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비행선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하늘로 떠올랐다.
협곡의 깊이는 100미터.
하지만, 비행선은 그보다도 훨씬 높은 상공으로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마침내 지상을 지나 200미터 정도 높이까지 도달했을 때, 비행선은 잠시 멈칫했고 곧이어 후위에서 은은한 추진음이 들리더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모두 비행선 좌우의 가장자리에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협곡.
200미터 상공에 떠올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그 넓은 대지 전체가 그랜드 케니언과 같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절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
비행선은 빠르진 않지만,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신유는 처음 보는 절경에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한수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굉장히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꺼냈다.
“아무래도 네가 회귀했다는 말은 거짓인 것 같구나.”
“…. 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에 한수호가 살짝 당황해하자, 신유가 말을 이었다.
“회귀가 아니라, 먼 미래에서 최첨단 장비를 들고 온 시간 여행자 아니냐?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 암, 그렇고말고.”
“….”
이번엔 한수호가 말을 잃었다.
사대광마라고 불리며 악명을 떨치던 혈마 신유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릴 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한수호의 표정을 읽은 신유가 겸연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누구라도 지금 이 상황을 겪으면 나처럼 생각할 테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저들처럼요.”
한수호는 백윤후와 서은채, 그리고 라라가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들 셋은 비행선 난간에 붙어서서 광활하게 펼쳐진 아스루나의 대협곡을 내려다보며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했다.
백윤후는 눈까지 감고 두 팔을 펼쳐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는 중이었고, 서은채와 라라는 서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예쁘네, 저기가 환상적이네 하며 난리였다.
그들에겐 한수호를 향한 의심이나, 의문은 전혀 없었다.
한수호가 마법을 부렸든, 미래의 첨단 장비로 이런 놀라운 일을 현실화 시켰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그들을 보고 나서야 신유도 허허롭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네 녀석이 회귀자든, 시간여행자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쳤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네, 그 말씀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말이다.”
“네?”
신유가 눈을 얇게 뜨며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한수호가 그를 바라봤다.
“이 비행선은 정말 갖고 싶구나. 좀 작아도 상관없는데, 어디서 하나 더 못 구하겠니?”
신유의 표정은 제발 부탁한다는 듯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한수호가 내놓은 대답이 의외였다.
“고니처럼 변신하는 기능까진 어렵고, 대신 지금 이 비행선보다 절반 정도 작은 건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정말이냐?”
“네. 대신 좀 비싸요.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니고요.”
“구할 수만 있다면, 가격이야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는 건, 언젠가는 완성된다는 뜻이니 그것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신유는 정말 이 비행선을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지 말해 보거라.”
“아저씨 특성인 제로 영역이요. 그걸 여기에 새겨주실 수 있나요?”
한수호는 인챈트 스톤을 꺼내 신유에게 내밀었다.
그는 이미 고니의 도움을 받아 비행선의 설계도를 만들었고, 그걸 사기환에게 전달했다.
그게 벌써 수개월 전인데다가 벌써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상태였기에 비행선이 지구의 하늘에 등장하는 시기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을 기회라고 여기고 인챈트 스톤을 꺼내든 것이다.
한수호는 비행선과 제로 영역 특성을 교환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미 아공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내 제로 영역은 왜 탐내는 거지?”
“시스템 때문입니다.”
“시스템이라니?”
“제로 영역에 제론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면서요? 그 시스템이 저에겐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게 궁금해서요.”
한수호는 제로 영역에 존재한다는 시스템 제론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와 깊은 관계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제로 영역의 열화판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흐음. 제론의 시스템이 뭔지 직접 알아보고 싶다 이거로군. 뭐, 좋다. 내걸 빼앗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거래로 주고받자는 건데 어려울 것도 없지. 너라면 제로 영역도 잘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정말 거래에 응해 주시는 겁니까?”
“왜? 이제 와서 물리려고? 그건 절대 안 되지. 사내 녀석이라면 한 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집니다, 책임진다고요. 그럼 비행선이 준비되는 시점에 바로 인챈트 스톤을 드리겠습니다.”
한수호는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신유의 제로 영역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때, 신유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왕 이야기 나온 거, 난 지금 당장 계산을 치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구나.”
신유는 말을 하자마자 한수호의 손에 있는 인챈트 스톤을 낚아챘다.
“아직 비행선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안된 것뿐이지, 완성을 못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결제부터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라고? 아, 그리고. 비행선 가격에서 특성 값은 제하고 줄 거다.”
“물론입니다. 가격은 제가 50%까지 특별 할인해 드릴게요.”
어차피 한수호가 나중에 사기환에게 받기로 한 비행선은 설계도의 권리를 완전히 넘기는 것으로 퉁 치기로 했다.
설계도만 있으면 앞으로 사기환은 얼마든지 비행선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 1호 비행선을 서비스로 넘기는 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즉, 한수호는 사기환에게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선을 받아낼 수 있음에도 신유에게 거액을 따로 받아내려는 것이다.
한수호는 이런 거래에 있어서는 절대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신유는 곧바로 제로 영역 특성을 인챈트 스톤에 새겨넣었다.
신유가 가진 특성의 적합도는 71%.
다른 사람들보다야 높은 편이긴 하지만 본래의 제로 영역이 지닌 능력에서 상당 부분 다운그레이드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스템 능력은 그대로여서 다행이네.’
한수호는 제로 영역이 새겨진 인챈트 스톤을 들고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성석]
-보유 포인트: 500,000LP
-혈마 신유가 지닌 0티어 특성 ‘제로 영역’의 시스템이 새롭게 변형되었습니다.
-특성, ‘영역 전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성을 흡수하고 포인트를 획득하겠습니까? YES/NO
특성석에 새겨진 건 시스템 능력을 지닌 영역 전개였다.
정확히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시스템 능력을 지녔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다행이었다.
“제로 영역이 잘 새겨진 것이냐?”
신유가 스톤을 살피는 한수호에게 물었다.
“네.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거 같은데, 준비해야지?”
신유의 말대로 목표 지점이 멀지 않은 곳에 보이고 있었다.
육각형 형태로 파인 거대한 협곡.
그 협곡의 중앙엔 미국의 펜타곤처럼 생긴 육각형의 인공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1분 내에 도착이 가능할 것 같자 한수호는 짧게 고민했다.
지금 영역 전개 특성을 흡수할 것인지, 아니면 볼케스와의 일전을 끝내고 차분한 마음으로 흡수할 것인지를.
고민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굳이 뒤로 미룰 필요가 없지.’
한수호는 곧바로 스톤에 새겨진 특성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스톤에서 꽤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와 비행선을 밝게 비췄다.
수많은 문자의 띠가 한수호의 몸을 휘감다가 가슴 쪽으로 사라진 순간,
파앗!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수호는 흡수된 특성의 정보를 빠르게 확인했다.
[특성: 영역 전개]
-특성 단계: 1단계(1/5)
-마나력을 소모하여 일정 범위의 영역을 스캔하고, 그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표적 표시는 10초간 유지되며,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동시 타격이 가능합니다.
-표적 표시 가능 범위: 마나력 1천당 반경 1미터
-쿨타임: 5분
-2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1,000,000LP
예상보다 훨씬 훌륭한 특성이었다.
일정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적을 한꺼번에 표적으로 삼을 수 있고, 동시에 타격까지 가능한 특성이라니.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에 특화된 특성이었다.
게다가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제로 영역의 제론과 같은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5단계까지 진화시키면 제론 같은 A.I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는데?’
이 영역 전개에 포함된 시스템이 A.I로서 자아를 갖게 될 경우,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럼 시스템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리라.
한수호는 그런 기대감을 가지며 혼자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런 한수호를 한쪽에서 지켜보던 백윤후.
그가 옆에 있는 서은채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봐, 꼬맹이. 혼자 저렇게 음흉하게 웃는 놈이 뭐 좋다고 따라다니냐?”
“윤후 오빠는 여자들 마음을 잘 모르는구나.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는 거예요.”
“갑자기 그게 뭔 소리냐?”
“여자는요. 착해빠진 순둥이 같은 남자보다는 음흉한 늑대 같은 남자한테 더 끌리는 법이거든요.”
말을 하는 서은채가 한수호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에 백윤후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허, 어이없어. 열다섯 살 짜리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네.”
“열다섯이면 알 거 다 아는 세상이라고요.”
“어린놈이 아는 척은. 네 말은 앞뒤가 바뀌었어. 수호, 저 녀석이 나쁜 남자라서 네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수호라서 나쁜 남자도 좋아 보이는 거겠지.”
백윤후가 정곡을 찔렀는지, 서은채는 입술을 쏙 내밀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둘 다 정신 안 차려? 곧 충격이 있을 거니까 뭐라도 단단히 붙들고 있어!”
한수호가 백윤후와 서은채에게 소리쳤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급히 난간과 돛대를 붙잡자마자 전방의 육각형 건축물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쾅쾅쾅!
폭음은 한 번이 아니었다.
거대한 건축물 곳곳에서 화려한 불꽃이 일었고, 그 불꽃과 함께 커다란 화염구 다섯 개가 비행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앙! 꽈과광!
화염구들은 비행선에 닿기 직전에 투명한 막에 부딪혀 폭발해 버렸다.
비행선에는 폭발이 닿지 않았지만, 충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는지 비행선이 세차게 뒤흔들렸다.
“저 건물 뭐냐? 아스루나에 이 먼 거리까지 화염구를 쏠 수 있는 대공포가 있다니?”
강력한 대공포 공격에 신유가 황당한 듯 소리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자투스는 아스루나의 대현자로 불리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비상식적인 존재라고.”
백윤후가 한숨 섞인 말로 대답했다.
“이 상태로는 더 접근이 어렵겠네요.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죠.”
한수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행선이 빠르게 하강했다.
계속해서 뿜어지고 있는 대공포 공격을 피해 지상으로 내려선 비행선.
고니는 바닥에 닿기 직전에 형태를 변형시켜 사자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사이 한수호와 일행들은 육각형 형태의 협곡 바닥에 내려선 상태였다.
대공포를 발사하던 인공 구조물까지의 거리는 약 1킬로미터.
대충 뛰기만 해도 1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때, 인공 구조물의 한쪽 벽에 커다란 문 같은 모양으로 빛이 새겨지더니,
쿠웅
마치 성문이 쓰러지듯 벽이 크게 열렸고, 그 안에서 강력한 포스를 지닌 어떤 존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건,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늑대는 신화 속에서나 볼 법한 케르베로스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놈의 뒤에서는 백호의 호피 무늬를 그대로 빼다 박은 외형을 한 거대 오거가 나타났다.
보통의 오거보다 날렵해 보이고, 다리와 팔도 무척이나 길쭉하다.
손에는 크고 무식해 보이는 철퇴를 들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철퇴를 휙휙 돌리며 위압감을 풍겼다.
세 번째로 등장한 건 왕관을 쓴 거대한 뱀이었다.
얼핏 봐선 용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거대했는데,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모양새와 팔다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는 뱀이 확실했다.
세 마리의 엄청난 몬스터가 밖으로 나온 직후, 마지막으로 놈들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작은 존재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키보다 큰 지팡이를 들고, 괴상한 고깔모자를 쓴 길고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
한수호는 멀리서 그 노인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신체외적능력] : 2,000/9999
[신체내적능력] : 200/999
[마나] : 150,000/999999
[육체한계치] : 1/5
말도 안 되게 높은 능력치들.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높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닌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