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귀환, 그 후의 이야기 6화
드드드드드드드
한수호가 주먹에 힘을 준 것만으로 땅이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케이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화내봐야 늦었다. 네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만 귀환이 늦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 역시 사실이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살려라.”
케이시는 한수호가 게이트를 넘어간 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모두 다 설명해 줬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또 다른 서은채에 대한 것도 전혀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그게 2시간 전이라고 했지?”
“이미 늦었다고.”
“정확한 위치가 어디야?”
한수호는 케이시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다른 세상에서 온 서은채가 소멸된 위치를 묻고 있었다.
“저기. 좌표라도 찍어주랴?”
케이시가 가리킨 하늘엔 희뿌연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먹구름 속에선 새파란 벼락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곳을 빤히 바라보던 한수호.
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사라진 한수호가 다시 나타난 곳은 2시간 전 서은채가 폭발에 휩쓸려 가루가 되어 사라진 허공이었다.
한수호는 아무런 비행 장비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중에 떠 있었다.
허공에 둥둥 뜬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한수호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개조 특성을 발동시켰다.
후우우우웅
막대한 마나력이 손을 통해 뿜어져 나온 순간,
>>사령마로 개조를 원하는 대상을 선택하세요.
-방태식(유대감 88%)
-노희경(유대감 85%)
-송혁(유대감 83%)
-권현태(유대감 61%)
-박현주(유대감 50%)
…
..
한수호의 감긴 눈 위로 수많은 이름이 주르륵 떠올랐다.
단 한 번이라도 한수호와 마주친 적이 있었던,
그리고 목숨을 잃은 지 아직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역시나 없나…?’
한수호는 눈을 떴다.
원래 그는 2시간 전에 죽었다는 다른 세상의 서은채를 사령마로 불러낼 생각이었다.
다른 세상의 서은채라고 해도 한수호와의 유대감은 90%이상이 나올 테니 이름만 뜬다면 완벽에 가깝게 사령마로 소환해 낼 수 있었다.
한수호는 그녀를 소환해 자세한 것들을 묻고자 했다.
케이시에게 그녀에 대한 설명을 대충 듣기는 했지만, 직접 듣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서은채의 이름은 사령마의 대상자에 올라 있지 않았다.
‘나와 은채가 하필이면 이 시간대로 귀환하게 된 이유와도 관계가 깊을 것 같구나.’
모든 건 시공간적인 왜곡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세계수가 스스로 안배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수호는 분명 게이트를 넘어 아스루나로 향했던 그 직후의 시간대로 게이트를 열고자 했지만, 결국 1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으로 게이트가 열려버렸다.
그 이유는 바로 다른 세상에서 온 서은채 때문이리라.
다른 세상의 서은채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있기 때문에 본래 이쪽 세상에 속해있던 서은채가 동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다른 서은채가 소멸되자 그 시점에 딱 맞게 게이트가 열린 것.
그러니 한수호가 사령마 특성을 발동시켰어도 서은채의 이름은 뜨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후…. 이 많은 사람이 다 목숨을 잃은 건가….”
한수호는 이제야 사령마로 삼을 수 있는 명단에 익숙한 이름들이 상당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태식부터 노희경, 송혁, 권현태에 박현주까지.
한수호와는 직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잠시나마 함께 힘을 모아 적과 싸웠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송혁 같은 경우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사적인 만남도 가졌던 인물이기에 그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한수호는 송혁과 권현태, 박현주 등을 사령마로 삼아 현세에 소환할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송혁의 자식인 송지문과 송유나를 위해서라도.
권현태의 양아들이자 한수호의 친형인 한성찬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박현주가 친딸처럼 돌봐준 이하윤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사령마를 삼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으니까.
한수호는 개조 특성을 캔슬시켰다. 그리고 수킬로미터를 뒤덮은 먹구름과 벼락을 향해 왼손을 쭉 펼쳐냈다.
“쇼크이터.”
작게 중얼거린 한마디.
그 순간 서울 상공을 꽉 채우며 펼쳐져 있던 먹구름과 벼락들이 순식간에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쑤아아아아아아악!
단 세 호흡만에 서울 상공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한수호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볍게 해치워 버리고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한수호가 내려선 곳은 우연히도 광화문 앞 광장이었다.
고층 빌딩들이 무너지며 사방이 폐허로 가득했지만, 이곳만큼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깨끗했고 조용했다.
한수호는 고개를 들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올려다봤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자세로 세상을 굽어보며 앉아 있는 이순신 장군.
그런데 그 동상의 무릎 위에 뭔가 반짝이는 물건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스코프가 달린 라이플이었다.
‘델링그?’
한수호는 그 라이플이 다름 아닌 델링그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봤다.
손을 뻗어내자 델링그가 염동력의 힘에 이끌려 한수호의 손에 스스로 날아와 잡혔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또 다른 은채가 있었고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거구나.’
과거의 한수호의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지구로 귀환해야 했던 또 다른 서은채.
그녀는 결국 행복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낯선 세상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오빠!”
그때 한수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폐허나 다름없는 도심 쪽에서 서은채와 제복을 입은 요원 몇 명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푸스스스….
한수호가 손에 쥐고 있던 델링그가 갑자기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졌다.
한수호는 무의식중에 흩날리는 가루를 잡고자 손을 허우적거렸다.
“오빠, 괜찮아?”
어느새 서은채가 다가와 헛손질하는 한수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응? 어….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나도 이야기 들었어. 때마침 재우 오빠랑 재희 언니가 나타나 줘서 모든 걸 설명해 줬어.”
“…!”
그제야 한수호는 서은채와 같이 온 특무부 요원들이 김재우와 윤재희 커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는 무슨 아야! 너, 이 자식! 고작 1년 남짓 못 봤다고 이 형까지 까먹은 거냐?”
“그러게. 우리가 자기 어려울 때 얼마나 도움을 많이 줬는데, 이제 와서 모르쇠라니. 너무 서러운데?”
김재우와 윤재희는 수많은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아끼는 사람들의 죽음이 가져다준 고통을 가리기 위해 과장된 말과 행동을 보였다.
한수호가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억지로 멀쩡한 척할 필요 없어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됩니다.”
“한수호, 너….”
김재우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윤재희는 아예 등을 돌린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흐윽…. 너무 많이 죽었다고. 너무 많이.”
그런 윤재희에게 서은채가 다가가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때 한수호가 맑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두 분은 살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은 점점 더 무거워지더라고요. 안타깝게 희생된 분들께 죄송하나, 저와 가까운 분들은 목숨을 잃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한수호는 그리움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귀환하자마자 보게 된 참혹한 현장.
그 끔찍한 폭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 안에 한수호가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라 여겼던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다 해도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한수호도 사람이었고,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이곳에 남겨졌던 사람들에겐 1년이었지만, 한수호와 서은채에겐 10년이었다.
그 차이는 결코 작지가 않았다.
“10년을 보냈다는 녀석이 얼굴은 어째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그것도 복이다, 복. 후…. 아무튼, 이제 어떡 할거냐? 놈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다.”
김재우는 정신을 차리고 뒷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400명에 가까운 마공사들의 희생으로 20기의 핵 미사일은 어떡하든 막아냈지만, 이다음이 문제였다.
아무리 사대강국의 수뇌들이 모두 암살됐다고는 하나, 그들의 정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기에 암살 사건이 수습되는 대로 대규모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 공세가 이번처럼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식일지, 아니면 대규모의 군사력을 이용해 직접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방식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본보기를 보여야겠죠.”
“본보기?”
“일단, 태극서가로 모두 모이게 해주세요.”
“이젠 우리 마공사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정부와 협조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또다시 같은 비극을 마주하게 될 뿐이야.”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날 믿어요, 형.”
한수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김재우를 바라봤다.
이전의 한수호는 어린 나이와는 달리 눈빛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끝없는 믿음이 알아서 피어올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눈빛이 깊어져 있었다.
한수호는 더 이상 어린 학생이 아니었다.
“바로 연락을 취하마.”
“태극서가 주변에 재밍막을 설치해 줘요. 아직은 제가 귀환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져선 안 됩니다.”
“알겠다.”
김재우는 바로 핫라인을 가동시켰다.
이런 일을 대비해 주요 인물들에게 직접 연락이 닿을 수 있게 구축한 비상 연락체계였다.
김재우가 한수호의 부탁을 처리하는 사이 케이시가 구덩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수호 자식은 뭔 짓을 했길래 하늘이 저토록 깨끗해진 거야?”
핵폭발로 낙진을 품은 검은 구름이 벼락까지 가득 싣고 지상으로 하강하는 중이었는데, 지금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이건 케이시로서도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케이시. 거기서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포탈이나 열어봐.”
“포탈? 무슨 포탈?”
“서울에 떨어진 핵 미사일이 여섯 기라고 했지?”
“그랬지.”
“전부 미국에서 쏜 건 아닐 테고. 어디 어디야?”
“미국에서 두 발, 일본에서 한 발, 중국에서 세 발.”
케이시는 서울 상공으로 떨어져 내리던 핵 미사일이 어디에서 쏘아 보낸 것인지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빠졌네?”
“대신 러시아는 제주도에 두 발, 부산에 네 발을 쐈다.”
“하…. 개새끼들. 그 와중에도 어떡하든 일본에 가까운 곳에 더 큰 폭발을 일으키겠다고 계산까지 하셨어.”
한수호는 러시아가 이 기회를 이용해 일본에도 타격을 입히려고 핵 미사일을 대한민국의 동남쪽 지역에 집중시켰음을 바로 알아챘다.
“그런 건 모르겠고, 어디로 무슨 포탈을 열라는 건지, 그것부터 말해봐라.”
“일단, 일본 홋카이도로 간다.”
“뭐? 거긴 뭐 하러?”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설마…. 너?”
케이시는 한수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은채야. 넌 재우 형하고 같이 태극서가에 가 있어. 1시간 안에 돌아갈 테니까.”
한수호가 한 말에 서은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혼자는 안 가. 혼자 가기 싫어.”
서은채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다른 세상의 서은채가 이곳에 왔다가 두 시간 전의 핵폭발로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수호와 떨어져 홀로 이곳에 왔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서은채는 그 원인이 바로 한수호와 따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한수호도 알기에 혼자 가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럼, 함께 가자.”
한수호가 손을 내밀었고 서은채는 바로 그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케이시가 눈을 흘겨 떴다.
“너희 둘…. 내 앞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관심 끄고 포탈이나 열지?”
“여긴 2053년의 지구다. 아스루나가 아니야.”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여기서 넌 스무 살이고, 서은채는 열여섯이다.”
“….”
케이시의 말에 그제서야 한수호는 상황을 인지했다.
그와 서은채는 아스루나에서 10년을 보냈으니 나이로 따지면 스물아홉과 스물다섯이지만, 2053년도의 지구로 귀환한 이상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 되는 것이다.
즉, 법적으로 서은채는 아직 열여섯 살의 미성년자라는 것.
서은채도 케이시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는지 살짝 난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때 한수호가 머리를 휘휘 젓더니 서은채에게 말했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할 일에 집중하자.”
“어? 으, 응….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서은채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수호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