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화 (1/130)

#01

“맞게 찾아왔는데…….”

목을 뒤로 젖혀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던 조정현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안에 있던 안내원에게 주소를 확인했으니 확실히 맞을 거다.

조정현은 어머니가 손에 들려주었던 편지봉투를 쥐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망정이지, 한겨울이었으면 손가락이 곱았을 게 틀림없었다. 조정현은 제 손을 한번 쥐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아까 전부터 계속 입구 근처를 서성이는 조정현을 몹시 유의하며 보고 있는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경비원이 마음먹은 듯 조정현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무슨 용건 때문에 오셨습니까?”

“네? 아. 아, 저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좀 더 당황스럽긴 했다. 그게요, 하고 조정현이 말문을 열었다.

“여기 30층 제오 캐피탈에 찾아왔거든요.”

“그런 업체는 저희 빌딩에 없습니다.”

“아니, 그게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조정현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실수하셨을 리 없다. 여기 이곳을 알려주며 서류를 반드시 전달하고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두 손을 꼭 붙잡으며 이렇게 염치없는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용기를 끌어냈다.

“죄송한데 제가 한 번만 가서 확인하면…….”

“자꾸 이런 식으로 저희 입주민분들에게 불편을 주시면 저희도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정현 앞에 선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조정현은 확실히 그 말도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저 혼자 보내기 못 미더우시면 같이 30층에 가셔서…….”

이어지는 끈질긴 요구에 경비원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한 발 더 다가오자 위압감이 더해져 조정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30층에 찾아오셨습니까?”

경비원과 조정현 사이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아본 곳에 있는 건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의 남자였다. 양복을 쫙 빼입은 남자를 본 경비원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가볍게 묵례했다. 아는 사이인 것 같은 반응에 조정현은 멍하게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혹시 30층에 사무실 쓰세요……?”

“이보세요.”

경비원은 날카로운 어조로 조정현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이만 가셔서 일 보세요.”

어디까지나 서글서글하지만 틈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말에 경비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저, 혹시 지승혁 사장님이세요?”

조정현은 봉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명함에서 본 이름을 대며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정현이 들고 있던 서류를 손쉽게 빼내어 갔다. 어, 하고 조정현이 놀란 목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이미 봉투 안에서 서류를 빼 들어 읽고 있었다.

빠르게 내용물을 훑어본 남자가 으흠, 하는 소리를 내며 조정현을 한번 흘끔 쳐다보았다.

돌려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맞추어 남자가 몸을 돌렸다.

“사장님.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가 서류를 건네는 게 보였다. 사장님으로 불린 남자가 서류를 받아들고 읽어 내려갔다.

사장님. 저 사람이 지승혁인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게 보던 조정현이 입을 여는 것보다 한발 빠르게 지승혁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조정현의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찬찬히 움직였다.

“지승혁이 내 이름이긴 한데.”

남자의 눈이, 안광이 유달리 형형했다. 눈동자 안쪽에 투명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그래. 마치 호랑이의 눈을 인간에게 가져다 그대로 박아놓은 것 같았다.

조정현은 뭐라 말도 못 하고 그 시선을 견뎠다.

지승혁의 꽉 다물린 입술이 열렸다.

“곤란하네. 난 살아있는 담보는 안 받는데.”

낮지만 고막에 콱 박히는 목소리였다.

지승혁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가볍게 흔들며 물어보았다.

“이거, 무슨 내용인지 봤어요?”

“네? 아뇨. ……내용을 봐도 모를 테니 열어보지 말라고 해서요, 아, 저희 어머니가요. 그래서…….”

더듬거리며 말하는 걸 듣던 지승혁은 코웃음을 쳤다.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조정현을 앞에 두고 지승혁은 옆에 있는 남자에게 눈짓했다. 건물 안으로 향하는 사장을 보던 조정현에게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서서 얘기하는 것도 뭐 하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 아. 네에.”

경비원은 두 사람과 함께 들어가는 조정현을,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조정현이 생각난 듯 물었다.

“……어, 근데 제오 캐피탈에서 일하는 분들 맞으시죠……?”

“빨리도 확인하시네요.”

“…….”

감추려는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비웃음이 서린 대꾸에 할 말을 잃은 조정현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지승혁 대신 대답한 남자가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눌렀다.

30이라는 버튼 판에 불빛이 들어와 있는 걸 확인한 조정현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함께 탄 다른 사람도 없었다. 세 사람 사이의 침묵에 숨이 막혔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움직여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쾌한 알림 음을 내며 문이 열리고 제일 마지막에 내린 조정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제오 캐피탈은 한 층을 전부 사용하고 있었다. 멀끔하게 책상도 전부 갖춰두고 있었기에 어디로 보나 제대로 된 사무실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명패가 달리 없다는 게 이상했다.

“자아, 안으로 들어갑시다.”

가만히 서 있는 조정현에게 남자가 말했다.

지승혁은 이미 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인지 자신과 남자만 서 있었다. 조정현이 남자와 함께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다들 덩치가 큰 남자들만 있었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쪽은 화이트톤으로 말끔하게 해두었는데, 이 방은 조금 더 편안하게 꾸며져 있었다. 푹신해 보이는 암갈색의 소파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남자는 제일 먼저 창에 설치된 블라인드를 움직여 바깥에서 안을 보이지 않게 가렸다.

소파에 앉을 정도로 편한 상태가 아닌 조정현은 문쪽에 붙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만히 서서 그가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사장님이 나오시려면 좀 시간이 걸릴 테니까 앉으세요.”

남자가 자리에 앉으라 권하자, 그제야 조정현은 조심조심 다가와 소파 끝에 엉덩이만 걸쳤다. 어떤 차를 마실 거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얼떨떨하게 아무거나 괜찮다고 답한 조정현의 앞에 나온 건 현미 녹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이었다.

차를 내준 후 남자가 자리를 비웠다.

작은 방에서 혼자 남게 된 조정현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내쉬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해보니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기계음만 들려왔다.

일련의 상황이 현실감 없었다. 이 상황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조정현은 저릿한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블라인드 탓에 전화를 받거나 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조금 지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빠릿하게 몸을 긴장시킨 조정현이 고개를 돌렸다.

사장이었다.

망설임 없이 문을 닫자 바람에 블라인드가 짜락거리면서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지승혁은 큰 보폭으로 몇 걸음 만에 조정현의 맞은편까지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에 조정현이 들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조정현 씨?”

“네, 네?”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조정현이 몸을 퍼득 떨었다.

“여기 왜 오게 된 건지는 압니까?”

“네? 어……. 그러니까.”

“조정현 씨가 들고 온 서류가 뭔지도 안 봤다고 했죠.”

“……네.”

남자의 눈이 조정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며 조정현이 다리를 꼼질거렸다.

“순진한 건지 뭔지.” 하고 어이없는 듯 지승혁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정현 씨의 부모님, 그러니까 현무 실업의 사장님께서 저한테 대출을 해갔습니다.”

“…….”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 만기일이 일주일 전이었고.”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채무를 갚는다고 연락이 왔는데 이걸 조정현 씨 편에 들려 보냈네요?”

일견 나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목소리였지만 지승혁의 눈빛이 워낙 형형해서 그런 느낌이 희석되었다. 조정현은 고개를 숙여 지승혁이 내민 서류에 시선을 던졌다.

[담보 제공 증서]

[친권 및 양육권 포기각서]

제일 크게 적혀진 제목들 밑에는 어려운 용어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내용을 살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등에 차가운 철판을 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조정현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가 빚 대신 맡겨진 건가요?”

“이해가 빠르네요.”

“그렇군요.”

조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살아있는 담보는 안 받아요. 이것저것 번잡스럽거든요. 그러니 조정현 씨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냥 보내줄 수도 있습니다.”

의외의 제안에 조정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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