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위험도 9성의 던전 안에 자리 잡은 유령 대저택.
그 앞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수호와 구천승.
누가 스승과 제자 아니랄까 봐 똑같은 자세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원래는 나스타샤도 자길 끼워달라고 했지만, 두 사람에게 대차게 거절당했다.
던전의 위험도가 8성일 때도 걱정이었는데, 9성으로 오른 지금은 나스타샤가 끼어들 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가볼까요?”
한수호의 말을 신호로 삼아 두 사람은 대저택의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이 유독 크게 들린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저택 안에는 먼지 하나 쌓여 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겨 준 것은 농구장 크기의 커다란 홀이었다.
동그란 모양의 홀 중앙 천장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북, 동, 서 세 방향으로 기다란 통로가 이어졌다.
통로에서는 감이 무딘 사람이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수호는 우선 왼쪽 통로로 향했다.
최대한 넓게 마나 파장을 퍼뜨려 불시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통로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약 5미터 폭의 널찍한 통로 좌우로 쭉 이어진 문들.
문과 문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미터 정도.
오른쪽으로 15도 각도로 살짝 휘어진 통로엔 온통 똑같이 생긴 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을 열고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이 통로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자꾸나.”
한수호는 구천승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휘어진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걷자 드디어 다른 형태의 구조가 나타났다.
그곳은 교차로였다.
왼쪽은 막혀있고, 정면과 우측만 똑같은 통로로 이루어진 삼거리.
그런데 우측을 돌아보니 저 멀리 10여 분 전에 그들이 들어왔던 대저택의 정문과 홀이 보이고 있다.
“아까 그 홀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던 이곳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네요.”
“그렇군. 이곳이 최종 목적인가 보구나.”
구천승은 통로 대신 커다란 문으로 막혀있는 곳을 바라봤다.
문은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양각되어 왠지 소름이 끼쳤다.
“제가 열어보겠습니다.”
한수호는 그 문을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문에 손을 댄 한수호의 눈앞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해금의 열쇠를 찾아 문을 여세요.
“무슨 열쇠를 찾아야 열 수 있다는데요?”
한수호의 말을 들은 구천승도 문에 손을 댔고, 동일한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통로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열쇠를 찾아야 하는 모양인데….”
겪어 보지 않아도 빤히 보이는 상황.
통로의 문들 너머엔 이 잠겨진 문에 새겨진 몬스터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대충 계산해 보니, 세 개의 통로에 있는 문들은 적어도 1,000개 정도의 방이 존재한다.
“스승님. 아무래도 따로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1,000개 방을 둘이서 함께 돌아다니다가는 언제 해금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이 나눠서 움직이는 게 나았다.
“그게 좋겠다. 난 홀을 기준으로 오른쪽 통로를 돌지. 넌 방금 우리가 지나온 통로를 훑거라. 각자 맡은 쪽을 다 돌면 중앙 통로에서 만나자꾸나.”
“네, 스승님. 조심하시길.”
“너도 조심해야 한다. 여긴 보통 던전이 아닌 것 같으니….”
그렇게 두 사람은 두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수호는 가장 먼저 보이는 통로 왼쪽의 문 앞에 섰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문.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문을 열자 온통 검은 암흑의 공간이 보였다.
‘뭔가 으시시하네.’
한수호의 강력한 기감으로도 검은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내 앞을 막는 건 전부 때려 부숴주마.’
한수호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는 서슴없이 검은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한수호가 유령 대저택에 들어온 지도 거의 24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거쳐온 방의 수만 300개 이상.
이제야 서쪽 통로에 위치하고 있던 문 중 90% 이상을 확인했다.
한수호는 거의 5분에 하나 꼴로 문 너머에서 등장한 몬스터들을 쓰러뜨렸다.
문 안쪽에서는 어떨 땐 한두 마리가, 어떨 땐 십여 마리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24시간 내내 거의 쉼 없이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한수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우, 배고파.”
사실 피곤한 건 몸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게다가 배고픔까지 더해져 만사가 귀찮게 느껴졌다.
‘확실히 위험도가 9성이라 등장하는 몬스터 수준이 보통이 아니야.’
이미 침묵의 협곡과 성장의 탑을 겪었던 한수호였지만, 이곳 유령 대저택에 등장하는 몬스터들 수준도 그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한수호는 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뇌신기라는 극강의 능력이 있었다.
몬스터들은 한수호가 패시브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뇌신기 때문에 근처에 오기도 전에 터져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야 열쇠 조각 32개라….’
한수호는 자신의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 있는 열쇠 모양의 아이콘을 응시했다.
[열쇠 조각]
-코스트: 15
-해금의 열쇠를 제작할 수 있는 조각입니다.
-조각 개수: 32/100
앞으로 더 모아야 할 조각이 68개다.
‘스승님도 나와 비슷하게 얻었을 테니, 대충 40개 정도만 더 모으면 되겠네.’
말이 40개지, 그걸 또 얻기 위해서는 이 지겨운 전투를 앞으로 반나절은 더 치러야 했다.
그나마 방 하나를 클리어할 때마다 얻을 수 있는 보상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반복할 수 있었다.
-보유 포인트: 916NP / 48,235,000LP
지금 한수호가 가진 포인트였다.
방 하나를 클리어할 때마다 NP 1에 LP 5만을 보상으로 얻었다.
방 안에서 마주한 몬스터들의 수준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보일 수 있지만, 한수호에게 이 보상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만약 다른 마공사들이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얻는 신체 능력치 증가나 아티팩트, 혹은 무기 같은 걸 얻었다면 오히려 더 실망했을 터.
한수호는 포인트 보상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이쪽 통로에 남은 문은 이제 스무 개 정도인가?’
한수호는 통로 바닥에 잠시 주저앉아 있다가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문을 향해 다가섰다.
* * *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났다.
한수호와 구천승은 좌우 통로에 위치한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곳에 있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고 총 66개의 열쇠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좌우 통로의 문을 모두 통과한 두 사람은 중앙 통로에서 다시 만났다.
놀랍게도 구천승은 이래저래 자잘한 상처를 입었는지 옷이 말이 아니었다.
반면, 한수호는 자신이 직접 개조한 옷을 입고 있어서 깨끗한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지 않고 중앙 통로를 훑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좌측 문을, 구천승은 우측 문을 순서대로 열고 들어갔다.
다시 기약 없는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11시간이 흘렀을 때 마침내 마지막 100번째 열쇠 조각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총 1천 개의 문을 열었고, 거기서 100개의 열쇠 조각을 찾았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은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었는데, 한수호는 열쇠 조각 외에 포인트를 얻었고, 구천승은 일정 수준의 능력치와 각종 아티팩트, 그리고 포션 등이었다.
한수호가 하루 반 만에 획득한 포인트는 엄청났다.
-보유 포인트: 1,091NP / 56,485,000LP
이제 신체 능력치를 999 수치까지 만들기에 충분한 NP가 쌓였다.
‘일단 이 던전부터 해결해 놓고, 포인트 배분을 생각해 보자.’
한수호는 유령 대저택의 마지막 관문 앞에 서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수호야. 좀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냐?”
구천승은 한수호가 너무 무리해서 이 던전을 클리어 하려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전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스승님 몸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나? 어허. 이 스승을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 난 아직 끄떡도 없다. 자, 어서 열쇠를 조합해 보거라. 이 안에는 또 어떤 괴물이 둥지를 틀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구천승이 시치미를 떼며 하는 말에 한수호는 피식 웃다가 황금빛을 띠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 열쇠가 바로 100개의 열쇠 조각으로 제작한 해금의 열쇠였다.
[해금의 열쇠]
-코스트: 200
-어떤 종류의 봉인도 해금할 수 있는 ‘파급’ 열쇠입니다.
-틈새 해금율: 38%
이름은 해금의 열쇠인데, 이해가 안 가는 정보가 있었다.
열쇠에 급이 있는 걸로 봐서는 종류가 여러 개인 듯했고, 틈새 해금률이 38%라는 건 이 열쇠로 무언가의 틈새를 해금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이 열쇠로 발자크가 봉인된 곳의 틈새를 벌릴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발자크나 이프리트가 이 열쇠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경우, 무슨 수를 쓰든 열쇠를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었다.
‘그래서 놈들이 진작에 이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껏 게이트를 폭발시키지 않았구나.’
유령 대저택 게이트는 25년 전에 한 번 등장했었고, 15명의 마공사들의 손에 클리어되면서 20년간 봉인됐었다.
그럼 5년 전에 게이트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프리트는 적어도 5년간, 이 게이트를 수없이 드나들었을 테고 해금의 열쇠를 얻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을 게 틀림없었다.
‘결국은 얻어내지 못한 모양이군.’
이프리트에서 해금의 열쇠를 얻었다면 진작에 게이트는 봉인되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이프리트에서는 해금의 열쇠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폭탄 테러를 이용해 게이트에 마나 폭발을 일으키려 했다는 말이 된다.
‘이걸로 이 봉인된 문을 연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한수호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틈 하나 없이 닫혀있는 석문의 열쇠 구멍에 해금의 열쇠를 끼워 넣었다.
달칵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쿠궁
거대한 석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금의 열쇠는 아직 한수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걸 인벤토리에 넣어버린 한수호.
“장유유서를 따르겠습니다.”
한수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린 채 한마디 하자 구천승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이럴 때만 장유유서를 찾는구나. 못된 놈.”
구천승은 툴툴대면서도 앞장서서 검은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수호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츠아아악
기이한 소음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수 초 후, 한수호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대신전의 내부였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
그리고 20미터 간격마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2미터 굵기의 높다란 기둥들.
구천승과 한수호는 붉은 레드카펫이 길게 깔린 곳에 있었다.
앞을 바라보니 약 50여 미터 전방에 5층 계단이 있었고, 그 위에 황금으로 치장된 왕좌가 자리했다.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왕좌 뒤쪽으로는 약 5미터 크기의 동상 네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모두 말을 탄 기사의 형상이었다.
한수호는 구천승과 나란히 서서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개조를 사용해 눈앞에 있는 존재들의 정보를 빠르게 훑었다.
한수호가 가장 주의 깊게 살핀 건, 당연히 왕좌의 인물이었다.
그자는 인간인 듯, 인간이 아닌 듯 보였다.
겉모습은 인간과 닮았으나, 두 귀가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었고 등 뒤로 검은색 날개가 접혀 있는 게 보였다.
왕좌 옆쪽으로는 꼬리 같은 것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그 끝은 화살촉처럼 뾰족했다.
덩치도 커서 일어선다면 3미터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발자크의 파편]
-아스루나의 대마왕 발자크가 남긴 파편 중 하나입니다.
-발자크의 봉인을 풀기 위해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마나: 20,310
‘발자크의 파편이라고?’
한수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자크 본체도 아닌 파편에 불과한데도 마나력이 2만이 넘는다.
끝없이 성장해온 한수호보다도 5천이나 높은 상태.
“느낌이 안 좋은 놈이로구나.”
구천승도 적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걸 느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적은 한 놈만이 아닙니다.”
한수호는 왕좌 뒤에 세워진 네 개의 동상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