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유 본부장이 허락했으니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떤가?”
백진성은 한시라도 빨리 한수호의 진짜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가 손바닥을 마주치자 어디선가 사용인들이 나타나서 식탁과 음식들을 깨끗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유대룡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되기에 바로 의견을 내놓았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그래 장태산 학생이 생각하는 제대로가 무엇인지 듣고 싶군.”
“윤후에게 듣기론, 이곳에 수련을 위해 만들어진 미니 콜로세움이 있다고 하던데요. 다 같이 그곳에 가서 본부장님의 가르침을 받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미니 콜로세움? 아, 트레이닝존을 말하는가 보군.”
백진성은 한수호가 말하는 미니 콜로세움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챘다.
마음은 당장 이곳에서 결과를 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급한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흔쾌히 허락하기로 했다.
“좋은 생각이야. 장태산 학생 말처럼, 이왕 시작했으니 구색도 한번 맞춰 보세나. 하하하!”
백진성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트레이닝존으로 향했다.
트레이닝존은 정말 작은 콜로세움과 같았다.
10분의 1 정도로 크기만 줄었다 뿐이지, 건물 형태나 구조가 콜로세움과 상당히 흡사했다.
백진성이 트레이닝존의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의 중앙에서 홀로 세 명에게 둘러싸인 강우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우진은 팔짱을 낀 채 송지문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세 명의 기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거친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선 건 바로 그때였다.
이제 막 3대 1의 전투가 시작되려는 찰나, 유대룡을 비롯해 백진성과 아카데미 학생들 일곱 명이 한꺼번에 등장하자 송지문과 권열은 급히 포위를 풀었다.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은 누가 봐도 한 사람을 셋이서 괴롭히는 것에 불과했기에 괜한 오해를 사기 싫었던 것.
이를 눈치챈 강우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하던 대로 계속 쪽 수로 밀어붙이시지, 왜 갑자기 손을 거두시나?”
강우진이 얄미운 소리를 꺼내자 송지문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네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다만, 네 녀석의 마공사로서 체면을 생각해 이번 한 번은 참도록 하지. 대신, 내 동생과의 약속을 깨뜨린 것에 대한 사과는 반드시 받아야겠다!”
“사과요? 내가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난 송유나와 그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합니까?”
“계속 발뺌할 생각이냐? 내 동생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없는 약속을 혼자 만들 수 있냔 말이다!”
“미쳤나 보죠,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강우진.
그 말에 송지문의 눈에서 번개가 번쩍했다.
쾅!
바닥을 박차고 날아간 송지문은 비웃음을 가득 보이고 있던 강우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바로 그때,
콱!
송지문의 주먹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두꺼운 손 하나.
“이 주먹으로는 나무판자 하나 못 부수겠구나.”
어느새 송지문의 코앞에 서서 무덤덤히 일침을 내리고 있는 인물은 유대룡이었다.
“본부장님…?”
그를 알아본 송지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송지문은 사자검왕 송혁의 아들이자, 마공 아카데미 서울 본교의 졸업반 학생으로 이미 수차례 유대룡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내년 2월, 졸업과 동시에 특무부의 핵심 요원으로 이미 자리가 내정되어 있는 상태라 송지문에게 유대룡은 직장 내 최고 상사나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뻗어내는 주먹은 그 결과 또한 보잘것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죄송합니다.”
유대룡의 한마디에 송지문은 즉각 수그러들었다.
자세를 바로 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뒤쪽으로 물러났고, 권열, 유재형과 함께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다가서는 유재형을 빤히 바라보던 유대룡이 살짝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친구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올바로 바로잡아 줄 생각을 해야지, 함께 부화뇌동하여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할 생각이냐?”
아들을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에 유재형이 몸을 움찔했다.
“휘둘리는 게 아니라….”
“됐다. 넌 더 이상 나서지 말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지만, 아버지.”
“선배 셋이서 후배 하나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내 말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
유재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자신의 주장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유대룡의 말은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유재형이 맥 빠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자, 유대룡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한수호와 친구들을 바라봤다.
“가르침을 내리기에 아주 좋은 날씨로구나.”
유대룡은 자신의 아들에게만 엄할 뿐, 다른 학생들에겐 더없이 친절했다.
“자, 준비되었으면 바로 시작해 볼까?”
유대룡은 몇 걸음 더 걸어가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진성은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강우진을 이용해 송지문을 자극하면, 유재형까지 이곳에 올 거라는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군.’
백진성은 유대룡이 아들인 유재형을 여기서 마주하게 되면 평소보다 더욱 엄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야 장태산이라는 학생이 진짜 실력을 감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대룡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건 심연의 눈으로 이미 저 녀석의 진짜 실력을 알아냈기 때문일 테지. 이제 강우진만 조금 자극해서 녀석이 특성을 사용하게 만들면, 정체가 낱낱이 밝혀지겠군. 그럼 난 손 하나 안 대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백진성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거였다.
장태산의 정체를 파악해 낸 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확실히 제거해 버리는 것.
그는 지금 그것을 위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등장인물은 모두 준비됐다.
남은 건, 장태산의 정체를 밝히고 우연을 가장해 강우진의 손에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백진성이 예상하건대, 장태산은 그가 속한 황도13궁의 크나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법원 게이트에서 장태산이 황도13궁의 궁도들을 상대로 엄청난 무위를 선보였다는 것도 오래전에 보고받은 상태.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 뻔했기에, 이쯤에서 싹을 자를 필요가 있었다.
장태산을 오늘 정리해야 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강우진이 강씨호왕가의 적호대를 통해 알아낸 것처럼, 아들 백윤후는 여의도 게이트의 알파 몬스터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백진성에겐 그런 백윤후를 조종하는 주체가 바로 장태산이며, 그가 알파 몬스터의 화신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 장태산을 처리해야 했다.
‘장태산이 여의도 게이트의 알파 몬스터라는 사실만 밝혀낸다면, 강우진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강우진은 강씨호왕가의 소가주이지만, 그것 말고도 놀랄만한 신분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신분 때문에라도 강우진은 여의도 게이트의 알파 몬스터를 발견한다면 현장에서 즉시 처치해야 했다.
즉, 장태산은 오늘 이 자리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백진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한수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한 말이었다.
“제안?”
“네. 제안이요. 저희가 저택에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난 듯합니다. 아무리 유본부장님의 가르침이 소중하다고는 하나, 바쁘신 분의 시간을 무한정으로 빼앗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한수호의 말은 틀린 게 아니기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가르침을 받는 것 보다, 좀 더 힘들겠지만 저희 모두가 한꺼번에 가르침을 받는 게 어떨까요?”
“한꺼번에? 너희 일곱 명이 함께 유본부장과 대결을 벌이겠다는 것이냐?”
한수호가 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백진성이 바로 반응하며 나섰다.
“비슷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르죠. 저희들이 유본부장님과 대결을 벌인다면 오직 저희만 이득을 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늘 이렇게 아카데미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실력이 쟁쟁한 선배님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으니 저분들에게도 뭔가 가르침을 받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확히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팀 대 팀으로 단체 대결을 벌이는 것이죠.”
“단체 대결?”
백진성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이 되어 한수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희들은 국장님과 한 팀을 이루고, 선배님들은 유본부장님과 한 팀을 이루는 것이죠. 8명 팀 하나와 5명 팀 하나. 숫자는 저희가 살짝 많긴 하지만, 졸업반 선배님들 셋에 3학년 최강자인 강우진 선배가 있으니 얼추 균형은 맞춰지지 않겠습니까?”
한수호의 말에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오~’ 하는 표정이 되었다.
제외된 두 사람 중 하나인 백진성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나를 유본부장과 동급으로 생각해 준 것은 고마우나, 단체 대결은 주의해야 할 것도 많고,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다. 기분 좋게 여길 찾아온 손님들에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구나.”
“허허. 백국장.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장태산 학생의 말대로 8대 5의 대결이면 훨씬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서도 단체 대결은 졸업 때까지 고작 두세 번 정도밖에 경험할 수 없을 테니, 아주 좋은 기회일 것 같군. 다만, 자네와 내가 맞상대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유대룡은 한수호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자 한수호는 이때다 싶어 바로 유대룡의 말을 받았다.
“제약을 하나 거는 거죠. 본부장님과 백국장님은 서로 직접적인 공격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대신, 같은 팀의 일원이 위험할 때는 얼마든지 그 공격을 대신 받아주거나 반격할 수 있는 걸로 하고요.”
“그거 아주 좋구나. 한 가지만 뺀다면 말이지.”
유대룡은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아들, 유재형을 응시했다.
“내 아들 녀석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게, 저 녀석을 너희들 팀에 끼워주었으면 좋겠구나.”
유대룡은 유재형을 자신의 팀에 넣어 아버지로서 보호해 주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냉정한 말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사자가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것과 흡사한 교육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이쪽에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녀석이 하나 있으니까요.”
한수호는 히죽 웃으며 백윤후를 바라봤다.
백진성의 아들인 백윤후도 같은 경우였다.
한수호의 뜻을 바로 이해한 백진성.
그는 이번 팀 대결을 꼭 진행해 보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내보이는 유대룡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자신이 거부한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대결이었다.
“후…. 나도 같은 생각이다. 윤후는 유본부장 팀으로 보내는 게 낫겠군.”
결국, 백진성도 한수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이 제안을 찬성하지 않은 인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내가 왜 네 녀석 말에 따라 팀 대결을 벌여야 하지? 난 아무 이득도 없는 대결을 벌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저 선배들과 한 팀으로 묶이는 것도 싫다고.”
강우진이였다.
그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한수호가 또 끼어들었다.
“그럼 강우진 선배도 저희 팀으로 오시면 되죠. 대신, 저분이 본부장님 팀에 합류하면 될 것 같은데요?”
한수호가 말한 ‘저분’은 다름 아닌 구진철이었다.
“허어. 학생이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여기 구 보좌관은 이미 궁급에 가까운 마공사라네. 우진이가 동급생 중에서는 돋보이는 강자이긴 하나, 구 보좌관에 비할 바는 아니라네.”
백진성은 강우진을 자기 팀으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한수호의 상대 팀이 되어야 그가 바라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
그런데 여기서 강우진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내가 너희 팀에 들어가는 대신, 구진철 보좌관이 상대 팀에 들어간다? 하하. 이거, 갑자기 구미가 확 당기는구만. 뭔가 다른 흥밋거리가 하나만 더 있으면 나도 이 대결…. 굉장히 하고 싶어질 것 같단 말이지.”
“그럼 제가 흥밋거리를 드리죠. 이 팀 대결에서 이긴 팀은 진 팀에게 다섯 가지의 요구를 할 수 있는 걸로요.”
한수호가 요구사항을 다섯 개로 제한한 이유는, 이 대결이 9대 5의 대결이기 때문.
9명 팀에겐 크게 메리트가 없는 조건이지만, 어차피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진행하는 대결이니만큼 대결 자체가 이미 보상이나 다름없었다.
“이긴 팀이 진 팀에게 요구를 할 수 있다라…. 그거 마음에 드네.”
강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다.
1학년 학생으로만 6명이나 되는 한수호 팀이 이길 확률은 무척이나 낮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낮은 확률이 강우진의 흥미를 끌어낸 것이다.
“그럼 다 됐네요. 모두들 동의하시는 겁니까?”
한수호가 엷은 미소를 그리며 쭉 돌아보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한설과 양소혜는 벌써부터 의욕을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고, 최지혁과 신소이는 별다른 표정을 보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한수호가 왜 이런 대결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나서는지 궁금해하는 건 이하윤뿐이었다.
“자, 그럼 바로 편부터 나누죠.”
한수호는 백윤후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백국장님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마라. 잘못하다가 아버지 손에 맞아 죽을라. 알았지?”
“…. 재밌냐?”
백윤후는 입을 삐쭉거리며 억지로 걸음을 옮겨 유대룡 쪽으로 걸어갔다.
반대로 유재형이 백진성 쪽으로 왔는데, 그의 얼굴은 아주 죽을상이었다.
백진성의 눈짓을 받은 구진철까지 유대룡 쪽으로 이동해 가자, 두 개의 팀이 만들어졌다.
백진성은 교묘한 말솜씨로 이런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한수호를 힐끔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확실한 가르침을 위해, 이번 대결엔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는 것으로 하마.”
백진성의 한마디에 다들 흠칫 놀랐다.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바는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기나 위험한 특성, 또는 강력한 아티팩트까지 무엇이든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였으니까.