달라고 하면 해주실 거예요?”
지승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그쵸? 그렇게 하기에는 어마어마한 액수라는 거 알아요. 그, 그리고 저도 그런 거 바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럴 만큼 여, 염치없지 않고요.”
통통한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조정현은 긴장하고 있는 게 여실히 몸으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꿋꿋하게 말했다.
지승혁은 조정현을 응시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보다도 한참이나 작고 마른 몸으로 겁도 없이 말하는 게 신선해 보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박석영도 185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지승혁에게는 차마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지승혁과의 관계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승혁이 극우성 알파라서 지닌 위압감이 작용해서였다. 극우성 알파가 갖는 특유의 분위기는 베타에게도 통용이 됐다. 하물며 조정현은 열성 오메가다. 베타보다 감수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텐데.
지승혁의 동공이 팽창했다.
더 몰아붙이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윽박지르면 그대로 팔랑팔랑 날아갈 것 같은 어린애가 부들부들 떨면서 지승혁의 직원을 비호하고 나섰는데 이 이상 윽박지르는 것도 영 모양이 안 좋았다.
그동안 없던 양심이 피곤함을 틈타 삐죽 고개를 들이민 모양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침묵을 깨며 지승혁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눈은 무슨 왕방울만 해서는.”
“네? 못,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하셨어요?”
작게 중얼거린 걸 또 들은 모양이다. 조정현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있을 법도 한데 굳이 물어보는 걸 보면 겁을 먹은 건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사흘 동안 다섯 시간도 못 자서 아주 피곤하거든요. 더 얘기할 거 없으면 비키십시오.”
박석영이 둥그런 눈을 더 크게 뜨는 조정현의 팔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걸 보며 지승혁은 사무실을 나섰다.
* * *
말 맺음도 없이 그대로 바람처럼 나가버린 지승혁을 보며 조정현은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려던 조정현의 팔을 박석영이 잡아채 가만히 있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지승혁의 모습이 사라지자 박석영이 조정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가볍게 치는 걸 텐데도 워낙 손길이 억세서인지 몸통이 울렸다.
“야, 꼬맹아. 너 운 좋다. 여기 좀 더 있어도 되겠는데……!”
“어……. ……나가라는 의미 아니실까요?”
“아이그. 사장님이 그런 건 또 철저해서 내보낼 거였으면 처음부터 아예 나가라고 했을 거야. 말씀이 없다는 건 그냥 있어도 된다는 거라고.”
조정현은 눈썹을 모았다.
“그럴까요……?”
“그럼, 그럼. 아, 잘됐다. 아이구, 불려 왔을 때는 오줌 지리는 줄 알았네.”
몸서리를 치며 나가는 박석영을 보며 조정현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영 미심쩍었으나 박석영이 지승혁의 성향을 잘 알고 있을 테니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