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새하얀 공간.
하늘도 땅도 하얗고, 벽조차 없는 끝없이 하얀 곳에 유색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배경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검은색의 쇼파.
그 쇼파엔 편안한 회색 도복 바지에 상의를 완전히 풀어헤쳐 탄탄한 가슴과 복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한 사내가 드러눕듯이 앉아 있었다.
쇼파에 두 팔을 쫙 펼쳐놓고, 머리를 뒤로 젖혀 얼굴에 하얀 수건을 덮어 놓은 사내.
그가 호흡을 할 때마다 얼굴을 덮고 있는 얇은 수건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문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간에 오직 그 하나만이 색을 가진 채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흐으읍. 후우…. 흐으읍! 푸우….”
매우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호흡.
수건 때문에 숨 쉬는 게 어려울 텐데도 전혀 불편함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아무 것도 없던 하얀 공간에 잔잔한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묘한 울림이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젖히고 있는 사내의 얼굴 바로 위에 작은 스크린 하나가 띄워졌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검은색 스크린.
스크린에는 전화기 모양의 아이콘이 떠올라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네모난 스크린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사내의 고개가 살짝 들려졌다.
“뭐야?”
수건 아래에 감춰진 사내의 입에서 중저음의 듣기 좋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57번 회선에서 온 연락입니다.”
보이지 않는 여인의 음성.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57번? 그거 대한민국 핫라인이잖아?”
“네, 맞습니다.”
“연결해.”
사내는 살짝 기대감에 찬 음성으로 전화 연결을 요구했다.
그러자 검은색 네모난 스크린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 정말 연결합니까?”
여자의 음성은 네모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며? 거기서 핫라인을 통해 나한테 연락할 사람은 딱 한 명뿐인 거 몰라서 묻나?”
사내는 여전히 쇼파에 드러눕다시피 한 상태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핫라인이라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땐 한 번도 외부와 통화한 적이 없으셔서….”
“야, 제론. 아무리 네가 사람의 감정이 없는 시스템 속 A.I라고는 해도 인간에겐 혈육이 가장 소중하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거나.”
사내의 음성에 살짝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론이 명령을 바로 실행하지 않고 되묻는 형태의 대화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었던 모양.
“지난번 대한민국에 다녀오셨을 때, 두 번 다시는 따님의 연락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넌 그게 내 진심이라고 생각해? 내가 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가장 잘 아는 녀석이 내 진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니. 이거, 수행원을 던으로 바꾸든가 해야지, 원.”
“죄송합니다.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제론의 음성이 다급해지더니 바로 달칵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아빠?”
네모난 스크린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푸른색 선이 앳된 여인의 음성에 맞춰 높낮이가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지?”
여전히 수건을 덮어쓴 사내는 반가움을 애써 숨기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쳇. 아빠 아직도 화났어? 뭐 그런 거 가지고 몇 달째 삐져 있고 그래? 아빠가 애도 아니고.”
“난 아빠 말 안 듣는 딸은 둔 적 없다.”
“아니, 갑자기 와서 어렵게 붙은 아카데미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자고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중고등학교 학생도 아니고 말이야.”
스크린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굉장히 활기찼고, 한마디 한마디에 굳은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용건만 말해, 용건만.”
사내는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를 유지했다.
“에휴. 내가 정말 못 말린다니까. 아무튼, 알았으니까 용건만 말할게. 어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어.”
“듣고 있으니 말해.”
“아빠, 쌍어궁하고 친해?”
갑작스런 말에 사내의 호흡이 뚝 멈췄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쌍어궁 녀석들이 널 괴롭히더냐?”
사내의 음성이 지독하게 차가워졌다.
그러자 딸이 재빨리 대답을 내놨다.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쌍어궁 궁주가 죽어버린 거 같아.”
“…. 뭐? 그 개자식이 죽어?”
사내가 뒤로 젖히고 있던 머리를 확 당겨 일으켰고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이 훌렁 날아갔다.
그런데 수건이 사라진 사내의 얼굴에는 어느새 새하얀 가면 하나가 씌워져 있었다.
달걀 모양에 두 눈만 뻥 뚫린 하얀색 가면.
그 가면의 왼쪽 이마에는 아홉개의 꽃잎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응. 공식적으로는 실종됐다고 알려졌는데, 내 감각엔 세상 어디에도 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고 있거든.”
“네 탐지 특성으로도?”
“응.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시험해 봤는데, 어디서도 느껴지지가 않아.”
“그럼 죽은 게 확실하다는 소린데….”
가면의 사내는 눈을 얇게 뜨면서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대체 누가 그 엄청난 놈을 죽일 수가 있지? 그놈은 7대 마화기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새한교의 교주조차 상대를 꺼려하는 폭렬지옥을 지닌 놈이라고.”
“나도 아빠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쌍어궁 구역 근처에는 접근도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사건이 터졌어. 글쎄, 폭마 박준규가 정의국 국장인 백진성이었다는거 알아?”
“백진성!”
가면 속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도 모든 황도 13궁의 궁주들의 진짜 정체를 다 알지는 못한다.
총 13명이나 되는 궁주들 중, 정체를 파악한 인물은 고작 셋.
쌍어궁의 궁주가 폭마 박준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백진성이었을 줄이야.
사내는 자신의 딸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으며, 도대체 어떤 자가 있어 박준규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는지를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자를 없앤 게 누군지 알아? 어처구니 없게 마공 아카데미 본교 1학년 학생이야. 이름은 장태산.”
“1학년생? 너 지금 아빠랑 장난치는 거지?”
“아니야, 아빠. 이건 거의 확실해. 보니까, 백진성이 장태산을 데리고 이상한 공간으로 사라졌다가, 거기서 혼자만 살아 돌아왔더라고.”
앳된 여인의 음성엔 굉장히 놀란 듯한 감정이 여실하게 실려 있었다.
“이상한 공간? 설마…?”
“아빠도 눈치챘지? 그 백진성도 아빠처럼 제로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거기로 장태산이라는 학생을 끌고 갔는데, 오히려 당하고 만 거고. 장태산도 팔을 크게 다쳐서 왔다는데, 쌍어궁의 궁주만 가질 수 있는 신물을 챙겨왔다고 했어.”
“장태산만 귀환하고 박준규의 시체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응. 손가락만 남기고 도망쳤다던데?”
“그래? 큭큭큭. 그거 참 재밌는 녀석이군.”
가면의 사내는 차갑게 웃음을 흘리며 쇼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완전히 풀어헤쳐진 상의 사이로 비치는 근육질 몸매는 헬스 트레이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탄탄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렇지? 백진성의 손가락하고 신물까지 가져온 녀석이 그가 도망가게 놔뒀을 리가 없잖아.”
“내가 재밌다는 건 그게 아니다.”
“그럼 뭔데?”
“나와 같은 아공간 영역을 지닌 건, 백진성이 아니라 장태산이라는 녀석일 거다.”
“장태산이?”
네모난 스크린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놀란 음성.
가면 사내는 그 스크린을 응시며 피식거렸다.
“내 제로 영역과 유사한 능력이라면, 능력을 펼친 당사자가 죽는 즉시 영역이 깨지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현실 세계로 튕겨 나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시체도 없이 장태산 혼자 귀환했다는 건 그 영역의 주인이 백진성이 아니었다는 말인 거고.”
“…. 그거 정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죽인 아공간 능력자가 몇인지 알면서도 묻는 거냐?”
가면 사내는 쇼파 앞의 새하얀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자기 볼을 한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와. 그건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그보다, 너…. 설마 그 사고 현장에 너도 있었던 건 아니지?”
“아, 아닌데? 내가 거기 왜 있어. 나도 어렵게 구한 정보야.”
“…. 부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마.”
가면 사내는 자신의 딸을 깊이 걱정하는 말투였다.
“사실…이야. 난 아카데미에 친구도 없이 혼자서만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
“그래야 할 거다. 특히 그 장태산이라는 녀석하고는 가까이 하지 말고. 백진성을, 아니. 폭마 박준규를 죽이고도 팔 하나 다친 걸로 끝났으면, 그놈은 이미 궁급을 넘어섰다는 말이니까.”
“궁급을 넘어섰다고?”
“어쩌면, 이 아빠하고도 큰 차이가 안 날지도 모르고.”
“에이, 설마?”
“폭마 박준규가 폭렬지옥을 제대로 펼쳐낸다면 나로서도 쉽게 막기 어려울 정도다. 박준규가 죽음을 앞두고 폭렬지옥을 썩혔을 리가 없으니, 장태산은 그걸 맞상대하고도 멀쩡했다는 소리지.”
가면 사내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광망이 뿜어졌다.
음성으로 통화 중이었기에 아빠의 눈빛을 볼 수 없었던 스크린 너머의 음성은 ‘아’ 하는 감탄사만 흘릴 뿐이었다.
“곧 방학이지?”
“으응. 2주 뒤에 방학 시작이야.”
“아빠가 곧 한국에 가마. 직접 장태산이라는 녀석을 한번 만나보고 싶군.”
“아빠가 직접? 또 누구 해치려고 오는 건 아니지?”
“네 눈엔 이 애비가 아무나 죽이고 다니는 살인자로 보이냐? 여기선 이 애비를 신처럼 떠받드는데, 어째 딸내미는 정반대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가면 사내는 속이 상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가 내 주변 사람들을 한두 명 죽였어야지!”
“그놈들은 하나같이 죽어도 될 놈들이었다. 감히 내 딸을 괴롭혀? 감히, 내 금쪽같은 딸내미의 몸에 상처를 입혀! 난 아직도 그놈들을 너무 쉽게 죽여버린 게 아닌가 후회하고 있다.”
“아, 쫌! 또 그러면 나 정말 아빠랑 인연 끊어 버릴 거야!”
딸의 화난 목소리에 가면 사내가 움찔했다.
“흐음. 뭐, 알았다. 이번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마.”
“그 약속 꼭 지켜줘. 내 친구들한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친구들…?”
“어? 아니, 친구가 될지도 모를 동급생들.”
“너 이 녀석…. 친구가 생긴 모양이구나? 그런데, 설마 그 장태산도 친구인 건 아니겠지?”
가면 사내가 스크린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묻자, 음성이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가면 사내가 엄중하게 한마디 했다.
“너도 알다시피, 아공간 영역을 지닌 마공사 치고 제정신으로 사는 놈은 한 놈도 못 봤다. 장담하건데 장태산의 정신 상태도 온전치 못할 거야. 그러니 아예 가까이할 생각을 마라. 이번에 가서 어떤 놈인지 확인해 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제압해서 내 제로 영역으로 끌고 가서 영원히 묶어 놓을 거다. 그러니 네 친구가 아니길 바라마.”
“…. 위험하지 않으면 데려가지 않을 거지?”
딸의 질문을 통해 장태산이 이미 친구라는 사실을 눈치챈 가면 사내.
“그건 만나봐야 알 수 있다.”
“알았으니까, 꼭 공정하게 판단해 줘. 내가 듣기로 장태산은 굉장히 착한 녀석이거든.”
딸은 제삼자인양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찾아가마.”
“응. 알았어. 출발하기 전에 연락해, 아빠.”
“그러마.”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스크린에 떠 있던 푸른 가로선이 하나의 점으로 변하며 팟 하고 사라졌다.
“아공간 영역을 특성으로 지닌 마공사는 정말 끊임없이 등장하는군요. 이번에도 정상은 아니겠죠?”
제론의 음성이 들려오자 가면 사내는 다시 쇼파에 몸을 던졌다. 그가 두 팔을 쫙 펼쳐 쇼파 상단에 걸치고, 고개를 뒤로 젖히자 멀리 튕겨 나갔던 수건이 날아와 얼굴을 덮었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가면이 머리 위쪽으로 스르륵 밀려 올라갔다.
“정신 수치가 낮은 자가 아공간 영역의 힘을 갖게 되면, 열이면 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카뮤 님처럼 정신 수치를 10까지 올릴 수 있는 인간은 거의 드물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도 혹 모르니 조금은 기대를 걸어볼까?”
사내는 장태산이라는 학생이 부디 높은 정신 수치를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그가 죽여온 자들처럼 능력만 높고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지 않다면 아무리 딸의 친구라 할지라도 죽이거나, 자신의 제로 영역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젠 정말 쉴 테니 핫라인은 모두 꺼두도록.”
사내의 조용한 음성에 제론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카뮤 님.”
제론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허공에 떠 있던 네모난 스크린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