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한수호가 제단 앞 10여 미터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르릉
제단이 놓인 곳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더니, 제단 뒤쪽의 벽이 통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벽 반대 쪽에는 거대한 크기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의자 위엔 압도적인 존재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앉은 상태에서만 10미터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그건, 바로 발록이었다.
온몸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발록은 두 개의 뿔과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었으며 의자 옆에는 자기 키만 한 대검을 세워둔 상태였다.
놈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다.
벽이 완전히 회전을 마쳤을 때, 발록이 감고있던 눈을 뜨며 샛노란 빛을 번뜩였다.
[가디언 발록]
-발자크의 봉인을 지키기 위한 가디언입니다.
-마나: 40,000
무려 마나 4만짜리의 몬스터.
확실히 발자크의 봉인구가 숨겨진 장소라 그런지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엄청났다.
발록은 일행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마치 건물이 일어서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발록이 내뿜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그와 동시에,
우드드드득
통로 좌우에 가득 늘어서 있던 오크 동상들이 기지개를 켜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입니다.”
한수호가 한 말에 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너흰 안으로 들어가라.”
신유가 이 이상 안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했기에 이곳에 남아 퇴로를 지키기로 한 것.
한수호는 슬슬 뒤로 물러나며 발록이 앞으로 나오게끔 유도했다.
크르르르르르
발록이 으르렁거리며 입 사이로 붉은 화염을 흘려냈다.
쿠웅. 쿵.
발록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전이 흔들렸다.
놈이 오른손에 쥔 대검은 바닥에 질질 끌리며 깊은 골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 발.을. 디.딘. 자.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인.다.”
발록은 딱딱 끊어지는 말을 흘리며 대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후우우우웅웅
무려 8미터나 되는 거대한 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꽈아아아앙!
대검이 바닥을 내려친 순간, 폭발이 일었고 수많은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한수호 일행은 대검의 공격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방으로 튀는 돌조각들을 전부 피해낼 수 없었다.
일행들은 손과 무기로 돌조각들을 쳐내거나 마나장막을 펼쳐 충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부우우웅.
후우우우웅!
꽈앙!
꽈과과과광!
발록이 휘두르는 검은 끔찍할 정도로 강력했다.
대검을 베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둔기처럼 때려부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발록은 신전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내고, 기둥들도 거침없이 박살 냈다.
더불어 2백에 가까운 오크 동상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고 있어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한수호는 일행들에게 신호를 줬다.
신유가 굴절 특성으로 발록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내는 찰나, 한수호와 다른 일행들은 재빨리 옆으로 빠져나와 제단 쪽으로 달렸다.
이에 발록이 분기탱천 했는지 그 자리를 박차며 높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한수호 일행들을 향해 대검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 순간,
“어딜!”
어느새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신유가 다시 한번 굴절 특성을 사용했다.
부아아아아앙!
공간 전체를 찍어 누르며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대검.
그 대검이 신유의 몸 바로 위에 도달했을 때, 마치 비스듬한 벽에 빗겨 맞은 듯 옆으로 미끄러졌고,
쿠아아아아아앙!
애꿎은 제단을 반으로 박살내며 바닥에 쑤셔 박혔다.
그사이 한수호는 발록이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어 기관을 작동시켰다.
끼리릭
기관음이 들리며 벽이 또 다시 통째로 회전했다.
회전판 위에는 한수호와 일행들이 있었고,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신유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일행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발록은 그제야 박혀있던 대검을 다시 뽑아 들었고, 벽 뒤로 사라져가는 한수호 일행들을 노려보며 무섭게 포효했다.
* * *
벽의 회전이 끝났을 때,
한수호와 일행들은 가로 20미터, 세로 2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동굴을 맞이했다.
동굴은 대형 터널과 흡사했는데,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동굴 끝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밖은 아저씨한테 맡기고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위해 계속 움직이자고.”
한수호는 일행들을 독려하고는 동굴의 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굴은 생각보다 길었다.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끝에 다가갈수록 은은했던 빛은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끝에 도착했을 때, 한수호는 동굴 밖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하고, 또 거대한 대공동.
동굴 끝은 삐쭉 솟아나온 절벽처럼 되어 있었고, 반대쪽에도 똑같은 형태의 절벽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이 두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텅 비어있는 대공동이었다.
대공동의 천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으며, 건너편 끝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절벽 아래로는 새빨간 뭔가가 끊임없이 유동하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용암의 강이었다.
한수호는 초감각을 동원해 이 대공동의 지름이 대략 300미터나 되는 거대한 공간임을 확인했다.
이 대공동을 출입할 수 있는 출입구는 단 두 곳.
일행이 있는 이곳과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반대쪽 절벽뿐이었다.
반대쪽 절벽에도 똑같은 형태의 동굴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200미터나 되는 허공을 건너뛰어 반대쪽 동굴로 가야 하는 모양.
고니를 비행선으로 변신시켜 건너가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이 대공동의 용암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너도 느끼고 있지? 용암 아래에 뭔가 엄청난 것이 있다.”
케이시는 고룡답게 용암 아래의 존재를 바로 감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쪽으로 건너갈 때를 노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당연하지.”
한수호는 바로 고니에게 비행선으로 변신할 것을 지시했다.
빠르게 변신을 마친 고니는 절벽 끝에 두둥실 떠서 일행들이 승선하기를 기다렸다.
한수호를 시작으로 일행 아홉이 모두 올라타자 비행선은 더욱 높게 날아올라 건너편 절벽으로 날아갔다.
위에서 내려다본 대공동 바닥은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다.
새빨간 용암의 강이 소용돌이 치면서 뜨거운 불똥들이 허공으로 팍팍 튀었고, 간혹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용암 줄기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비행선이 중간 쯤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놈이 움직인다.”
한수호는 용암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걸 바로 감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고니에게 소리쳤다.
“고니!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우릴 전부 건너편 쪽으로 튕겨버려!”
그 말이 끝나자 마자였다.
푸화아아아악!
용암의 강에서 세 개의 불기둥이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
무려 300미터 높이에 떠 있는 비행선까지 순식간에 날아오른 불의 기둥들.
그것들은 놀랍게도 뱀처럼 길쭉한 형상을 한 드래곤의 머리였다.
세 마리 불의 드래곤.
아니, 자세히 보니 세 마리가 아니라 하나의 몸통을 지닌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삼두룡.
용암을 온몸에서 뚝뚝 흘려내는 삼두룡의 등장에 일행 모두가 기겁하고 말았다.
한수호는 삼두룡의 정보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가디언 가이도]
-발자크의 봉인을 지키기 위한 가디언입니다.
-마나: 70,000
발록보다도 엄청난 존재였다.
가이도의 머리 세 개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솟아오르더니 비행선을 향해 거대한 입을 쩍 벌렸다.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촤아아아앙!
콰우우우우우우!
파랗고, 붉으며, 새하얀 세 줄기 광선이 가이도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때, 비행선의 뒷 부분이 확 올려지며 일행을 허공으로 내던져 버렸다. 동시에 비행선은 모습을 바꾸어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고니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드레고니안의 현신이었다.
허공으로 튕겨진 일행들은 다행스럽게도 반대편 절벽 위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니, 대공동의 허공에서 두 마리 드래곤이 격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이도의 덩치는 고니보다 1.5배 정도 더 컸다.
날개를 펼치면 대공동이 꽉 차보일 정도였으니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런 가이도를 상대로 고니는 조금도 물러섬 없이 거친 힘 싸움에 들어갔다.
몸통 박치기로 대공동 벽에 처박는가 하면, 가이도의 머리를 물어뜯거나 앞발로 날개를 잡아 뜯으려 했다.
치이이이이익
가이도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용암이 고니의 몸에 닿으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지만, 고니는 아무렇지 않았다.
고니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초합금은 용암의 온도쯤은 우습게 견딜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가이도의 강함은 덩치와 힘에만 있는게 아니었다.
크와아아아앙!
키아아아악!
커허어어엉!
세 개의 머리가 뿜어내는 브레스와 캐스팅도 필요없이 발동되는 마법들은 실로 무시무시 했다.
대공동 전체가 두 드래곤의 전투에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고니는 한수호를 향해 홀로그램으로 된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이놈은 나에게 맡겨라.]
자신은 걱정말고 목적한 바를 위해 움직이라는 뜻이기에 한수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가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봉인구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한수호.
일행들은 그런 한수호의 뒤를 따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아래쪽으로 비스듬하게 경사진 통로를 적어도 2킬로미터 이상은 걸어갔을 때, 그들 앞에 네 방향으로 갈라지는 교차로가 나타났다.
모두 똑같은 모양인지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상황.
한수호는 초감각으로 네 방향 모두를 훑어봤지만, 네 곳 모두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케이시. 봉인구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 어디지?”
“음….”
케이시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이 의외였다.
“네 곳에서 모두 봉인구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거 난감하군.”
케이시로서도 이해하기 힘든지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이에 한수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행 모두가 네 방향 모두를 일일이 확인하러 다니기엔 시간적인 낭비가 너무 컸다.
이제 봉인의 틈새가 언제 100%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한가롭게 움직일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한다. 모두 네 팀으로 나뉘어서 움직이고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면 즉시 연락하는 걸로.”
한수호는 혹시나 싶어 미리 준비해 놓은 단파 무전기 9개를 꺼내놨다.
그리고 하나를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팀은 어떻게 나눌 건데?”
“은채는 나와 가고, 케이시는 월과 한 팀이 된다. 윤후 너는 살이와 같이 움직이고 라라와 사툴란, 범이가 마지막 한 팀이 되면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단숨에 팀까지 나눠버린 한수호.
그에 대한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원래는 서은채와 사툴란을 한 팀으로 묶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서은채 혼자 한 팀을 맡기엔 아직 불안했기에 자신이 서은채를 돌봐주기로 한 것.
팀이 만들어지자마자 가장 왼쪽 통로를 향해 한수호와 서은채가 움직였다.
“적이 너무 강하다 싶으면 절대 무리하지 말고 연락부터 해. 난 너희들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한수호의 당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각자 맡은 통로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한수호는 서은채와 별말 없이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통로의 기울기가 점점 심해지더니 이내 나선형의 계단으로 변해버렸다.
느낌상 100미터 이상은 충분히 내려온 듯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력한 기운은 더욱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 10분쯤 지났을 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멀지 않은 곳에는 통로의 끝도 보이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통로가 끝나며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주변은 온통 검다.
마치 우주에 내던져진 것처럼 공허한 어둠의 공간.
그곳에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중심 끝부분에 거대한 사람 손 모양의 금속체가 동상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한수호는 뭔가를 움켜쥐는 듯한 손 모양의 동상으로 다가섰다.
손바닥 가운데에 둥실 떠 있는 축구공 크기의 구체.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발자크가 봉인된 봉인구가 분명했다.
하지만 개조 특성을 사용했음에도 구체의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정보 검색 실패
오랜만에 보는 실패 메시지에 한수호가 인상을 찌푸리는 그때였다.
치이이익-
무전기로 누군가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한수호! 아무래도 우리가 봉인구 발견한 것 같은데?
백윤후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봉인구라니?
한수호는 자신이 보고 있는 봉인구 말고 또 다른 봉인구가 있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케이시와 라라에게서 연달아 연락이 왔다.
-봉인구를 발견했다. 다들 이쪽으로 와라.
-봉인구가 여기에 있는데요? 이제 어쩌죠?
놀랍게도 동료들이 향한 방향 모두에서 봉인구가 발견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