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소횡경도에서 게이트가 등장한 시각은 침묵의 협곡에서 봤던 정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렇다는 건 이 게이트 안에 특성 ‘쇼크이터’가 함께 나타났다는 뜻.
한수호는 드디어 0티어 특성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다지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이프리트의 수장으로 의심되는 강지훈이 나타날지도 모르기에 스승인 구천승이 걱정되었다.
“스승님. 혹시라도 수적으로 밀린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쪽수에 밀렸다고 해서 누가 놀릴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고요.
한수호의 말에 구천승이 피식 웃었다.
“강지훈이 두세 명 들이닥쳐도 끄떡없을 테니 너나 걱정해라.”
“그냥 게이트 가지고 전투 영역으로 들어가 버릴까요? 거기라면 누가 올까 봐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아서라. 게이트가 보이지 않으면 강지훈이 이곳에 오는 일도 없을 게야. 녀석을 끌어들여서 담판을 짓기 위해서라도 게이트는 이곳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구천승은 단호했다.
그에게 있어서도 이번 기회에 과거의 친우를 죽게 만든 배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
한수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찮다면 게이트 안에 이걸 던져 넣으세요.”
한수호가 구천승에게 건넨 건 손바닥만 한 작은 드론이었다.
이 드론은 조유현의 복주머니 속에서 얻은 것으로, 한수호가 길잡이로 이용하기 위해 약간의 손을 본 아티팩트였다.
[길잡이 드론]
-코스트: 22
-한수호의 손을 거치면서 스스로 길을 찾는 가이드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내구력과 베터리 용량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드론에 필요한 용도를 입력해 놓기만 하면, 자동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드론이었다.
“날 뭐로 보는 게냐? 그딴 거 쓸 일은 없을 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구천승은 드론을 날름 낚아챘다.
“아무렴요.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긴장 푸시고 편히 계시고요.”
“젊은 놈이 뭔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얼른 가서 볼일이나 보거라.”
구천승이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리자 한수호는 그제야 웃으며 게이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슈우우욱-
빛이 번쩍하는 순간, 한수호는 주변의 풍경이 확 달라졌음을 느꼈다.
‘뭐야, 여긴?’
한수호가 서 있는 곳은 모래사장만 넓게 펼쳐진 섬이었다.
그것도 크기가 딱 횡경도 정도다.
대신 숲은 없고, 오직 자갈과 모래가 전부인 섬.
그 섬의 중앙에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커다란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에 탑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한수호가 회귀 전에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이 게이트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던전이었다.
다만, 2급에 해당하는 몬스터가 출몰해서 진급 이하 마공사들은 혼자서 들어왔다간 큰일을 당할 만큼 위험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한수호가 직접 들어와 보니 평범한 던전이 아니라, 섬과 탑으로 이루어진 흔치않은 던전이었다.
‘특무부에 전달된 정보 중에 제대로 된 내용이 거의 없네, 없어.’
가능성은 여럿 존재했다.
애초에 강지훈이 특무부에 전달한 정보 자체가 거짓이었던가, 아니면 강지훈과 연루되어 있는 특무부 고위 요원이 정보를 거짓으로 수정했던가.
‘둘 다일 수도 있겠지.’
한수호는 이로써 일패창 강지훈이 특무부에서도 상당한 입김이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든, 저 탑을 오르면 보상으로 쇼크이터가 나온다는 얘기겠지?’
한수호는 적어도 100층은 되어 보이는 높다란 탑을 올려다봤다.
‘어우야…. 설마 저 탑을 꼭대기까지 올라야 하는 건가?’
그냥 아무 일 없이 오르기만 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수호는 느릿느릿 탑을 정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단 부딪쳐 보자고!’
속으로 힘차게 외치며 한걸음 크게 내디딘 한수호.
그의 몸이 순식간에 탑의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끼이익
한수호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탑의 나무 문을 천천히 열었다.
안에서 음침한 기운이 훅하고 밀어닥쳤다.
그 기운에서 느껴지는 온갖 감각에 한수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난 놈들이 가득한데?’
탑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은 낮아 봐야 3급 수준인 강력한 몬스터들의 것이었다.
숫자 또한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100마리….’
우연히도 이 탑의 높이와 거의 일치하는 숫자였다.
‘탑을 끝까지 올라야만 보상을 탈 수 있다는 건가?’
한수호는 솔직히 기가 막혔다.
아스루나는 이미 멸망한 지 오래된 세계였지만, 대신관 아캄과 대마법사 엘로이가 만들어낸 이런 구조물들은 여전히 존재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단숨에 꼭대기까지 정복하는 거다!’
한수호는 이 안에 뭐가 있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탑 꼭대기까지 가장 빠르게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한수호가 열린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순간,
쿠웅
열렸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고, 동시에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단순한 벽돌 구조의 공간이었다.
크기는 대략 30미터 정도.
밖에서 봤던 것보다는 사뭇 작은 규모였다.
한수호는 이곳에 자신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정면에 보이는 어둠의 공간.
그 검은 공간 안쪽에 흉악한 기운을 지닌 거대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었다.
크르르르….
뭔가가 낮은 울림을 토하더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바닥을 울리며 나타난 그건, 한수호도 익히 아는 대형 몬스터였다.
8미터 정도 되는 크기에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르스를 무척이나 닮은 외형을 지닌 몬스터.
등에는 드래곤처럼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었고, 머리엔 돌기처럼 삼각형 모양의 뿔까지 달린 놈은 바로 티라우론이었다.
‘1층에서 티라우론이 나온다라.’
과연 2급 던전다웠다.
대충 잡아도 100층은 될 것 같은 이 탑의 1층에서 3급 몬스터 티라우론을 만나다니.
‘이 정도 난이도면 나쁘진 않은데?’
솔직히 침묵의 협곡에 비하면 애교에 가깝다.
침묵의 협곡 1단계 시험에서 마주했던 오우거 워리어 100마리와 티라우론 한 마리 중 어느 쪽이 더 상대하기 쉽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티라우론 한 마리는 진급 마공사 다섯 명이면 상대할 수 있지만, 오우거 워리어 100마리를 상대하려면 진급 마공사가 적어도 10명 이상은 있어야 했으니까.
그때, 한수호의 눈앞으로 왠지 낯익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증명의 탑에 들어오신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탑의 모든 층에는 용자의 의지와 정의, 그리고 신념을 확인하기 위한 시련의 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탑을 오르고 당신의 용기를 증명하세요.
>>발 앞에 그어진 선을 넘는 순간, 1층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어디서 많이 본 글귀잖아?’
지금 한수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은 그가 침묵의 협곡에 들어섰을 때 봤던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침묵의 협곡 하위 버전인 건가?’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 앞으로 내려다봤다.
그곳엔 반원형으로 붉은색 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 선을 보던 한수호는 두 주먹을 꼼지락거리다가 거침없이 한 발을 내디뎠다.
빠지직-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한수호의 신형이 벼락을 피워내며 지워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크허어…. 쿠엑!
괴성을 지르려던 티라우론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쿠웅!
거구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새빨간 핏물.
앞으로 고꾸라진 티라우론은 머리가 터진 채로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질퍽한 핏물 위에 내려선 한수호는 오른손을 눈앞에 들어 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뇌신기의 힘은 엄청나구나.’
한수호의 오른손에선 마치 벼락의 진원지가 된 것마냥 수많은 뇌전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 * *
>>누적된 탑 포인트: 31,000
>>다음 층 도전 실패 시, 탑 포인트50% 소멸. 도전 성공 시, 보상 등급 상승.
>>다음 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ES/NO
한수호가 50개 층을 돌파할 때마다 마주했던 메시지였다.
바뀌는 건 누적 포인트뿐, 다른 건 늘 똑같았다.
하이 리턴, 하이 리스크.
층이 높아질수록 얻는 보상은 상향되지만,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동안 축적된 포인트의 절반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고는 한수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수호가 50층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
한 개 층을 통과하는 데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수호는 고민할 것도 없이 YES를 선택했고, 공간의 한쪽 구석에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한수호는 그 계단을 단숨에 올랐고, 또다시 붉은색 반원 앞에 멈춰 섰다.
>>발 앞에 그어진 선을 넘는 순간, 51층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젠 익숙해진 메시지를 확인한 한수호는 저 앞의 검은 공간을 응시했다.
‘이번엔 여섯 마리인가?’
10층이 넘어갈 때마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숫자가 한 마리씩 늘고 있었다.
41층부터는 5마리였는데, 51층에 도착하니 6마리로 늘었다.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마릿수가 좀 증가했다고 별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존재감이 너무도 엄청났기에 한수호에겐 큰 부담이었다.
물론, 한수호가 특성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부담조차 휴지 조각이 되긴 하겠지만.
‘간다!’
한수호는 어둠 속에서 흉성을 폭발시키며 뛰쳐나오는 여섯 마리의 대형 몬스터들을 향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 * *
증명의 탑 78층.
한수호는 하나의 동산에 가까운 커다란 사체 위에 주저앉아 어른 몸통만 한 심장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었다.
>>누적된 탑 포인트: 73,800
>>다음 층 도전 실패 시, 탑 포인트 50% 소멸. 도전 성공 시, 보상 등급 상승.
>>다음 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ES/NO
지겹도록 보아온 메시지를 잠시 응시하던 한수호는 몬스터 사체에 꽂아 두었던 기다란 비늘검 나샬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이미 심장의 기운을 흡수해 고기 조각으로 변한 커다란 심장을 휙 내던졌다.
‘진화율 69%라…. 잘하면 탑 정상에 오를 때쯤엔 3단계 진화가 가능하겠는데?’
한수호는 모처럼 몬스터의 심장을 흡수할 수 있는 이 기회를 그냥 허비하지 않았다.
침묵의 협곡에서 마주했던 몬스터만큼은 아니지만, 이 탑에서 마주친 몬스터들의 등급이 상당히 높아서 심장 하나당 0.2%의 진화율이 상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장을 먹을 때마다 마나력까지 늘어나고 있었고, 뇌신기를 사용한 타격이 이루어질 때마다 NP까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벼락권을 사용하면 NP가 흡수되던 현상이 뇌신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
그 결과 한수호의 능력치와 포인트는 눈에 띄게 증가하는 중이었다.
[신체외적능력] : 976/999, 200/999
[신체내적능력] : 55/99
[마나] : 15,300(+1,184)/99999
[육체한계치] : 1/4
-보유 포인트: 611NP / 1,235,000LP
‘곧 능력치 999에 도달하겠어.’
지금이라도 잔뜩 쌓인 NP를 배분한다면 999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마지막 층에서 어떤 몬스터를 마주하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포인트 배분을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한수호는 메시지에서 YES를 선택했고, 곧장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갑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몬스터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