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구천승은 파급을 넘어 멸급까지 오른 대단한 강자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런 그조차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었다.
파급마저 뛰어넘은 두 존재.
한수호와 발자크의 파편이 지닌 강함은 구천승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제자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
구천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해 발자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지닌 최강의 기술은 뇌신기를 이용한 뇌신강림.
이 기술을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강력함을 선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유지 시간은 단 5분으로 매우 짧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평소의 50% 수준으로 마나력이 떨어져 버리는 패널티가 있었다.
이건 최후의 기술에 속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수호의 능력을 보아하니 자신이 그 기술까지 쓰지 않아도 발자크의 파편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구천승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제자 놈의 능력에 기대야 한다니….’
말은 그래도 진심은 뿌듯해하고 있었다.
불과 한 달여 사이에 한수호의 능력은 자신을 뛰어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미 뛰어넘은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저 전력을 다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약해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
‘도대체 저 기이한 보호막은 어떤 기술이지?’
한수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반투명한 막.
그 막은 몸에 닿는 모든 걸 튕겨내고 있었다.
발자크의 파편이 온갖 종류의 공격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그 막은 도무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수호의 기술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원거리에서 공간을 우그러뜨리고, 무기를 손에 쥐지도 않은 상태로 조종하여 제삼의 손처럼 사용한다.
때로는 섬광과도 속도로 움직여 파편의 몸에 구멍을 냈으며, 불과 얼음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까지 한다.
그 모든 기술이 특성이라 하기엔 너무 개수가 많았고, 그렇다고 별도로 습득한 기술로 치부하기엔 그 위력이 너무도 강력하다.
‘내가 제자 놈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이름뿐이었구만.’
구천승은 지금까지 알던 제자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수호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건 발자크의 파편도 비슷해 보였다.
마족만이 지니는 강화술을 사용해 육체와 마나력 모두를 크게 높였음에도 한수호를 쉽게 상대할 수가 없었다.
파편이 강해지면, 그만큼 한수호도 강해졌다.
마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더욱더 강해져서 파편을 압박해 왔다.
결국, 파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수호를 처치하기로 했다.
한수호가 가지고 있는 해금의 열쇠.
그걸 빼앗아야 진짜 발자크의 본체가 봉인에서 풀려나는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었으니까.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그에 맞는 처참한 죽음을 선물로 주마.”
발자크의 파편이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허공으로 손을 뻗어냈다.
부아아아악!
순간 허공 속으로 손이 쑥 들어가더니 새빨간 색의 창 같은 무기를 끄집어냈다.
5미터로 커진 발자크의 파편이 들고 있는데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적창.
파편은 그 창을 꽉 쥔 손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순간,
콰자자자자작!
창이 핏방울같이 산산이 분해되더니 파편의 온몸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파편은 붉은 갑주를 걸친 거대한 기사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창과는 다른 두 개의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죽어라.”
명령과도 같은 음성과 함께 파편이 한수호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엑스자로 교차되어 베어진 검.
한수호는 이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피하면 뒤쪽으로 물러났던 구천승에게 직격된다.
입술을 질끈 깨문 한수호.
그는 다시 한번 쇼크이터를 발동시켰다.
동시에 두 팔을 교차시켜 정면을 가로막았다.
파편의 공격은 한수호의 팔 위를 정확하게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가공할 폭발이 일었고, 한수호는 뒤쪽으로 끝도 없이 밀려났다.
차르르르르르륵
하지만 볼썽사납게 튕기지는 않았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서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한수호.
‘엄청난데? 위력의 80%를 흡수했는데도 이 정도일 줄이야.’
한수호는 재빨리 상처치료 특성을 발휘해 팔뚝에 난 깊은 상처를 재생시켰다.
하지만 파편의 공격은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콰앙!
바닥을 찍으며 날아오른 파편은 그 커다란 덩치를 새처럼 움직여 공중에서 다시 한번 엑스자의 검격을 날렸다.
주변의 모든 것이 검격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공간마저 우그러뜨리며 날아든 검격은 대지마저 가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한수호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미리 눈앞에 띄워놓았던 자신의 정보창에서 포인트를 배분시켰다.
한수호가 사용한 NP는 총 133.
7개 항목의 신체 수치에 포인트를 19씩 배분해 마침내 평균 수치 999를 만들어 냈다.
발자크의 파편이 쏘아낸 검격이 닿기 직전, 포인트 배분이 끝났고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버언-쩍!
한수호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빛은 파편의 검격을 지워버리듯 잡아먹었고, 공중에 떠 있는 파편마저 강하게 튕겨냈다.
그때, 한수호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10,000,000LP를 소모하여 초월자로의 진화가 가능합니다.
>>초월자로 진화하겠습니까? YES/NO
전혀 생각도 못했던 내용.
한수호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YES를 선택했다.
>>초월자로 진화합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한수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화염방사기처럼 무섭게 솟구쳐 올랐다.
한수호는 그 상태에서 파편을 응시했다.
기둥 세 개를 부수며 멀리 튕겨 나갔던 파편은 흉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날아들었다.
그런 파편을 향해 한수호는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여전히 황금의 빛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손.
그 손이 파편을 향해 정확하게 겨눠졌을 때,
“멸(滅).”
한수호의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순간,
푸슛
그의 손바닥에서 금빛 기운이 빛처럼 뿜어져 나갔다.
빛은 그저 허공을 한차례 가볍게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마어마했다.
두 개의 대검을 휘두르며 날아들던 발자크의 파편.
그가 지워지듯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잠시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놀라고 있는 구천승도.
허공을 향해 비스듬히 손을 뻗어낸 채 서 있는 한수호도.
모두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쨍그렁….
두 개의 대검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진짜로 정지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파편은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대검은 반동으로 통통 튀다가 하나로 합쳐졌고, 이내 하얀 빛을 내며 작은 뭔가로 모습을 변형시켰다.
한수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집어 들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씨앗처럼 생긴 그것.
개조 특성을 이용해 정보를 살피자 놀라운 내용이 한수호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계수의 씨앗]
-코스트: 500
-씨앗이 심어진 장소를 기준으로 반경 100킬로미터 범위에 결계를 생성시킵니다.
-결계가 생성되면 그 어떤 존재도 결계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씨앗은 긴 세월에 걸쳐 세계수로 성장합니다.
-씨앗에 담긴 힘을 이용해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결계 생성기.
거기다 다른 차원의 문까지 열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이런 게 왜 파편의 몸에서 나오는 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결계에 갇혀 봉인된 발자크가 남겨놓은 파편인데, 그 파편을 없애니 결계용 씨앗이 등장했다.
발자크가 봉인되어 있어서 씨앗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 씨앗 때문에 발자크가 봉인된 것인지, 도대체 뭐가 먼저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
한수호가 얻은 건 세계수의 씨앗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발자크의 파편이 소멸하여 ‘유령 대저택’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업적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목록
-Level Point 20,000,000
-Nomal Point 100
-Sense Point 10
>>보상을 수령하면 5분 뒤, 던전이 봉인됩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의 포인트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한수호는 포인트 부자였다.
-보유 포인트: 1,058NP / 66,485,000LP
게다가 세 번째 포인트인 10SP로는 정신, 감각, 면역, 초감각의 수치도 높일 수 있었다.
한수호는 바로 필요한 포인트들을 배분시켰다.
우선 5SP를 사용해 정신 수치를 25까지 높였고, 감각 수치는 15로, 초감각 수치는 16으로 올렸다.
그저 단순한 숫자 배분이었지만, 그 덕에 한수호는 복잡하던 머리가 깨끗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은 NP였다.
이제 신체 능력치는 999 최대치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더 배분할 필요가 없었고, 쌓여있는 NP를 신체 내부 수치를 높이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현재 한수호의 신체 내부 능력치는 6개 항목 평균으로 55 수준.
평균을 최대치인 99까지 끌어올리려면 2600 이상의 NP가 필요했다.
‘일단 최대한으로 올려놓는 수밖에.’
한수호는 NP 960을 사용했고, 신체 내부 능력치 평균을 16까지 높이는 데 성공했다.
수치 배분이 끝난 순간이었다.
한수호는 저절로 자신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실제로 그의 몸은 바닥에서 1미터가량 떠올라 있었다.
한수호의 몸에서는 찬란한 황금빛이 아닌,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엄청 가벼워졌어.’
가끔이지만 몸 안에서 느껴지던 불편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천천히 바닥에 내려선 한수호.
그는 자신의 능력치 정보를 정확히 확인해 봤다.
[신체외적능력] : 999/999
[신체내적능력] : 71/99
[마나] : 19,530(+1,230)/99999
[육체한계치] : 1/5
이 엄청난 수치가 광폭화나 괴인혈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육체한계치도 또 하나 올랐구나.’
한계치가 올라갔다는 건, 그만큼 육체가 받는 부담감이 줄어들었다는 것.
한수호에게 있어 육체한계치의 증가는 능력의 과용으로 인한 위험성까지 크게 낮아졌음을 의미했다.
“수호, 이 녀석. 도대체 네 한계는 어디까지인 것이냐? 더 숨기고 있는 게 있느냐?”
구천승이 이제야 다가서며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 한수호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말조차 걸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숨기다니요. 상황이 여의찮아서 패널티가 큰 기술은 쓸 수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뭐? 그럼 방금 네가 보인 능력 중에 큰 기술이 아니었다는 말이냐?”
구천승은 더욱 크게 놀랐다.
한수호는 구천승이 왜 처음부터 광폭화나 괴인혈 같은 특성을 왜 사용하지 않았냐고 묻는 거라 생각해서 꺼낸 대답이었다.
하지만 구천승에겐 전혀 다른 내용으로 들렸다.
“그럼 넌 광폭화나 괴인혈은 사용하지도 않았다는 말이구나?”
“어…. 네. 아까 그 발자크의 파편이 마지막 보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광폭화는 아껴뒀던 거고요. 괴인혈만 따로 사용하면 마나 소모량이 너무 커서 그것도 일단 대기 상태에 뒀던 겁니다.”
“허….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을 봤나.”
구천승은 정말 기가 막혔다.
그 자신은 거의 90%에 가깝게 최선을 다해서야 파편의 공격을 간신히 막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수호는 파편보다 더 강한 놈을 대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그나저나, 스승님. 이 씨앗을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수호는 얼른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세계수의 씨앗을 구천승에게 건넸고, 그가 정보를 살피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 이런 게 왜 파편 따위한테서 나오는 거지?”
“저도 그게 가장 이상합니다. 파편이라는 게 단순히 시스템이 만들어낸 하나의 미션일 뿐일까요? 진짜 발자크의 파편이라면 이 씨앗을 보상으로 내놓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않을까요?”
“글쎄다….”
지금 당장은 구천승도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는 모양.
“그건 그렇고. 수호야. 너도 이번에 큰 보상을 받았겠구나? 별로 한 게 없는 나조차도 능력치가 꽤 크게 상승했으니 말이야.”
“마나력도 느셨겠네요?”
“늘었지. 몇 년 동안 수련해도 좀처럼 늘지 않던 마나가 이번에 1천이나 증가했다.”
보상 내용이 한수호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한수호에겐 포인트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다른 마공사들에겐 포인트가 아예 없다.
때문에 자신이 직접 어떤 능력치를 높일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그래. 강제로 튕겨지기 전에, 우리 발로 직접 나가도록 하자꾸나.”
두 사람은 다소 힘들게 클리어한 던전을 뒤로 하고, 본래의 세상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