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통로가 넓어집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후로 200여 미터를 더 나아가자 통로가 넓어진 덕분에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악취는 전보다 더 심해졌고, 바닥에 고인 물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한수호를 제외한 세 사람은 지칠 대로 지쳤는지, 한 걸음 옮기는 데에도 굉장히 힘들어했다.
“일단 지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한수호 생각에는 이대로 박민재를 만난다면 이들 중 최소 한두 명은 죽을 것 같았다.
독분진에 의해 평소보다 30% 이상 능력치가 떨어진 상태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테니까.
“후. 아니다. 모처럼 기회를 잡았는데, 다시 시간을 준다면 또 도망칠지도 모른다. 지금이 적기야. 놈은 하나고, 우리는 넷이니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이병선의 말에 한수호는 쓰게 웃었다.
그의 말만 들어봐도 사리 판단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병선은 지금까지 발견된 흔적을 가지고 적이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박민재는 혼자 움직이지만, 그의 특성인 괴인혈에 당한 자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좀비가 되어 버린다.
간단히 말해, 다섯 명이 실종되었으면 좀비가 다섯 마리 있다는 말과 같았다.
“적은 혼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겨진 흔적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놈은 혼자가 확실해. 자, 이러고 있지 말고 서두르자고. 어디 보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이려나?”
이병선은 고집을 부렸다.
김재우에게 한수호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오히려 한수호 덕분에 사건의 범인을 턱밑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체력이 좀 달린다고 물러나 버리면 마공사 선배로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수호는 그런 이병선을 더 말리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이병선과 다른 마공사 두 명으로 하여금 어그로를 끌게 하고 한수호 본인은 박민재를 직접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쪽으로 쭉 가면…. 음? 경신 정보과학 고등학교랑 이어지는데?”
이병선이 하수도의 방향과 현재 위치를 가늠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경신 정보과학고요? 거기 폐교된 지 꽤 된 곳이잖습니까?”
학생수의 부족 문제로 수십 년도 전에 폐교된 학교.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부지를 매입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지금은 도심지 속 별천지 같은 장소가 되었고, 풀과 나무가 잔뜩 자라서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침하게 변해버렸다.
“폐교라…. 사람을 납치하는 빌런들이 숨어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구만.”
이병선은 그 폐교가 바로 범인이 숨어있는 장소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 목표가 코앞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해!”
“네, 팀장님!”
세 사람은 이제 곧 이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을 바짝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한수호는 불안하기만 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이번 일을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지원 병력을 부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적의 정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지원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그건 한수호가 요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지원 병력을 불렀다가 헛다리를 짚게 되면 세 사람의 마공사 경력에 큰 스크래치를 남기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한수호는 남은 모든 체력을 끌어올려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세 사람의 뒤를 따르며 주변으로 마나를 크게 흩뿌리기 시작했다.
* * *
공간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창문 하나.
그곳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
핏빛처럼 빨갛게 물든 바닥을 내리쬐는 햇살은 고작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공간만 밝게 비춰줄 뿐이었다.
공간은 음습하고, 축축했으며, 굉장히 불쾌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어두운 공간 한쪽에서 뿜어지는 지독한 살기.
알 수 없는 존재가 어둠 속에 깊숙이 몸을 숨긴 채, 거친 숨을 훅훅 내쉬고 있었다.
꿈틀
공간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적갈색의 기다란 털을 지닌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순간, 어린아이 몸통보다도 큰 손 하나가 바닥을 내리쬐는 햇살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은 새까맣고, 손가락은 무척이나 길었으며, 손등에는 고슴도치의 가시와 같은 털들이 수북하게 솟아나 있었다.
사람의 것처럼 정확히 다섯 개의 손가락을 지녔지만 손톱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바위도 쉽게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괴물의 손은 햇빛에 노출되자 하얀 연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몇 초 버티는가 싶더니 털과 피부가 지글지글 끓어오르자 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어둠 속에서 울리는 묵직한 음성.
그건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둠 속의 존재가 좀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높이 5미터에 최소 50평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공간의 구석.
그곳에 커다란 존재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존재의 왼쪽에 일곱 사람이 주렁주렁 거꾸로 매달려 있다.
어둠의 존재는 손을 뻗은 상태였는데, 손가락 하나를 사람 심장에 푹 꽂아 넣고 있었다.
쭈우욱. 쭈욱.
빨대로 음료수를 빨아 먹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손가락이 꽂힌 사람의 몸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후우우….”
검은 존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뽑아낸 순간,
푸쉬이익
3미터를 훌쩍 넘기던 존재가 크기를 급속도로 줄이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190이 조금 안되는 키.
상체는 완전히 탈의한 상태였고, 하체엔 다 찢어진 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몇 명이나 더 죽여야 괴인혈의 최종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거지?”
사내는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간 눈을 빛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때, 괴인의 머리가 한쪽으로 홱 돌려졌다.
“…. 음?”
그의 감각에 이쪽으로 다가서는 낯선 기운 세 개가 느껴졌다.
잘 정제된 마나력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진급 이상의 마공사인 게 분명했다.
“마침 먹이가 제 발로 찾아왔군.”
사내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길게 솟아난 손톱으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체들의 다리 위쪽을 휙 그었다.
투둑. 투두둑.
다리를 묶고 있던 끈들이 끊어지자 시체들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사내는 그런 시체들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귀부의 사령마들이여. 내 명을 따를지어다.”
사내의 손에서 핏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그 기운에 닿은 시체들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따다닥. 딱딱딱….
따그락. 딱딱.
피떡이 된 얼굴에 눈두덩이가 휑하니 뚫려있는 시체들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느릿느릿 사내 쪽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심장엔 구멍이 뻥 뚫려있었는데, 그 구멍에선 검은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나의 사령마들에게 명령한다. 지금 즉시, 내 영역을 침입한 자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라.”
사내의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이었다.
프스스슷-
일곱의 사령마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에는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 느릿했지만, 한번 행동을 개시하자 그 빠르기는 전광석화와 같았다.
사내는 다시 어둠 속 깊숙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사악하게 웃음 지었다.
“흐흐흐. 잘하면 오늘 최종 단계에 진입할 수 있겠어….”
사내는 빠르게 어둠 속에 동화되었고, 기척마저 완전히 지워버렸다.
* * *
콰르르르릉.
이병선의 발차기에 머리를 얻어맞은 시체가 벽을 부수며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아무런 충격도 없는지 벌떡 일어섰고, 온몸의 뼈를 덜그럭거리며 무섭게 돌진했다.
끼야오오오오
시체의 입에서 튀어나온 괴성은 이병선의 귀를 무척이나 괴롭게 만들었다.
“젠장!”
이병선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양손에 클로를 착용시켰다.
범인을 찾지도 못 한 상태에서 이런 시체들을 상대로 ‘이글클로’를 꺼내 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이 시체들을 처치할 방법이 없었다.
“뒤는 나중에 생각하고 전력으로 이놈들부터 쓰러뜨린다!”
이병선이 소리치자 다른 동료 마공사들도 본인의 독문무기를 꺼내들었다.
김명우는 삼단봉을 연결해 장창으로 변화시켰고, 최일선은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던 연검을 풀었다.
그들 세 사람이 상대하고 있는 건, 네 구의 사령마였다.
모두 일곱의 사령마가 나타났지만, 한수호 쪽으로 셋이 따라붙었다.
한수호는 자신이 어그로를 끌 테니 나머지를 서둘러 처리하라며 도망치듯 사라졌는데, 어이없게도 사령마가 셋이나 그 뒤를 쫓아간 것.
이병선은 한수호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시체 네 구를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령마들은 지독하리만치 끈질겼다.
팔이 잘려도, 머리가 날아가도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잘렸던 신체 부위를 다시 붙여서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건 좀비도 아니고, 스켈레톤도 아니었다.
겉보기엔 언데드였지만, 무한 재생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장태산 학생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희 두 녀석도 몸 성히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아!”
이병선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령마들을 상대하며 괜히 동료 마공사들에게 화풀이였다.
* * *
스스슥.
한수호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세 구의 사령마도 엄청난 속도였지만, 한수호에 비하면 송골매 앞의 참새나 다름없었다.
한수호는 폐교의 지하 공간을 무섭게 가로지르며 감각에 걸려든 뭔가를 찾아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거의 다 왔다.’
한수호의 감각에 따르면, 50여 미터 전방에 궁급에 이르는 강력한 마나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박민재! 네놈의 손에 더 이상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게 해주마!’
한수호는 박민재로 예상되는 범인의 손에 희생자가 다섯 명인 줄 알았는데, 무려 일곱이나 되는 사령마가 등장하자 애초의 계획을 변경했다.
원래는 사령마 다섯을 이병선에게 묶어 놓고 자신은 몰래 박민재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령마가 일곱이나 되기 때문에 혼자 움직인다면 이병선과 두 마공사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사령마는 강하지 않지만, 놀랄 만큼 빠르다.
딱히 방어력이 좋거나 강력한 공격력을 지니지 않았지만, 한 방에 짓뭉개거나 산산조각을 내지 않는 이상은 쉽게 쓰러지지도 않는다.
그런 사령마가 일곱이면 이병선 일행은 10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지쳐서 죽고 말리라.
그래서 한수호는 자신이 직접 어그로를 끌어 사령마 셋을 달고 왔다.
이제 박민재가 숨어있는 장소를 찾았으니, 더는 사령마를 달고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쯤이 좋겠군.’
한수호는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적갈색의 이끼가 가득한 지하 통로.
그 끝에는 심하게 녹이 슨 철문이 놓여 있었다.
저 철문 너머에 놈이 있는 게 분명했다.
키야아아악!
캬오오오!
우히이이익!
단숨에 한수호를 따라잡은 세 구의 사령마.
놈들이 팔다리를 마구 덜렁거리며 한수호를 뜯어먹을 듯 머리부터 앞세워 달려들었다.
한수호는 놈들이 거의 등에 다다랐을 시점에 몸을 홱 돌리며 왼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휘우웅
한수호의 단단한 팔근육이 꿈틀대며 두꺼운 팔뚝이 허공을 휘저은 순간,
퍼버벅
세 번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령마 세 구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나갔다.
한수호가 완전히 몸을 돌렸을 때, 그의 오른 주먹이 세 차례 번쩍했다.
꽝! 꽝꽝!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없는 사령마의 몸뚱이가 통로 천장에 철퍽하고 내쳐졌다. 그리고,
퍼엉! 퍼벙. 펑!
사령마 세 구가 동시에 풍선처럼 터지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사체 조각들.
하지만 단 한 조각도 한수호의 몸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수호의 몸 주변은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라도 둘러쳐진 것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사체 조각들은 그 막에 부딪히자 단숨에 녹아 사라져 버렸으니까.
“어이, 어이! 아직 가면 안 되지? 뭐가 급해서 얼굴도 안 보고 도망부터 치는데?”
한수호가 철문 쪽을 돌아보며 한 소리 외친 순간, 그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두꺼운 철문이 콰직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고, 뻥 뚫린 공간으로 무언가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