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유령 대저택에서 발자크의 파편과 일전을 벌인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나스타샤는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맹으로 향했다.
그녀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매스컴은 난리가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스타샤가 테러범에게 납치되었고, 목숨을 잃었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나스타샤는 등장과 동시에 인터뷰를 통해 모든 것이 ‘이프리트’라는 비밀 결사조직이 벌인 음모라는 사실을 밝혔다.
더 이상 이프리트를 쉬쉬하며 지내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한수호, 구천승과 함께 심사숙고를 한 끝에 공식적으로 이프리트의 존재를 밝히기로 한 것이다.
나스타샤의 인터뷰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비밀 결사조직 이프리트.
그 조직의 구성이나 목적 등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려고 했던 조직, 일루미나티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혹자는 이프리트가 일루미나티의 후신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서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넘어온 외계인이 만든 조직이라고 했다.
어쨌든 나스타샤의 인터뷰로 인해 이프리트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각 국가의 특무부나 마공사 조직들에서는 이프리트에 속한 자들을 색출해 내겠다며 내부 감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프리트의 실체는 쉽사리 들어나지 않았다.
나스타샤의 폭탄 선언 후, 이프리트는 모든 활동을 접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덕분일까?
땅끝마을의 1급 게이트를 폐쇄하기 위한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2051년 9월 9일.
한수호는 스승부부와 함께 땅끝마을로 향했다.
올보 SUV를 타고 약 3시간을 달린 후에야 도착한 땅끝마을은 예전의 그 아름다움은 단 하나도 없이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13년 전, 이곳 해안가에 등장한 1급 게이트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게이트가 열렸고, 게이트들은 대부분 마공사들에 의해 컨트롤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땅끝마을 게이트로 인해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땅끝마을의 게이트는 열리자마자 진급 마공사에 버금가는 강력한 몬스터들을 쏟아냈었다.
그 숫자가 무려 2백이 넘어갔고, 그로 인해 주변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특무부부터 정의국, 대한맹 요원들이 바로 투입되었지만 게이트가 일으킨 웨이브를 막아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각 기관의 상위 마공사들이 50명 이상 추가로 투입되었고, 수많은 마공사들이 희생되고서야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제야 정부는 이 게이트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또 같은 사고가 터지기 전에 서둘러 게이트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게이트 폐쇄를 위해 백 명이 넘는 마공사들이 투입되었지만 그들 중 살아서 복귀한 자는 고작 십여 명뿐이었다.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1급 게이트 너머는 가히 지옥과 다름이 없었다.
게이트를 통해 넘어가면 반경 20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한 장소라고 했다.
폐쇄에 투입된 마공사들은 그 섬의 20%도 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도 강력한 몬스터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게이트를 통과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절반이나 되는 마공사를 잃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섬에서 가장 강력한 알파 몬스터를 찾아 없애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알파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당시 폐쇄팀을 이끌었던 사자도왕 송혁은 피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땅끝마을 게이트는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다행히도 그날 이후 게이트에서 다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또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게이트 주변엔 3개 대대의 군병력이 상시 머물도록 조치된 것이다.
부르릉
한수호가 모는 SUV 차량은 철책이 세워진 검문소 하나를 지났다.
이제 땅끝마을 게이트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2킬로미터.
도로엔 더 이상 다른 차량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수호야. 난 여전히 네가 이번 임무에서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구나.”
SUV 뒷좌석을 거의 꽉 채우고 있는 비돈마마 주태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그래, 그건 나도 같은 마음이다. 네 녀석이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넌 아직 게이트 폐쇄에 대해선 경험이 전무하지 않느냐? 게이트 폐쇄는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단다.”
이번엔 조수석에 앉은 장한구까지 한수호의 임무 참여를 원치 않아 했다.
사실 스승 부부의 이런 마음을 이곳까지 오는 내내 이야기했다.
지금 말한 것까지 합하면 벌써 스무 번이 넘는다.
그럼에도 한수호는 자신이 이 임무에 꼭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지금 말해봐야 이미 늦은 거 아시잖아요? 이젠 이 상황을 쿨하게 좀 받아들여 주세요.”
“진짜 말을 안 듣는구나. 만약 우리 둘이 강제로 널 되돌려 보낸다 해도 거부할 것이냐?”
“제가 강하다는 걸 인정하신다면, 오히려 경험을 쌓을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수호는 이제 코앞에 보이고 있는 주둔부대의 요새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끄응. 그럼 좋다.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걸 수락하는 대신, 내 허락 없이는 절대 개인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거라.”
주태란이 엄중한 얼굴로 말하자 한수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지휘자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행하는 것 또한 마공요원의 임무이니까요.”
“만약 어기면 당장 게이트 밖으로 쫓아낼 줄 알거라!”
“네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시죠.”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차는 마지막 검문소를 통과했고, 엄청난 무기로 가득한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새는 굉장히 컸다.
세 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니 만큼, 제반 시설도 엄청났고 중앙의 게이트 지역을 향해 배치된 무기들은 상상을 불허했다.
최첨단 레이져포에 레일건, 광역소닉포 등등.
그나마 몬스터들을 상대로 살상효과가 있는 무기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수호는 차를 요새 구석에 세웠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대위 계급장에 박문호라는 이름표를 단 사내가 다가왔다.
“비돈귀살 부부십니까?”
“어이쿠. 우릴 바로 알아봐 주는 분이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장한구가 너스레를 떨자 박문호 대위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그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은 1층짜리 건물로 요새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향해 엄청난 무기를 집중시킨 장소였다.
그 안에 20명이 넘는 마공사들이 제각각 편한 자세로 개인 정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문호의 말에 마공사들의 시선이 비돈귀살에게로 쏠렸다.
“어? 장 선생님!”
사내답게 잘생긴 누군가가 장한구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옆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탄탄한 체격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날씬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장한구는 그들을 보자마자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 이서준 요원이 아닌가? 박진수 요원과 정혜인 요원까지 다 같이 이곳에 왔구만. 이리 반가울 때가 있나!”
이들 셋은 대법원 게이트에서 비돈귀살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대한맹의 특급 요원들이었다.
당연히 한수호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자네들 대장도 참 어지간하이. 그냥 자네들도 이번 임무에 포함되었다고 알려주면 될 것을, 무슨 비밀이라고 우리한테까지 비밀로 했는지, 거참.”
“하하하. 저희 꼰대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덕에 이리 반갑게 마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임무에서 비돈귀살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인물인 이서준이 생글거리며 말하자 주태란이 두꺼운 살집을 출렁대며 호호 웃었다.
“나 닮은 딸내미가 있었으면 당장 이서준 요원한테 시집 보냈을 텐데, 시커먼 아들 녀석밖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호호호!”
시커먼 아들인 한수호는 주태란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머니 닮은 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요.”
“그렇지? 나 닮은 딸이 있었으면 세상 모든 남자 다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을 테니 없는 게 다행이야. 호홋!”
주태란이 넉살 좋게 말하자 모두가 웃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한수호는 한쪽에 조용히 모여있는 네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부터 계속 눈여겨보고 있던 마공사들.
한수호가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그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여기서 또 보네?”
한수호가 웃는 얼굴로 마주 선 사내는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특수부대원 군복에 온갖 무기들을 장착하고 있는 스무 살 가량의 젊은 청년.
그는 다름 아닌 국수대의 진무현이었다.
“네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진무현도 한수호를 알아봤다.
아카데미 토너먼트에서 한수호가 보여준 무위를 또렷하게 지켜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한수호가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마스크 사내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건 진무현 주변에 모여있는 다른 국수대 요원들도 마찬가지.
“현 요원도 아는 사람이 다 있었네?”
이게 웬일이라는 듯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은 임향기였다.
“그러게. 아카데미에서도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고 있는 녀석이 말이야.”
진무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내는 최민우 요원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쪽에서 테블릿으로 홀로그램 영상을 살피고 있는 사내는 이들의 팀장인 이윤철이었다.
그는 그제야 영상에서 시선을 떼고 한수호를 바라봤다.
“자네도 아카데미 학생이면서, 동시에 요원 일을 맡고 있나 보군. 과연 기도가 범상치가 않아.”
이들 중 한수호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수호는 그걸 확인해 보려고 일부러 진무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전 그냥 부모님을 돕기 위해서 따라온 철부지 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마세요.”
“비돈귀살의 아들이 자네였나? 비돈귀살이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는 잘 지었어.”
이윤철은 한수호가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예전엔 비돈귀살의 악명이 자자했지만, 최근 10년간은 악행은 커녕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그 이유가 양자로 들인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막상 한수호를 보니 비돈귀살의 양육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수대 요원님들.”
“허허. 현 요원이 우리 이름에 무슨 금칠이라도 했나? 별로 알려진 것도 없는 우리를 만났다고 영광이라는 표현까지 쓰다니.”
“아닙니다, 팀장님. 이 녀석하고는 아카데미 토너먼트에서 잠시 만났던 게 다입니다.”
말은 그랬지만, 진무현은 한수호가 잠진도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 정도는 하고 있었다.
“우리 현 요원이 오늘따라 왜 이리 당황하실까? 혹시, 현 요원 취향이 이쪽이었어?”
임향기가 짓궂은 농담을 하자 진무현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 모습에 한수호는 혀를 끌끌 찼다.
‘이 녀석아. 여기서 네가 얼굴을 붉히면 오히려 인정하는 꼴이라고.’
한마디 충고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자, 이제 농담은 여기까지. 브리핑이 시작될 모양이니까 다들 움직이자고.”
이윤철의 말에 국수대 요원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수호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만 봤다.
‘평균 수치가 3백에 가까워졌어. 진무현 녀석, 체질 개선을 3단계까지 완성한 건가?’
한수호가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진무현에게 받은 특성, 체질 개선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완전판이 아니라 살짝 다운그레이드 된 특성이라 그런지, 3단계 체질 개선을 이루려면 아직 보름 정도는 더 지나야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진무현을 보니 3단계를 완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성장을 이룬 상태다.
그렇다면 완전판 체질 개선의 최종 진화를 이루었다는 뜻.
‘이 그룹 내에서 제일 강한 마공사가 진무현이네.’
정의롭고, 이타적이며, 순수한 마음까지 지닌 진무현이라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도 좋은 일이었다.
한수호는 이번 임무에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진무현 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브리핑은 들어야 하니까….’
한수호는 저 앞쪽에서 홀로그램 영상을 틀어 놓고,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한 이서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 * *
이번 게이트 폐쇄 작전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13년 전의 참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한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작전에 참여하는 모든 마공사들이 과거에 만들어진 부분 지도를 참고하여 가장 빠른 루트로 알파 몬스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작전에 가장 큰일을 할 ‘마나 탐색기’를 무려 열 대나 준비했다.
이 마나 탐색기는 가장 최근에 개발이 완료된 첨단 장비였고, 대당 제작 비용이 무려 10억을 호가한다.
탐색 범위는 반경 500미터.
그 범위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이 마나 탐색기를 절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얼마나 빨리 마나 탐색기를 가지고 알파 몬스터를 찾아내느냐였다.
13년 전의 희생 덕분에 게이트 너머의 세상이 반경 20킬로미터의 거대한 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넓은 범위를 가장 빠르게 스캔하기 위해서는 마공사 열 명이 마나 탐색기를 들고 1킬로미터 거리로 퍼져서 주변을 훑어야 했다.
그래봐야 섬의 절반밖에 스캔할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알파 몬스터가 있는 장소를 그나마 빨리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비돈귀살과 한수호까지 포함하여 총 24명.
내일 이곳에 도착할 나스타샤까지 포함시켜도 25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인원이 넓게 퍼지게 되면 섬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제대로 방어해 낼 수가 없었다.
언제든지 서로 도울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리는 최대 30미터 정도.
그것도 직선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둥그런 원형 형태로 움직여야 한다.
즉, 최대로 넓혀봐야 150미터가 한계였고, 한 번에 스캔할 수 있는 범위는 반경 1.2킬로 정도가 최대였다.
그래서 나스타샤의 투시가 이번 작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