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 이 계약을 증빙하기 위해 계약서 2부를 작성하여 각자 서명 날인하여 1부씩 보관한다.]
“하하….하…하.”
무려 10장이나 되는 긴 계약서의 맨 마지막 문구를 본 한수로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다.
“스승은 진지한데, 제자가 될 놈이 웃는 것이냐!”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전 그냥 어르신 종놈이잖아요?”
그랬다.
구천승이 내민 계약서는 스승과 제자의 계약이라기보다는, 주인과 종의 노예 계약에 가까웠다.
“어허! 옛말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였거늘. 스승을 위해 약간의 육체적 노동을 감수하는 걸 두고 종놈이라 표현하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저기요. 스승이 잠들 자리 봐주고, 식사 챙겨드리고, 먼 곳에 갈 때는 운전기사도 해 줘야 하는데 그게 종놈이지 아닙니까?”
“저.기.요?”
“아니…. 스승님.”
한수호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래서 싸인하기 싫다?”
“제가 종으로 살길 바라십니까?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강우진을 후계자로 점찍었던 이유도, 말 잘 듣게 생겨서 그런 거였습니까?”
“흠. 역시, 쉽게 넘어오진 않는군. 알았다. 그럴 줄 알고 하나를 더 준비해 두었지. 이건 빼고, 진짜를 보여주마.”
구천승의 근엄했던 표정이 ‘뭐, 그럼 말고’라는 가벼운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구천승이 노예계약서를 거두고, 새로운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좀 전과는 다르게 이번 계약서는 달랑 한 장짜리였다.
[뇌문사규]
1.뇌신기의 힘을 남에게 함부로 전수하면 팔 하나를 잃는다.
2.뇌신기를 얻은 이후, 30년 안에 일인전승으로 후계자를 찾아 전수하지 않으면 두 다리를 잃는다.
3.뇌신기의 힘을 악하게 사용할 경우, 뇌신의 보호막을 잃게 된다.
4.위 사항을 엄수한다면 뇌왕사신기를 소환할 수 있다.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본 한수호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싸인했다.
한수호가 싸인을 끝내자마자, 계약서는 불에 타듯 화르륵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화끈해서 좋구나. 계약에는 아무 불만이 없다는 것이겠지?”
“지키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요.”
“잘 생각했다. 이로써, 넌 내 후계자가 된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한수호는 구천승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로써 한울뇌왕 구천승과 한수호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다.
실질적인 실력을 따진다면 사왕오패 중에서 최강이라 볼 수 있는 구천승.
그는 회귀한 이후로 더욱 강해졌지만, 항상 2%가 부족한 듯 뭔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까지는 알 수가 없었는데, 한수호를 만나게 된 이후로 그 부족함이 채워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만 강우진 대신 한수호를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과연 이 선택이 호재로 작용해 인류의 멸망을 막는 데 큰 보탬이 되어 줄지, 아니면 오히려 인류의 멸망을 앞당기는 악수가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앞으로 난 이곳에 머물면서 널 가르칠 생각이다.”
구천승은 어차피 세상 밖으로 나가봐야 딱히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기에 한수호의 전투 영역에 머물기를 원했다.
“더불어 이곳에 수많은 게이트와 던전이 들어설 것에 대비해 완벽한 게이트 창고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주도록 하지.”
“지금 상태로는 부족합니까?”
“암. 부족하고말고. 특히 저 월이라는 고블린 녀석은 건축의 기본이 안 되어 있더구나. 내가 봐주지 않으면 말도 안 되게 약해빠진 창고가 될 거 같다.”
“그 정도…입니까?”
한수호는 월의 건축가로서의 스킬은 꽤나 훌륭하다고 생각했었다.
“준수한 수준은 되나, 우수할 정도는 아니다. 그 부분은 내가 가르치면서 능력적인 향상을 꾀할 수 있게 해 보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넌 서울에 올라갈 생각은 접고, 당분간은 전국을 돌면서 8, 9급 수준의 게이트를 모조리 이곳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구천승의 말에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생각에 급한 건 4급 이상의 고위 게이트지, 8, 9급 게이트는 급할 게 없었기 때문.
“고위급 게이트는 정부에서 책정되어 있는 보안등급이 높아서, 아무나 함부로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고위급 게이트가 단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시끄러워질 게다.”
“아….”
“파리 들어간다. 입은 그만 다물어라.”
“넵.”
바로 입을 다무는 한수호.
지금까지는 누구보다도 어른스럽고 진중하게 행동하던 그였지만, 구천승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 이후부터는 정말 열아홉 살의 어린 학생이 된 것처럼 치기 어린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낮은 등급의 게이트부터 이곳으로 끌고 와서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
“게이트를 전부 폐쇄하라는 말씀입니까?”
한수호가 질문을 던지자 구천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정말 모르는 것이냐?”
“뭐를요?”
“내가 들어가 있던 2호 게이트 출입구가 왜 한동안 막혀있었는지 모르냐는 말이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허어…. 네 녀석은 아직도 이 아공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구나.”
구천승은 혀까지 끌끌 차며 한수호에게 방금 경험했던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한수호가 방태식, 강우진을 데리고 전투 영역 밖으로 나간 순간, 놀랍게도 1호 게이트와 2호 게이트의 수면 같은 파란 물결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었다.
그 상태는 구천승이 게이트 안에서 봤던 것과 동일했다.
그래서 이 전투 영역 안에 있는 게이트들이 한수호가 이곳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출입구의 활동 또한 제한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한수호는 벙찐 표정이었다.
“….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 있으면 게이트가 활성화되고, 없으면 비활성화되어서 출입이 금지된다 이거군요?”
“바로 그거지.”
“그럼, 제가 밖으로 나가면 이곳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일은 전혀 없다는 말이고요.”
“정확하다.”
한수호는 눈을 매섭게 뜬 채로 멀리서 공사에 집중하고 있는 월을 노려봤다.
그런 한수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월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한수호를 등지고 섰다.
한수호는 월의 반응을 보고 녀석이 진작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말을 이해했으면, 등급이 낮은 게이트를 왜 이곳에 가져오라는 건지 알겠지?”
“네. 제가 전투 영역에 없을 땐 게이트가 비활성화되니 인간과 몬스터 모두 게이트를 드나들 수 없게 되는 거잖습니까? 그럼 웨이브나 이프리트 침입으로 마나 폭발이 일어나는 일도 없을 테고요.”
“이해했으니 다행이다.”
구천승은 회귀자답게 이프리트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게이트나 던전을 찾아다니며 마나 폭발을 일으켜 발자크가 봉인된 장소의 틈새를 넓히려고 한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죠.”
“내일은 안 된다. 적어도 사흘은 지나야 시작할 수 있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한수호의 질문에 구천승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넌 뇌문의 후계자가 되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뇌문의 적통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뇌신기는 보통의 자질과 노력으로는 완벽히 터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제가 무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준 뇌정을 삼키고, 그걸 네 능력이 되게끔 제대로 소화하는 데만 사흘이 필요하지. 게다가 그 능력을 몸 밖에서 발동시키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도 최소 석 달은 걸린다.”
생각보다 뇌문의 후계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한수호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걸 알아본 구천승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너라면 좀 더 빠르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두 달 내에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파문시킬 테니 각오 단단히 해라.”
“….”
확실히 구천승은 과격한 인물이었다.
“푸하하하! 놀란 얼굴이 참 볼 만하구나.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절대 뇌신기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네, 스승님.”
“좋다. 그럼 지금부터 뇌문의 비기인 뇌신기가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해주도록 하마.”
“네. 세이공청 하겠습니다.”
한수호가 열의를 보이며 눈을 빛내자 구천승은 다시 엄한 스승의 모습이 되어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뇌신기는 단순한 벼락의 힘이 아니다. 벼락은 강력함과 빠름의 대표적인 속성이지만, 뇌신기의 벼락은 뇌의 속성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다양한 속성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지….”
그렇게 시작된 뇌신기에 대한 강연은 무려 2시간이나 길게 이어졌다.
* * *
한수호가 뇌정을 섭취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한수호는 두 번이나 전투 영역을 나갔다 돌아왔고, 이곳에 올 때마다 12시간을 꼬박 좌정한 자세로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한수호는 지금도 진입차단벽의 중앙에 앉아 명상에 잠긴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구천승이 뭐가 그리 이상한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짐을 진 채로 계속 왔다 갔다 오가는 중이었다.
“흐음….”
구천승은 5초에 한번 꼴로 한수호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벌써 뇌정의 9할을 흡수하다니….’
그의 놀라움은 한수호가 생각보다 너무도 빠르게 뇌정의 힘을 흡수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둔재라면 뇌정을 섭취하는 즉시 뇌정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급사하게 되고.
일반인이라면 뇌정의 힘을 흡수해도 아무런 힘을 얻어내지 못한다.
범재라면 뇌정의 힘을 백일 내내 흡수해야 고작 10%의 힘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영재라 해도 최소 10일은 흡수해야 했고,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많아 봐야 40%였다.
천재 정도는 되어야 5일 동안의 흡수를 통해 60%의 효과를 얻어내는데, 구천승이 본 한수호는 천재를 넘어서기에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한수호는 사흘이 아니라 이틀 만에 뇌정의 힘 90%를 흡수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앞으로 2시간이면 뇌정의 힘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겠지만….’
생각은 그러했으나, 실제 결과는 99%가 최대라는 걸 구천승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뇌정의 힘은 99%가 한계였다.
100%는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된다.
뇌정의 힘을 100% 흡수해 소화해 낸다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되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구천승이 생각한 2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 되었을 때,
콰지지지직-
한수호의 몸에서 시퍼런 뇌전들이 부글부글 끓듯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뇌왕이라 불리는 구천승 조차 그 뇌전의 힘에 밀려 20미터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벌써?’
구천승은 한수호의 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뇌전의 스파크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방향성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뿜어지던 뇌전이 어느샌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듯 뿜어지고 있었다.
마치 한여름의 정오에 아스팔트 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수직으로 뿜어져 나오는 수십 줄기의 스파크들.
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건, 한수호가 뇌정의 힘을 99%에 가깝게 흡수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허…. 정말 기가 막힌 놈이로고.”
구천승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한수호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의 눈에서도 푸른빛의 뇌전이 빠지직 뻗어 나왔다.
한수호는 눈을 뜨자마자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구천승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구천승에게 말을 건넬 여유가 없었다.
‘대체 이 힘은 뭐야?’
한수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떠오른 자신의 능력치 정보가 너무도 말이 안 되었기에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신체외적능력] : 888/999
[신체내적능력] : 50/99
[마나] : 12,020(+1,080)/99999
[육체한계치] : 1/4
400이나 오른 신체 능력치는 둘째 치고, 신체 내적인 능력치는 30 가까이 상승했다.
마나는 4천이 증가했으며, 놀랍게도 육체 한계치가 4로 올라버렸다.
‘이거…. 실화냐?’
한수호는 시퍼런 불똥을 팍팍 튕겨내고 있는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때, 스승 구천승이 가까이 다가왔다.
“축하한다. 뇌정을 완벽하게 흡수하는 데 성공했구나.”
“감사합니다. 모두 스승님 덕분….”
한수호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한 발 다가서려는 그때,
콰지익-!
그가 나아가려는 방향으로 강력한 뇌전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구천승은 자신을 향해 날아든 뇌전을 한 손으로 파리 치듯 쳐냈다.
꽈앙!
폭음성과 함께 구천승은 2미터나 뒤로 주르륵 밀려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