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위이이잉
한수호는 보트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서은채가 보내준 보트는 예상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변화된 상태에 놀라 멍하니 있었던 한수호.
보트를 몰고 온 40대 아저씨가 큰 소리로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보트에 오른 한수호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이렇게나 강해질 수 있다는 건, 발자크의 지닌 강함의 수준 또한 결코 이에 못지않다는 거겠지.’
운명의 저울은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게 무게를 주지 않는다.
즉, 한수호가 이렇게 강해졌다는 건 그만큼 적의 강함도 막강하다는 뜻.
한수호는 자신이 강해진 것에 오히려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학생. 어째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보트를 운전하던 사내가 힐끔거리며 한마디 했다.
“생각이 많아서 그럽니다.”
“하긴…. 요새 땅끝마을 게이트가 들썩이고 있어서 어룡도 사람들도 고민이 많지. 이대로 생업을 포기하고 섬을 떠나야 하나, 다들 걱정이고.”
“어룡도에 사람들이 많이 삽니까?”
한수호는 기회다 싶어 어룡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얼마 없어. 기껏해야 50가구 정도 되나? 오래전에 다 떠나고 딱 그 정도만 남았지.”
“아이들도 있나요?”
“아이도 몇 명 남아 있지 않아. 섬사람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라…. 그나마 태극서가에서 섬에 작은 학교를 지어준 덕분에 아이들이 10명 정도 남아 있긴 하지만.”
“다행이네요. 아이들이 없는 곳에는 웃음도, 행복도 없다고 들었거든요.”
“그건 맞는 말이야. 아이들이 있어야 웃음꽃이 피고, 웃음꽃이 피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거든. 하하하!”
사내는 연예인 뺨칠 정도로 잘생기고 기품이 있는 한수호가 자신과 편하게 대화해 주는 것이 꽤나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이때다 싶은 한수호는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혹, 아저씨가 태극서가의 별장을 돌보시는 분인가요?”
“나? 에유. 아니야. 난 가끔 이렇게 태극서가의 보트를 몰아서 사람들 운반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부야, 어부.”
“그럼 별장을 돌봐주는 분은 따로 계시겠네요?”
“물론이지. 별장에 40대 여자분하고 12살짜리 아이가 거주하면서 돌보고 있어. 그런데, 그 여자분 미모가 아주 기가 막히지. 나 같은 무지렁이가 쳐다보는 것만도 미안할 정도로 말이야.”
“여기 수고하신다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한수호는 적절한 시점에 5만 원 권 현금 4장을 건네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사내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그런데 어린 학생이 세상 사는 이치를 참 잘 아는구먼.”
어부 사내는 한결 편한 얼굴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모가 기막힌 여인과 두 살짜리 아이가 섬에 들어온 건 10년 전이었다.
그들은 태극서가의 가주 서한광이 직접 데리고 왔으며, 한동안은 섬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게 철저히 보호되었다.
섬사람들은 그 모녀에게 말 못할 깊은 속사정이 있음을 알고도 모르는 척해 주었고,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때부터 조금씩 섬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여인은 자신을 찬이 엄마라고 소개했고, 딸아이는 별이라고 알려주었다.
섬사람들이 보기에도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던 여인 찬이 엄마.
그녀는 시간이 날 때면 별장 안에 있는 섬 끝 절벽에 서서 육지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종종 목격했던 섬사람들은 그녀가 혹 스스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건 아닌가 싶어 늘 노심초사였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녀가 절벽 끝에 서 있을 때면, 늘 조마조마하다는 게 어부 사내의 설명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수호는 그 여인이 어머니인 이태희이며,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여자아이가 동생인 한별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왜, 무슨 이유로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작은 섬에서 벗어나질 않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한수호가 10년 동안 서해의 한 섬에서 두문불출했던 이유와 동일할지도 모른다.
‘이프리트의 추격에 한별이까지 잃고 싶지 않으셨겠지.’
지리산의 참사에서 살아남은 이태희는 남편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만약 두 살배기 아이인 한별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니 적의 정체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복수하겠다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멍청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한수호는 이제 곧 어머니와 막냇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다.
‘10년 만에 만나는 건데 뭐라도 챙겨 왔어야 하나?’
한수호는 어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날 생각에 다른 건 하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급히 인벤토리를 뒤지며 뭔가 선물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특별한 게 없었다.
최근 아카데미를 휴학하게 되면서 친구들에게 그동안 쌓아 두었던 아티팩트들을 대부분 나눠준 탓에 남은 게 얼마 없다.
남은 건 대부분 한수호가 전투에 사용할 무기들뿐이었다.
‘고니를 줄까?’
인벤토리 한쪽에 여우 모양의 이모티콘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고니.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고니를 보디가드처럼 붙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사툴란을 붙여 주는 건?’
사툴란은 고니처럼 귀여움이 조금도 없는 거구의 골렘이다.
이제 12살밖에 되지 않은 한별이가 그 골렘을 보면 무서워서 눈물을 찔끔거릴지도 모를 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한수호는 어머니와 한별이를 전투영역으로 옮겨서 생활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해 줄 수가 있었으니까.
‘이런 옷차림으로 괜찮으려나?’
이젠 자신의 옷차림까지 신경이 쓰였다.
원래 입고 있던 다양한 기능의 옷은 다 불타서 없어졌고, 지금 걸친 옷들은 새것이긴 해도 전과 같은 기능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옷 기능부터 개조해야겠군.’
한수호는 보트가 섬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옷에 다양한 기능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 * *
“어때요, 크죠?”
서은채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태극서가의 별장을 소개했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별장은 궁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크고 멋져 보였다.
별장은 한 개의 건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총 다섯 개의 테마로 이루어져서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정글존, 스카이존, 시티존, 비치존, 아쿠아존.
이곳에 한 번 오면 도저히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다.
“게이트가 열리는 시대에 테마파크로 구성된 휴양지라…. 금수저는 확실히 금수저네.”
“에이. 저번에 나라한테 들으니까 오빠 재력도 장난이 아니라던데요?”
“응? 나라하고 그런 이야기도 했냐?”
서은채와 라라가 만난 건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사이 그런 개인적인 내용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친해진 모양.
“원래 동갑끼리는 말 안 해도 통하는 그런 게 좀 있거든요. 헤헤.”
“그 녀석 말 다 믿지 마라. 생긴 건 곱상해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고인물이거든.”
“어쩜 나라가 한 말하고 한치도 틀리질 않네요?”
“뭐가?”
“나라가 저한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한 걸 오빠가 알면 분명 자기 욕할 거라고 했거든요.”
“하.”
한수호는 서은채와 라라의 발칙함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도대체 둘 사이에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고 갔으면 말투와 행동까지 닮아가고 있는 걸까?
“됐고. 소개해 줄 분은 어디에 계셔?”
한수호는 잡설을 끊고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고자 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이유가 그 둘을 보기 위한 것이니 서은채도 질질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스카이존에 있는 하늘정원에 계세요. 그런데, 오빠. 정말 다른 목적이 있어서 아주머니를 보자고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오늘 이곳에 온 건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되요, 알죠?”
“알았다니까 그러네.”
서은채는 외부인을 허락도 없이 어룡도 별장에 데려왔다는 걸 서한광에게 들킬까 봐 걱정이었다.
그만큼 서한광은 이곳에 살고 있는 모녀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 푸른 정원으로 꾸며진 장소에 도착했다.
스카이존이라는 이름답게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정원이었다.
그곳의 중앙 쉼터에 그들이 있었다.
한수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12살 정도의 예쁜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놓고, 그 앞에서 목검으로 두드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검을 휘두르는 자세와 각도, 그리고 힘의 세기가 한수호도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마나력이 458이나 된다고?’
고작 12살의 꼬마아이가 지닌 마나력이 특급 마공사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신체 능력치는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평균으로 17 정도.
하지만 이것도 12살의 여아가 지니기엔 과하게 높은 수치였다.
한수호는 놀라운 시력의 소유자였기에 멀리서도 여자아이가 수련하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허수아비를 정확히 노려보면서 사선으로, 수직으로 정확하게 베어냈다.
그 베기에 맞은 허수아비는 소음은 거의 내지 않았지만, 강력한 힘에 크게 휘청휘청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동작이 묘하게 누구와 닮아 있었다.
‘어머니….’
특무부 암살요원이었던 이태희.
그녀의 모습이 12살 여아에게서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수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헤어질 당시 고작 두 살에 불과했던 막냇동생 한별.
어느새 시간은 10년이 흘러 이젠 어엿한 5학년 초등학생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한별이를 알아본 한수호는 그 뒤의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딱 좋은 몸매를 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
그런데 여인의 얼굴은 분명 어머니 이태희가 아니었다.
섬마을에서는 눈에 띄게 고운 얼굴이었지만, 한수호의 어머니 이태희는 이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개조로 살펴본 여인의 얼굴에서 뭔가의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제 마스크]
-원하는 형태의 얼굴을 만들어 주는 피막형 마스크입니다.
-2회용이며, 스스로 떼어내기 전까지 변형된 얼굴 형태를 유지시켜 줍니다.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효과를 보장하는 복제 마스크.
여인이 얼굴에 쓰고 있는 건 복제 마스크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였다.
“민지야! 오늘도 여기서 허수아비랑 씨름하고 있는 거야?”
서은채가 여자아이에게 다가서며 반갑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허둥대는 어설픈 동작을 보이던 아이는 ‘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민지, 몇 년만 지나면 이 언니보다 훨씬 강해지겠는데?”
서은채는 민지라는 아이가 방금 전까지 굉장히 훌륭한 검술 실력을 펼치고 있었다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언니 왔어? 그런데…. 뒤에 있는 잘생긴 오빠는 누구야? 와, 겁나 잘생겼다.”
한수호를 본 민지가 초롱초롱한 눈을 뜨며 말했다.
“이 오빤, 장태산이라고. 오늘 언니가 섬에 초대한 손님이야.”
“손님? 아직 학생 같은데 공부 안 하고 이렇게 놀러 다녀도 되는 거야?”
“어, 괜찮아. 언니처럼 이 오빠도 장학생이어서 남들보다 쉬는 날이 많거든.”
서은채는 되지도 않는 말로 변명하며 민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렇구나. 언니가 장학생이라는 말은 안 믿었는데, 이 오빠 보니까 믿어줘도 될 것 같아.”
민지는 그동안 뻥 친 거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며 큭큭 웃었다.
“뭐야, 너 그럼 지금까지 내 말 전혀 안 믿었다는 거야?”
“언니는 싸우는 머리는 좋아도, 공부하는 머리는 영 별로잖아. 그 머리로 장학생이 가당키나 하겠어?”
“이 녀석 봐라!”
서은채가 짐짓 화난 척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자, 민지는 요리조리 피하며 더욱 서은채를 놀렸다.
그때, 한수호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에게 바짝 다가섰다.
한수호는 안다.
여인이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아봤다는 사실을.
9살의 한수호가 19살의 청년이 되어 나타났지만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을 부모가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법.
얼굴은 달라졌어도 이 훤칠한 젊은 청년이 그녀의 둘째 아들인 한수호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너…. 너는…!”
여인이 말까지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한수호는 여인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는 덥석 껴안아 버렸다.
“어머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음성.
여인은 자신을 껴안고 어머니라 부르는 한수호의 몸을 두 손으로 와락 안아주었다.
“수호 맞구나. 네가…. 흐흑. 네가 정말 살아 있어 주었어!”
이태란이라는 이름으로 10년을 숨어 살던 이태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해했다.
주르르륵.
이태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수호는 자신의 눈물이 이태희의 어깨를 흥건히 적시고 있음에도 꽉 껴안은 두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파탄 났던 한 가족.
어머니와 아들은 10년 만의 재회에도 말없이 그저 서로를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